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털은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는 몸과 분리된 털을 보면 불편함을 느낀다. -카산드라 홀든(Cassandra Holden, 털 예술가) (출처-1)
1. 탈모(alopecia)
“머리카락을 합하면 모두 몇 개나 될까요?”
머리카락이 결여된 사람의 입장에선 지극히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벌에라도 쏘인 듯 가슴이 뜨끔했다.
“머리카락의 수는 인종별로 차이가 있어요.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이, 황인보다는 백인이 더 많은 모발을 가지고 있죠. 한국인의 경우 10만 개 정도 되는데, 생각보다 많죠?”
검은 정장 차림의 피부과 교수는 다시 강의실 계단을 내려왔다. 교탁으로 돌아온 피부과 교수의 백발에서는 검은 머리칼이 드문드문 엿보였다.
“탈모(alopecia)는 머리나 몸에 있는 털이 빠지는 것을 말해요. 하루에 50~100개가량의 머리카락은 정상적으로도 빠질 수 있는데, 이는 머리카락이 주기적으로 돋아나고 자라고 빠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머리카락이 하루에 100개 넘게 빠진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병적인 탈모를 의심해 봐야 해요.”
파워포인트가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강의실 앞쪽 중앙에 놓인 스크린에선 남성형 탈모증 환자들의 사진이 나타났다. 이마와 정수리가 훤한 남자들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수많은 남자들이 남성형 탈모증으로 고통받고 있죠. 발병률은 서양에선 절반 남짓, 한국 남성의 경우 다섯 명당 한 명 정도에요."
남성형 탈모증에 대한 설명을 마친 피부과 교수는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탈모 강의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피부과 교수는 여성형 탈모증, 휴지기 탈모증, 머리 백선, 발모벽, 무모증 등 각종 모발 질환에 대해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내 눈앞은 안개라도 들이찬 듯 서서히 흐릿해지고 있었다.
스크린의 화면이 다시 한 번 뒤바뀌었다. 그 순간 심장의 리듬이 엇박자로 어긋났고, 조개껍질처럼 닫히려던 눈꺼풀도 중력을 거스르고 번쩍 일어섰다. 이번 주제는, 바로... 원형 탈모증이었다.
“원형 탈모증(alopecia areata)은 전생애 위험도가 2퍼센트에요. 인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100명 중에서 2명은 죽기 전에 원형 탈모증을 경험한다는 말이에요. 원형 탈모증은 20세 이전에 절반가량이 발생하는데, 여러분들이 총 100명이죠? 통계적으로 본다면, 이 중에서 한 명 정도는 이미 원형 탈모증을 앓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지막 한 마디는 화살처럼 날아와 내 심장 한복판에 명중했다. 심장의 실핏줄이 가늘게 찢어지는 듯 가슴이 뜨끔했다. 온 몸의 혈관이 바짝 말라들기 시작했고,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원형 탈모증은 흔히 스트레스성 탈모라고 알고 있죠? 그러나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분명 유전적 소인도, 환경적 요인도 얼마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되지만,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설이에요. 탈모 병변을 면역형광 현미경으로 관찰했을 때 모낭을 침투한 면역세포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하이에나에 쫓기는 임팔라처럼 심장고동이 조급해졌고, 얼굴은 대춧빛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머리와 가발 사이의 절묘한 틈에는 어느새 뜨거운 습기가 맺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심근경색, 에이즈, 흑사병에 대해 배울 때도 이처럼 떨리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원형 탈모증은 치료를 받으면, 심지어 그냥 놔두어도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나요. 하지만 원형 탈모증은 예측 불가능한 질병이에요. 이따금씩,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머리카락 10만 개가 모두 빠져 버리는 전두 탈모증(alopecia totalis)으로 악화하기도 하거든요. 사진을 좀 보여 줄게요.”
화면에 나타난 건, 사람 뒤통수였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뒤통수 사진이었다. 마치 머리카락 전체를 마우스로 드래그한 다음 삭제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단 한 올도 없는 바람에 성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2. 가발(wig)
원룸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았다. 곧바로 나는 뒤통수에 양 엄지손가락을 갖다 댔다. 조심스럽게, 지극히 조심스럽게 나는 가발을 벗었다. 벗은 가발은 책상 모서리에 놓인 가발 거치대에 씌웠다. 사람 머리를 본뜬 스티로폼 재질의 모형을 원기둥 형태의 지지대가 받치고 있는 구조물이었다.
“후우.” 바람 새는 풍선인 양 무기력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나는 힘없이 외투를 벗어 옷장에 건다. 목과 어깨와 허리를 돌리며 결림을 해소한다.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몇 분 동안 지속되더니 이내 사그라진다. 청바지를 잠옷 바지로 갈아입은 나는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침대 위로 엎어진다.
공연히 휴대폰만 뒤적거리던 나는 세수를 하기 위해 일어서려 했다. 그러다 불현듯이 며칠 전의 약속이 떠올랐다. 청명과 오페라를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구두로 한 약속이다 보니 약속 시간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청명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청명에게 카톡을 발신한 다음 나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얼굴과 머리를 씻으려 했다. 그러던 중에 거울속의 살색 물체가 동공에 담기었다. 달걀 같은 민머리에 이목구비만이 새겨진 불완전한 얼굴이었다.
거울에 갇힌 내 모습은 자석의 반대극처럼 내 눈길을 끌어당겼다. 시선은 상호적이었다. 거울 맞은편에선 양서류같이 매끈한 외관의 낯익은 괴물이 거울 밖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밖의 나는 이제 거울 속의 내가 익숙하다. 도리어 과거의 내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가슴께까지 찰랑거리던 머리채를 보유했던 내가... 나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거울 속의 나를 촬영한 눈은 시신경을 거쳐 뇌의 후두엽으로 사진을 발송했다. 후두엽을 경유한 이미지는 정밀한 신경회로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해마에 도착했다. 머릿속 박물관 해마에서는 7년 전의 그날을 뒤적거렸다. 7년 전이지만 수백 번도 넘게 들쑤신 터라 기억은 하얀 천으로 닦은 유리구슬처럼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