5. 아로마테라피(aromatherapy)
겨울의 저녁은 벌써부터 어둡다. 하굣길, 우중충한 석양을 쳐다보며 나는 8차선 신호등이 뒤바뀌길 기다린다. 한 줌의 바람이 가발 머릿결을 사선으로 쓰다듬는다. 나는 왼손으로 가발 머릿결을 정돈하며 바람의 흔적을 거스른다.
원룸으로 돌아온 나는 가발을 벗으려 했다. 10개나 붙은 반창고 때문에, 손가락 끝의 감촉이 보다 예민해질 필요가 있었다. 도자기를 옮길 때처럼 나는 가발을 조심스레 벗어 거치대에 씌워 놓았다. 가발을 벗은 나는 스트레칭을 했다. 매 관절마다 뼈와 뼈가 맞부딪히는 듯 ‘뿌드득’ 소리가 들려왔다.
피로를 해소한 나는 얼굴과 머리를 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참 동안, 도자기처럼 미끈한 민머리를 살펴본 나는 냉장고에서 시더우드와 로즈마리를 꺼냈다. 나는 시더우드와 로즈마리를 캐리어 오일에 떨어뜨려 희석시켰다.
“띵 동. 띵 동. 나야.” 벨소리에 이어 현관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청명이었다.
약이든 오일이든, 많이 쓴다고 좋은 건 아니었다. 파라켈수스의 말처럼 약은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정량을 초과하여 에센셜 오일을 바른 청명은 한때 피부가 붉어지는 부작용을 경험했다. 또한 로즈마리와 시더우드를 이미 거덜 낸 상태였다. 우리 둘 다 1년 1개월 치를 샀지만 정량대로 투여한 나는 여분이 남았기에 청명이 내 방으로 온 것이다.
방바닥에 앉은 청명은 후드티를 벗었다. 나는 청명의 민머리에다 시더우드와 로즈마리를 발라주었다. 전두부부터 시작하여 두정부, 측두부를 거쳐 후두부까지 아낌없이 발라주었다. 시더우드는 향기가 참 좋았다. 깊은 숲 속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에다 얼마간의 달콤함이 곁들여진 산뜻한 향내였다. 에센셜 오일로 머리가 뒤덮인 청명은 이번엔 내 머리에다 오일을 발라주었다. 나의 온 두피도 에센셜 오일로 반들반들해졌다.
오일을 바른 청명과 나는 20분 동안 명상을 하기로 했다. 알람을 맞춰놓고 우리는 침대로 올라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서서히, 서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이윽고 뻐근했던 몸은 카스테라처럼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화, 수, 목, 일요일에 우리는 아로마테라피와 명상을 시행하고 있었다. 둘 다 보완대체요법이었다. 현대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처럼, 전신 탈모증 말기에 접어든 우리도 대체의학으로 시선을 옮긴 터였다. 어느덧 11개월째였다.
6. 재발(relapse)
대학병원에서의 기나긴 여정이 막을 내렸을 무렵, 나는 수능을 100일 앞두고 있었다. 거대한 실패를 맞봤지만 잠시 멈추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되레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청명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못했다. 시험 잘 쳐, 라는 수능 하루 전날의 문자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청명과 내가 통화를 한 건 수능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2시간이나 통화할 정도로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였다. 초반에 우리는 그동안의 일들로 수다를 떨었다. 또래 여고생들처럼 청명과 나는 시종일관 명랑하고 경쾌한 음성으로 한참을 깔깔거렸다. 대화의 향방은, 그러나 ‘머리카락’이라는 한 단어로 마치 스위치를 껐다 켜는 것처럼 급변하였다. 따스한 웃음기는 일순간에 증발했고 분위기는 돌연 무거워졌다. 청명과 나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가라앉은 진지한 어조로 은밀한 대화를 시작했다.
전신 탈모증의 손길은 여전했다. 나뿐만 아니라 청명한테도 말이다. 청명은 원형 탈모증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밤샘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여름철에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고, 절반 남짓하던 머리카락이 100일의 전력질주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고, 청명은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명아... 정말 유감이야.”
숱한 전쟁을 치룬 퇴역군인처럼 의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청명에게 나는 수화기를 통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 나는 비로소 2년 전 가을, 해산바닷가에서 청명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거울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다보는 심정이었다. 청명의 가슴속 거대한 구멍이 내 마음 속에 묻힌 흉터같이 느껴졌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메울 수 없는 거대한 블랙홀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덮어주고 싶었다.
청명은 연신 괜찮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다, 라고 청명은 거듭 말했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물론 절반가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기뻐할 수도, 가발을 벗을 수도 없으니 실효성은 상당히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이었다. 수만 개의 머리카락이 빠졌는데 괜찮을 리 만무했다. 머리카락이 빠질 때의 그 비밀스러운 충격은 분명 가슴속에, 하다못해 무의식에라도 상흔처럼 남을 터였다.
7. 우울증(depression)
얼마 지나지 않아 청명과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가 다니던 N대학병원 바로 옆의 N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청명도 마찬가지였다. N대학교와의 거리-버스로 1시간 반-에다 가발 쓰는 시간을 고려하여 부모님은 원룸을 얻어주었다. 청명도 매한가지였고, 우리는 같은 원룸의 같은 층에서 살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전신 탈모증이 머리에다 옭아맨 포승줄의 위력은 한결같았다. 청명과 나는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원룸으로 돌아왔다. 가발을 스위치해야 하는 OT, MT는 물론 동아리 활동에도 불참했으며 날씨 좋은 주말에도 방에 콕 틀어박혔다. 마치 등껍질로 파고든 거북이처럼 우리는 원룸에만 콕 처박혀 있었다.
처음엔 좋았다. 두더지 같은 생활이 외려 만족스러웠다. 입시 공부와 대학병원과 전신 탈모증과 가발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학기가 지나자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원룸에서 보는 드라마도, 영화도, 폰 게임도, 무엇보다도 미지근한 물 같은 하루하루가 따분해졌다.
나에게 머리카락 결핍증이 나타난 건 그즈음이었다. 머리카락은 원하는 것이라기보다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다이아몬드보다는 물 내지 비타민에 가까웠다. 다이아몬드가 없다고 해서 결핍증이 나타나진 않지만 머리카락의 결여가 오랫동안 지속되니 결핍증이 나타났다. 활력이 사라지고, 주위에 무관심해지고, 무가치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궁극적으론 삶에 대한 애착과 즐거움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흡사 몸과 마음의 정기를 잃어 고장난 컴퓨터가 된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머리카락에 대한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왔다. 2주 동안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면 이 정도의 목마름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삶에 지쳐 머리털을 망각했던 청명과 나는 다시 머리카락을 애타게 갈망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없어도 시계바늘은 성근히 돌아갔다. 무의미한 나날이 되풀이되면서 가을이 되었고, 나는 원형 탈모증 4주년이자 전신 탈모증 3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머리카락 결핍증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뭔가 묘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향한 애끓는 구애는 비정할 정도로 일방적이었고, 우리는 그저 시간의 홍수에 휩쓸린 작은 나뭇가지처럼 맥없이 떠밀려 갈 뿐이었다. 그런 무자비한 흐름을 거스르기 위해서 선택한 카드가 바로 한의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