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대머리가 되면서 생길 수 있는 우울증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만하임 행정법원
1. 쿠싱 증후군(cushing syndrome)
16년간 유례없던 무더위였다. 가발을 쓰고 맞이한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이었다. 동복과 춘추복을 거쳐 교복은 하복으로 뒤바꼈지만 나는 여전히 가발을 쓰고 학교를 다녔다. 태양에서, 자동차에서, 아스팔트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에 가발은 찜질방이 되었고, 가발을 투과한 자외선은 전자레인지의 마이크로파처럼 두피를 가열시켰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두피의 땀샘은 폼페이를 집어삼킨 베수비오 화산처럼 대폭발했다.
그해 여름은 머리를 삭발한 이래로 가장 많은 머리카락을 보유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약을 일곱 달째 복용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머리털도 얼마간 자라났다. 작년 12월 31일, 머리를 밀었을 당시 내 머리카락은 정확히 0개였다. 지금은 대략... 본래의 10~15퍼센트 정도 될 것 같았다. 전두부에는 한 올 단위로 셀 수 있을 만큼 희박한 머리카락이 돋아났고, 후두부와 두정부는, 특히 가마가 존재했던 부위는 여전히 허허벌판이었다.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곳은 측두부였다. 측두부에는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머리카락이 솟아났는데 절대적으로는 턱도 없는 수준-거울상에서 검은 거미줄을 연상시킬 정도-이었다.
양도 양이지만 질도 질이었다. 새로 자라난, 피아노의 검은 검반만큼도 되지 않는 머리카락들은 중국산 싸구려 작물에 불과했다. 길이도, 굵기도, 탄력도 머리카락보다는 겨드랑이 털에 가까워 보였다. 본래 머리카락이 살짝 팽팽해질 강도로만 잡아당겨도 ‘툭’하고 빠져 버릴 정도였다. 악다구니를 쓰고 버텨주기를 애절하게 희망했지만 머리카락은 속절없이 빠져 버렸다.
치료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많아야 15퍼센트의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나 있는 바람에 내 머리는 여전히 살색 도자기에 불과했다. 그저 민무늬에서 빗살무늬로 살짝 변화했을 뿐이었다. 10만 개의 머리카락에서 1만 5천 개가 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1만 5천 개가 아니라 네 배인 6만 개가 난다고 해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한 가지 절감한 것은, 1만 5천 개든 6만 개든 그 정도의 머리카락으로 살아가기엔 바깥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점이다. 10만 개의 머리카락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부정적인 표징을 가진 자는 영장류의 정글에서 살아가기에 부적합했다.
7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 나는 대학병원에 방문했다. 진료는 지난 몇 달과 똑같았다. 나는 가발을 벗었고, 대학병원 의사는 머리를 확인한 뒤에 약을 처방해 주었다. 다만 한시적으로 진료 간격이 변하게 되었는데, 의사는 다음 한 번만 일주일 뒤에 오라고 말했다. 또한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말했다. 나와 달리 청명의 머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와 같은 약을 복용했지만 청명에겐 약효가 있었던 터였다. 청명의 말로는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로, 가발을 벗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주일이 흐른 8월 초, 나는 부모님과 함께 대학병원에 갔다. 의사는 현재 상황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생각보다 약이 잘 안 듣네요. 얼굴은 달덩이처럼 탱탱해진 반면 머리카락은 거의 안 자랐네요. 아무래도 약을 줄여야겠습니다. 지현이가 먹는 약들은 부작용이 많아서 오래 먹으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약발이 잘 안 나타니까 다른 치료를 한 번 해봅시다. 두 가지 치료를 같이 할 예정인데 하나는 약을 먹는 게 아니라 머리에 바르는 방법입니다. 이게 주 치료법이 될 것이고, 다른 치료법은 머리에 자외선을 쪼여주는 방법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뒤, 의사는 책상에 놓인 여러 개의 인체모형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피부에서 솟아난 머리카락 한 올의 모습을 세로로 갈라놓은 모형이었다. 왼손으로 모형을 들고 오른손의 볼펜으로 가리키면서 의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첫 번째 치료는 국소면역치료법이라는 방법입니다. DPCP라는 물질을 머리에 발라 접촉성 피부염을 유발함으로써 모낭을 공격하는 면역세포의 작용을 희석하는 방법입니다.”
부모님과 나는 상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감지한 의사는 모형을 내려놓고 A4용지를 한 장 꺼냈다. 그러고는 볼펜으로 적으면서 치료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나도, 바로 뒤에 서 있던 부모님도 몸을 기울여 A4용지 가까이로 모여들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지현이 머리에 불이 난 상황인데, 맞불을 놓아서 그 불을 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치료법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머리에 약을 바르면 됩니다. 오늘은 첫 치료다 보니 뒤통수에 작게, 고농도로 발라서 감작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머리가 약간 가려울 수도 있는데, 물파스를 하나 처방해드릴 테니까 그 때마다 바르시면 됩니다. 본격적인 치료는 2주 뒤부터 1주일 간격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치료법은 머리에 자외선을 쪼여주는 방법인데 머리카락이 자라는 데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머리카락이 다 날 수 있을까요?” 엄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는 가야금 줄처럼 애절했다. 의사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나마 효과가 높은 방법입니다만, 머리카락이 난다고 보장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꾸준히 치료하는 게 최선입니다.”
진료실을 나와서 나는 수련의를 따라 바로 옆의 1번 치료실로 들어갔다. 처음 대학병원에 왔을 때 내 머리를 촬영한 왼쪽 눈 밑에 왕점이 박힌 바로 그 의사였다. 의료용 침대에 하얀 커튼이 쳐졌고, 나는 가발을 벗었다. 수련의는 소주 냄새가 나는 물약을 15cm가 넘는 긴 면봉으로 내 뒤통수에 발라주었다. 뒤통수 정중앙 조금 아래 부위였다.
“24시간 동안 머리가 햇빛에 노출되면 안 돼. 약이 분해될 수도 있거든. 머리 씻는 것도 최소한 48시간이 지난 후에 가능해.”
가발을 쓸 틈도 주지 않고 수련의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 치료도 해야 하니까 따라와."
가발을 쓰고 진료를 받고 나면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있다. 진료실을 나서기 전에 다시 가발을 써야 하는데 벽거울은 없고,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은 초조함에 가발은 잘 안 써진다. 약을 처방 받던 지난번까지는 가발을 대충 쓰고 진료실을 나간 다음에, 화장실의 변기칸에서 가발을 다시 정교하게 착용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허겁지겁 가발을 썼다. 가발은 눈을 찌를 정도로 아래로 치우쳤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허둥지둥 수련의를 뒤따랐다. 수련의는 조금 떨어진 3번 치료실로 들어갔다. 3번 치료실에는 여러 가지 장비들이 놓여 있었는데, 수련의는 그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머리에 자외선을 쪼여줄 거야. 머리카락이 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거든. 5분 정도 지나면 뭔가 소리가 들려올 거야. 가발을 벗고 저기 저 스탠드 밑에 머리를 갖다 대볼래?”
진료실에서 가발을 벗었다가 나오면서 다시 착용했다가 1번 치료실에서 가발을 벗었다가 다시 착용한 나는 또다시 가발을 벗어 왼손에 쥐고 침대에 올라갔다. 의료용 침대였지만 나무테이블처럼 딱딱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스탠드의 빛을 두피에 쪼이기 위해 엎드린 채로 가발을 들고 있으니, 허무감과 무력감이 온 몸의 표면을 감돌았다. 오른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는 무의미한 몸짓과 눈을 질끈 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굴욕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5분이 흘러갔다. 휴대폰 진동음과 유사한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다시 가발을 쓰고 3번 치료실을 빠져나왔다.
8월 한 달에 걸쳐서 나는 먹는 약을 줄이다 완전히 끊게 되었다. 대신 금요일 저녁마다 머리에 약을 발랐다. 약은 아빠가 집에서 발라주었다. 한국의 고등학생이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병원에 가는 건 무리였다. 때문에 의사는 한 달 치 약을 건네주며, 집에서 바르라고 배려해 주었다. 약이 눈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아빠한테 약을 바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약을 기다란 면봉에 묻혀 머리 전체에다 바르는,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많이 가려울 거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하나도 가렵지 않았고, 다만 48시간 동안 머리를 씻을 수 없어 갑갑하고 불편할 뿐이었다.
2. 전신 탈모증(alopecia universalis)
여름철 불같이 뜨거웠던 머리를 식힌 건 선선한 가을바람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와 별 상관없던, 우리나라가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나는 생전 처음으로 뼈저리게 실감하였다.
춘추복을 입는 가을이 되면서 나는 원형 탈모증 1주년을 맞이했다. 그즈음이었다. 머리카락 개수가 다시 줄어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아침에 머리를 씻던 나는 대야를 부유하는 머리카락 뭉치를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머리카락은, 채 1만 5천 개가 안 되던 머리털은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나갔다. 절대적인 양 자체가 많지 않았기에 머리카락이 소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채 일주일도 안 되어 머리털은 흔적도 없이 소실되었다. 한여름, 뜨거운 마당에 뿌린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듯 자취조차 남기지 않았다. 하루에 세 번씩, 여덟 달 동안 매일매일 목구멍으로 넘긴 수천 개의 알약은 공허한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의 털, 눈썹, 속눈썹, 겨드랑이 털, 외음부의 모든 털들 또한 별안간 사라져버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코털, 손가락과 발가락의 첫 번째 마디에 있는 털, 심지어 항문에 난 털들마저 한 올도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키보드의 컨트롤 에이와 딜리트 키를 눌러 온 몸의 털이란 털들을 삭제해 버린 것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치 않았다는 듯 온 몸의 모낭이 시치미를 떼는 듯싶었다.
겨드랑이, 그리고 팔다리의 털이 빠진 건 상관없었다. 하나도 가슴 아프지 않았다. 외음부, 항문과 그 외의 미세한 털들도 겉으로 드러나진 않으니 당장의 곤란함은 없었다. 눈썹과 속눈썹은 얘기가 달랐다. 좀 더 깊숙한 미궁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다음 진료일인 11월 말이 되기 전에 부모님과 대학병원에 방문해야 했다. 작년 이맘때가 탈모의 발단이었다면 지금은 글자 그대로 절정이었다.
“팔과 다리를 한 번 봐야겠습니다.” 대학병원 의사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긴 팔 티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나는 청바지도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검은 흔적이 전무한 팔과 다리를 살펴본 의사는 의자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다른 데는 어떻습니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의사는 겨드랑이 털과 음모를 구체적으로 지칭하며 어떤 상태인지 물어보았다. 의사의 말에, 나는 두 줄기의 눈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숨을 내쉬며 의사는 아빠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원형 탈모증의 가장 심각한 유형인 전신 탈모증으로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