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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hair)헤어날 수 없는 탈모
작가 : 탈모인
작품등록일 : 2017.12.16

의대생 한지현은 탈모 강의를 듣고 7년 전을 떠올린다. 평범한 여중생이던 자신의 머리카락이 급작스레 빠지게 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탈모 병변은 돌연변이가 일어난 암세포처럼 분열하고... 결국 지현은 대학병원 피부과에 내원한다. 열일곱의 나이로 모든 머리카락을 잃게 된 지현은 대인기피증과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데...
여느 때처럼 모자를 눌러쓰고 진료를 받고 나온 지현은 '전신 탈모증'을 앓는 동갑내기 유청명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 주고, 진심 어린 위로를 해주는 유일무이한 친구이다.
훗날 의대생이 된 지현은 자신의 힘으로 전신 탈모증을 치료하려 하는데...
가발부터 피부과, 동의보감, 심리상담까지 탈모의 모든 면을 다룬 메디컬 소설!

 
21~22장: 탈모 커뮤니티, 남성형 탈모증
작성일 : 17-12-16 17:19     조회 : 341     추천 : 0     분량 : 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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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탈모 커뮤니티(alopecia community)

  박수 소리가 극장에 울려 퍼졌다. 무대를 내려다보니 밤의 여왕이 쓰러져 있었고, 오페라는 막을 내린 상태였다. 불이 켜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청명과 나도 원룸으로 돌아왔다.

 “청명아. 오늘 같이 자지 않을래?”

  바로 앞집이다 보니 청명과 나는 가끔씩 같이 자기도 했다. 웃음을 머금으며 청명이 대답했다.

 “그럴까? 그럼 조금 있다가 네 방으로 갈게.”

  얼굴과 머리를 씻고 간단히 방을 정리하니 벨소리가 들려왔다.

 “띵 동. 띵 동.”

  나란히 침대에 엎드린 청명과 나는 휴대폰을 켰다. 나는 대다모-대머리는 다 모여라의 준말-에, 청명은 이마반 플러스-이마가 얼굴의 반을 넘어선다의 축약어-에 들어갔다. 둘 다 탈모 커뮤니티 사이트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대다모를 비롯한 탈모 커뮤니티에 들렀다. 갖가지 이유로 머리카락이 빠진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나는 최근 며칠간 작성된 글을 쭉 내려보았다. 그러다 중간의 어느 글에서 스크롤을 멈추었다. 낯익은 단어가 마치 마력처럼 내 눈길을 끌어당겼다.

  ‘TO: 전두, 전신 탈모인들께.’ 라는 제목이었다. 제목을 클릭한 나는 청명과 함께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FROM: 원형 탈모증 지지 모임에서

  장소: 서울역 인근 XX식당

  일시: 20xx년 12월 26일

  연락: 010-xxxx-xxxx

  대상자: 중증 원형 탈모증 환우

  그동안 많이 힘드셨죠? 오랜 세월 동안 전두, 전신 탈모증을 인내하면서 수많은 애환과 질곡을 겪었을 겁니다. 우주를 떠도는 공허한 미립자인 양 외로웠을 겁니다. 치료를 받아도 머리카락이 나지 않거나, 설령 자랐더라도 약을 끊으니 다시 빠졌을 겁니다. 피부과부터 한의원을 거쳐 해괴한 민간요법들까지... 발모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셨겠죠. 아마 지독히도 불편한 가발을 눌러쓰고 말 못할 비밀을 꽁꽁 숨겨두고 사셨겠죠.

  탈모처럼 부정적인 표징을 지닌 인간은 움츠러들게 되죠. 한없이 옴츠러들던 인간은, 종내에는 눈에 띄지 않는 티끌이 되죠. 한 인간을 파손시킬 정도로 매서운 돌팔매질이 날아오니까요. 그래서인지 전신 탈모증처럼 치명적인 표징을 지닌 사람이라면 으레 숨어살게 마련이죠. 비록 전국에는 2만 명 남짓한 전두, 전신 탈모인들이 있다고 하지만 저 역시 실제로 그들을 마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전국의 모든 전두, 전신 탈모인들이 참석해 주시길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원형 탈모증 지지 모임이라... 거기 나간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 머리카락을 나게 해준다면 지옥이라도 가겠지만... 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인터넷을 종료했다.

  불을 끄고 나서 청명과 나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11월 말이다 보니 원룸에는 슬슬 한기가 들이차고 있었다. 이불을 덮은 몸은 따뜻했지만 어느 것에도 덮이지 않은 머리는 추웠다. 벽 쪽의 나는 몸을 돌려 왼편에 누운 청명의 머리를 어루만져 보았다. 둥그스름한 감촉이 손바닥 가득 전해졌다. 청명의 두상은 촉감뿐만 아니라 외관도 훌륭했다. 이마에서 전두부로 올라갈 때와 두정부에서 후두부 방향으로 내려오는 윤곽이 둥그스름한 덕분에 머리 모양이 대형 구슬을 연상시켰다.

 “청명아, 머리는 안 추워?”

  고개를 가로저으며 청명이 말했다.

 “추워. 우리 비니 쓰고 자자.”

  나는 침대를 빠져나와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옷장으로 갔다. 총 12개의 비니 중에서 나는 여름용 비니를 2개 꺼냈다. 겨울용 비니를 쓰고 자면 너무 갑갑하기 때문에 방에서 잠잘 때는 여름용 비니면 충분했다. 우리는 나란히 비니를 착용했다.

 “따뜻하다.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아.”

  더없이 행복한 음색으로 청명이 말했다. 정말 그랬다. 비니를 착용하자 머리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이 느껴졌다. 머리가 따뜻해지자 몸도 느긋해졌다. 그리고 옆에서는 심장을 평온하게 만드는 보드라운 냄새가 흘러왔다. 청명에게서 풍기는 고유한 체취였다. 초원의 양떼처럼 몽글몽글한 청명은 어느덧 나긋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꺼풀도 조개껍질처럼 닫혔다.

 

 11. 남성형 탈모증(androgenetic alopecia)

 “Que torpe distraccion Y que dulce sensacion.”

 (황홀하고 달콤한 느낌이었어.)

  샤키라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벌침처럼 고막을 찔렀다. 얼굴을 찌푸리면서 나는 머리맡의 모닝콜을 끄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는 얼굴과 머리를 씻고 옷을 입었다. 다음은 가발을 쓸 차례였다.

  가발을 젖힌 뒤에 전두부에 씌우려고 할 때였다. 작지만 불길한 소리가 귓가를 생생하게 스쳐갔고 나는 즉시 가발 착용을 중단했다. 소리의 정체는 역시나였다. 전두부의 가발 스킨이 찢겨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미세하게 찢어진 상태라 자그마한 밴드 두 개로 치료할 수 있었다.

  내 원룸이었지만 1, 2교시 강의가 없는 청명은 따뜻한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있었다. 순간 가발을 내동댕이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대뇌의 충동조절중추가 억제했다.

 “잘 가. 지현아.”

  침대에 누워 있는 청명은 눈웃음을 지으며 얄궂은 어조로 말했고 나는 찌뿌드드한 몸을 질질 끌고 원룸을 나섰다.

  1교시 강의실은 이른 새벽의 백사장처럼 어둡고 한적했다. 전염병처럼 확산된 수면욕 때문이었다. 교과서의 글씨만큼이나 깨알 같은 노교수의 목소리에 강의실은 집단적으로 고개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무망중에 나는 노교수를 서간하고 있었다. 석 삼자의 진한 주름살을 이마에 새겨 넣은 노교수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교과서를 음독하고 있었다. 교과서를 읽느라 고개를 숙인 노교수의 텅 빈 이마, 옆머리, 정수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노교수의 머리털은 그야말로 희박했다. 이따금씩 화이트보드에 판서를 할 때는 유일하게 머리털이 남은 후두부가 드러났는데, 채 1만 5천 개가 안 될 것 같았다. 누군가 독약이라도 쏟아 부은 듯 85퍼센트가 넘는 두피가 머리털이 자랄 수 없는 황폐한 땅이었고, 머리털이 나는 곳은 남성호르몬에 대한 감수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후두부뿐이었다.

  지금은 1만 5천 개도 안 되는 머리카락만이 버티고 있는 저 머리도, 그러나 한때는 파릇파릇한 머리카락으로 울창한 수풀을 이루었을 것이다. 강의를 하는 노교수가 지금의 나처럼 강의를 듣고 있었을 23살 때에는, 주위의 다른 애들처럼 새까만 머리를 가졌을 터이다. 그러자 이른 새벽 백사장에 밀려드는 고독한 파도 같은 감정이 나를 자빠뜨렸다. 무망중에 노교수를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나의 영혼을 실은 배는 씁쓸한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자멸한 나의 영혼은 그해 여름으로 휩쓸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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