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형 탈모증(alopecia areata)
50원짜리 동전 하나가 모든 걸 집어삼키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의 어느 날이었다. 매양 그랬듯이 그날 아침 나는 머리를 감고 있었다. 샤워기의 미지근한 물로 머리를 적시고 나서 샴푸를 묻히던 중이었다.
그 무렵 나는 시험을 2주 남겨두고 있었다. 10월 중순이었지만 고등학교 지원을 앞둔 중학교 3학년 2학기다보니 1, 2학년 때보다 조금 일찍 기말고사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시험을 준비하느라 나는 어젯밤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머리를 감으며 느낀 피로는 그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잠을 좀 덜 잤을 때의 약간 피곤한, 대수롭지 않은 부류의 피로였다. 그 얼마간의 피곤함을 제외한다면 아침에 일어나 머리 감고 밥 먹고 교복 입고 등교하는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려 하고 있었다.
아니었다. 그날은 좀 달랐다. 전두부(머리의 앞부분)부터 시작하여 측두부(머리의 양쪽 옆면 부분)와 두정부(정수리 부근)를 거쳐 후두부(머리의 뒷부분)에 샴푸를 묻히고 있던 나는 뭔가 낯선 감촉을 느끼게 되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두피의 촉감이 다소 이질적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익숙지 않은 감촉이었다. 머릿속에선 찜찜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났고 나는 우선 머리감는 걸 중단했다. 사태를 점검하기 위해 나는 샴푸가 묻은 손으로 앞머리를 들어올렸다. 곧바로, 나는 예사롭지 않은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흰 거품이 뒤섞인 시커먼 머리카락들이 대야에 축 늘어져 있었다. 어림잡아 100올은 될 것 같았고 나는 서늘한 충격을 받았다. 생전 유례없던 일이었다. 가슴 언저리에서 섬뜩한 기운을 느끼며 나는 시체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난생 처음 맞닥뜨린 광경에 나는 하릴없이 머리카락만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건 양동이의 물 넘치는 소리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는 샤워기를 잠갔고, 본능적으로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당연히 두피를 만져봐야 할 터였다. 나는 왼손 손가락 끝을 나란히 붙여서 두피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귀 뒷부분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후두부 방향으로 나아갔다. 뒤통수 중앙에서 살짝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 다다랐을 때, 나는 방금 전 그 기이한 감촉을 다시 맞볼 수 있었다. 한 치의 빈틈없이 기다란 머리카락이 솟아나야 할 울창한 수풀의 뿌리 부분이 텅하니 비어 있었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 버린 듯 그 자리에선 미끌미끌한 두피가 매만져졌다. 나는 잠시 동안 그 부분을 더듬어보았다. 제법 넓었다. 머리카락이 빠져 매끈해진 부위는 둥근 원을 이뤘는데, 50원짜리 동전 크기는 될 듯했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그러니까 학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머리 때문에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허겁지겁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아침 일찍 일하러 간 부모님이 차려놓은 아침밥을 뒤로 하고 나는 교복을 입고 가방을 매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시험기간의 압박감과 피로감 따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증발한 뒤였다. 대신에 8할의 찜찜함과 2할의 불안함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교실에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밝고 경쾌한 다장조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험 기간이었지만 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대화의 주요 화제는 역시 고등학교 진학이었다. 욕을 섞어가며 게임 이야기, 축구 이야기만 하던 남자애들도, 시답잖은 일들로 조잘거리던 여자애들도 코앞에 놓인 삶의 작은 갈림길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 친한 애들 몇몇과 같은 주제로 적당히 떠들면서 깔깔거렸다. 싱그러운 웃음소리에 뒤통수의 50원은 서서히 잊혀 갔고 이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성스러운 새벽 여명이 밤의 흔적을 몰아내듯 뒤통수의 은밀한 일은 의식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 찜찜하고 불편한 문제를 직면하는 데는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아침에 머리를 감던 나는 심상치 않은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위협적이었다. 물을 버리기 전에 흘끗 바라본 대야의 모습은 심중에 미세한 균열이 생길 만큼 자극적이었다. 화장실 바닥과 대야에는 시커먼 머리카락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양이 좀 더 증가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왼손의 손가락 끝을 모아 머리카락이 빠진 부위를 더듬거렸다. 손가락 끝의 기민한 감각으로 한참 동안 쓰다듬어 보았다. 심상치 않았다. 분명 뭔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50원만 하던 병변이 며칠 사이에 좀 더 넓어져 있었다. 둥그스름한 병변의 직경은 검지 손톱의 두 배가량이었고, 따라서 거의 100원짜리 동전만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래도록 맨들맨들한 병변을 더듬던 나는 갑갑함을 느꼈다. 촉감과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었다. 간접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화장실을 나온 나는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내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거울이 있었다. 왼손으로 뒤통수 머리채를 들어 올린 채 나는 안방 거울에 내 손거울을 비춰가며 한 군데씩 세심하게 확인해 보았다. 쪼그려 앉은 자세로 손거울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나는 100원짜리 동전을 수색해 보았다. 몇 번이고 각도를 조정한 뒤에야 비로소 머리카락이 빠진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불이 켜지지 않은 침침한 방 안에서 나는 그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새까만 머릿속의 하얀 병변을, 나는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날 나는 미로에 갇힌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학교 수업시간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나는 딴 생각만 해대고 있었다. 수업을 하는 수학 선생님의 머리만 한 시간을 쳐다보았다. 이마가 전구처럼 훤했고 정수리에서도 어렴풋이 두피가 비치고 있었다. 남성형 탈모증 같았다. ‘저 탈모는 안 난다던데 나도 안 나면 어쩌지, 탈모는 어느 병원에 가야 하지, 내과 아니면 외과?’ 근심의 늪에 빠져 나는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마음을 가다듬을수록 더욱더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었다. 늪에서 빠져나오려 머리를 휘저어댈수록 도리어 심연의 밑바닥으로 추락하였다. 심해로 가라앉는 난파선처럼 나는 영락없이 무너졌다.
그날 6교시는 10교시처럼 길었다. 적막한 마음으로 6교시를 버텨낸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부터 켰다. 느릿느릿한 컴퓨터는 바탕화면에서 한참을 헤맸고 나는 뜨거운 찌개처럼 부글부글했다. 결국 나는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는 과정을 거쳐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검색창에다 '탈모'라고 검색해 보니,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가 펼쳐졌다. 분리수거되지 않은 갖가지 정보들이 담쟁이 넝쿨처럼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탈모 관련 기사와 블로그부터 시작해서 샴푸 이용 후기와 머리카락이 100퍼센트 날 수 있다는 광고를 접하기도 했다. 영양분 이야기, 머리카락 수, 모발이식, 두피의 열, 샴푸, 효소, 비타민, 피부과, 성형외과, 한의원, 두피 마사지, 줄기세포... 1시간째 인터넷을 뒤졌지만 나는 어떠한 수확도 거두지 못했다. 인터넷을 뒤지면 뒤질수록 머릿속은 밤하늘처럼 깜깜해질 뿐이었다. 결국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인터넷을 종료한 나는 일단 시험이 끝나는 일주일 뒤로 모든 걸 미루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