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앗!"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기계장치 소리와 푸쉬익하는 연기 방출음이 절로 듣는 이를 긴장하게 했고 실물처럼 생긴 각종 소품들이 곳곳에서 기괴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꺄악!"
한차례 비명을 내지른 나현이 곧바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뭔가 잘못 건드린건지 그녀의 사방에서 허연 연기가 거세게 분사됐고 이내 연기를 가르고 헤쳐나온 명희가 애써 나현을 진정시켰다.
"얀마 진정해! 고작 연기 좀 나오는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
"흐윽..그치만 저 이런 건 원래도 쥐약이란 말이에요.기껏 참고 들어온 거였는데…."
아예 다리가 풀려버린듯 울먹이던 나현이 명희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참나..잡아줄테니까 얼른 일어나.우리 근육오빠도 냅다 날려버리는 애가 그러면 내가 뭐냐?"
"훌쩍..그치만 귀신은 잡을수도 없고 때릴 수도 없잖아요.제가 암만 힘쎄면 뭐해요.."
"아이고..귀신은 무슨.애초에 다 기계장치라고.못 믿겠으면 수아랑 부반장 좀 봐라.얼마나 의젓하냐?"
곧바로 이마를 짚은 명희가 턱 끝으로 뒤편의 수아와 유리를 가리켰다.
바짝 긴장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적응한건지 수아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용캐 잘 버티고 있었고 유리는..어찌된 영문인지 안색이 제법 파리하게 변해있었다.
"어..어이.부반장.너 괜찮은거냐? 왜 그렇게 얼굴이 헬쓱해졌어?"
"제..제가 뭘요? 괜히 자기가 무서우니까 지금 생트집 잡는 건가요?!"
"무섭긴 누가! 걱정해줘도 지랄이네.너 지금 낯빛이 어떤지 알아? 완전 백짓장이라고."
곧바로 반박하는 명희에게 유리는 콧방귀를 흥 뀌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의 이마엔 약간의 식은땀도 흐르고 있었고 짐짓 이를 눈치챈 명희는 짐짓 조소를 지으며 유리에게 말을 이어갔다.
"흐음..뻐기는 것 치고는 상태가 영 설득력이 없는데? 솔직히 말해봐.너 지금 무섭지?"
"저..전혀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여태껏 아무 말도 안하고 걷기만 했잖아요!"
"하아..그럼 미행중인데 시끄럽게 떠들면서 가냐? 이거 무서워서 상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거 아냐?"
"시끄러워요! 어..얼른 태성 씨랑 회장님이나 마저 따라가죠."
앙칼지게 반박한 유리가 호기롭게 명희와 나현을 제치고 앞장을 섰다.
이미 태성과 청호는 저만치 앞서간듯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미로처럼 비비꼬인 내부 구조 탓에 따라잡기조차 결코 쉽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이 사귀는 꼴만은 막아야 해! 확실히 조금 소름돋지만 이 정도 쯤은..!'
속으로 중얼대던 유리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은 채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태성과 청호를 따라잡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명희가 나현을 다독여주며 했던 말이 어느정도 공포를 이겨내게끔 도와주었다.
'그래.검귀 양 말대로 이건 단지 정교하게 꾸며진 기계장치일 뿐이야.전혀 무서워하고 말고 할고도 없다고!'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댄 유리는 이내 비교적 넓은 홀 같은 장소에 다다랐다.
뒤통수가 어째 서늘하긴 했지만 그런 걸 신경쓸 생각도 없었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시야에 착 달라붙어있는 태성과 청호의 모습이 포착됐다.
"흠.여기가 슬슬 마지막 코스인 모양인데..의외로 별거 없네?"
"그러게요.마지막은 좀 기대할만한게 있을 줄 알았는데..관 하나 빼고는 아무 것도 없네요."
"그러게..그보다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꺼야? 슬슬 팔에 쥐난다고."
"어머.우리 아직 데.이.트 중이잖아요?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바짝 붙어있는게 당연하잖아요?"
능글맞게 미소짓는 청호에게 태성은 혀를 차며 미간을 찡그렸다.
지켜보는 유리 역시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고 곧 두 사람이 등을 돌리자 홀 중앙에 놓여있던 관에서 돌연 푸쉭하며 연기가 새어나왔다.
"어랍쇼? 뭐야 이건? 뜬금없이 왠 연기?"
- 후하하핫! 여기까지 잘 왔구나! 하지만 너희들의 여정은 여기서 마지막이다! 최후의 만찬을 시작하겠다!!
일순간 뿜어져나오는 연기 사이로 걸걸한 남자의 음성이 빠르게 터져나왔다.
음성이 끊김과 동시에 두 사람의 사방에서 시뻘건 빛과 연기가 터져나왔고 짐짓 이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유리의 목덜미로 뜨끈한 공기가 느껴졌다.
"끙..뭐에요?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하라구요.지금 한참 중요한 순간이라구요."
짐짓 나현과 다른 여자애들일 거라 생각한 유리가 퉁명스레 한마디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여전히 뜨끈한 공기만이 그녀의 뒤에서 계속 느껴졌다.
"아, 정말! 짜증나니까 그만하세요 좀! 여기서 통째로 얼려드릴..?!"
계속해서 느껴지는 숨결에 유리의 짜증이 폭발했다.
곧바로 고개를 홱 돌린 유리는 일순간 그 자리에서 덜컥 멈추었고 이내 그녀의 뒤에 서있던 끔찍한 형상의 사내가 서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끄우에에엑!!!"
남자의 괴성(?) 한방에 홀 사방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남녀 좀비들이 우르르 홀로 뛰쳐나왔다.
이미 면전에서 얼굴이 마주친 유리는 순식간에 얼굴에 핏기가 싹 빠지더니 그대로 뒤로 무너졌고 이를 알리가 없던 태성은 일제히 자신에게로 몰려나온 좀비들을 향해 씨익 조소를 지었다.
"호오..과연.이런 식의 연출이란 말이지? 제법 괜찮았다.그럼 답례로 나도 선물 하나 남겨줄까?!"
"어라? 태성 씨 지금 뭐하시려는..?"
"눈 감고 귀나 막아 회장님!"
순간 품속에서 뭔가 집어든 태성이 핀을 뽑아 냅다 바닥에 내던졌다.
- 삐익!!!!!
고장난 스피커에서나 나올법한 요란한 소음과 섬광이 일순간 홀 전체를 뒤덮었다.
난데없는 섬광에 좀비들, 아니 좀비 분장을 하고있던 알바생과 직원들이 비명을 질렀고 그 틈을 타 태성은 청호의 손을 붙잡고 출구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바..방금 그거 혹시 섬광탄 아닌가요?"
"잘 아네.원래 외부에서 사용하면 불법이지만 까짓 거 내빼면 지들이 뭘 어쩔꺼야!"
"그보다 그런 걸 매일 가지고 다니는 거에요?!"
급히 되묻는 청호에게 태성은 씨익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앞으로 내뻗었다.
검은색 비닐 휘장이 쳐진 통로 위로 EXIT라는 네 글자가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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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의 섬광탄 소동 이후 유리는 뒤늦게 홀로 도착한 나현,명희,수아에게 구조되었다.
아예 의식을 잃고 혼절해버린 유리는 30분 뒤에야 겨우 정신을 되찾았고 이에 무릎배게를 해주던 나현이 곧바로 유리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아, 언니.정신이 좀 들어요? 저 누군지 알아보시겠죠?"
"끙..대..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가요? 어째서 제가 이런 벤치 위에 누워있는..?"
"홀 중앙의 판넬 벽 뒤에 쓰러져 있었다구요.정말..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주변엔 좀비 분장한 사람들이 죄다 쓰러져있질 않나.완전 난리였다구요."
나현의 대꾸에 유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좀비 분장한 직원과 아이컨텍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다시 회상해봐도 소름이 쫙 돋는지 유리의 얼굴에서 또다시 핏기가 싹 가셨고 이내 그녀의 우측에 앉아있던 명희가 피식 웃으며 핀잔을 내뱉었다.
"참나..꼴에 안 무서운 척은 혼자 다 떨더니 아주 기절을 해버리냐? 그러게 왜 허세를 떨고 그러냐? 무서우면 무섭다고 솔직히 말을 하지."
"큭.이..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구요! 저도 전혀 예측못한 데서 튀어나온데다 전 분명히 검귀 씨나 나현 양인줄로만 알았다구요!"
"네네..어련하겠어요.아무튼 그쪽이 기절해버리는 동안 반장이랑 회장님은 완전히 놓쳐버렸다고.일단 수아더러 따로 미행하라고 시켜두긴 했지만…."
"그..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당신이랑 나현 양도 얼른 둘을 마저 추격했어야죠!"
이마를 붙잡고 일어선 유리가 이내 삐끗하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급히 나현이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세웠고 이에 짐짓 혀를 찬 명희가 유리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피식 조소지었다.
"으이구..쓸데없이 오기부리지 말고 일단 몸 좀 추스르라고.어차피 그쪽 집안 사람들도 깔아놨다면서 뭐 그렇게 필사적이야?"
"그야 그렇지만..직접 보지않으면 전혀 안심이 안된다구요! 당신이나 나현 양도 다들 그렇지 않아요?"
"암만 그래도 정도라는게 있는거야.게다가 나현이가 해준 말대로라면 어차피 둘이 가짜로 데이트하는 거라면서? 그럼 진짜로 사귈 확률도 엄청 낮을 꺼 아냐."
나름 일리있는 명희의 반박에 유리는 잠시 끙하며 신음성을 토했다.
확실히 맨 처음 나현이 알려준 내용을 토대로 한다면 애초에 청호는 태성과 사귀려한다기보다는 그를 이용해 골치아픈 상황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굳이 미행을 계획한 것도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를 염려해서이지 원래라면 미행을 할 필요도 없는 그저 그러려니 넘길 수 있는 헤프닝이었다.
'그치만..왠지 계속 불쾌했단 말이에요.태성 씨가 잘 모르는 다른 여성 분, 그것도 회장님이나 되는 분과 둘이서만 어울린다는게….'
속으로 중얼거린 유리는 짐짓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명희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서있던 명희는 잠시 고민하는듯 검지로 제 이마를 톡톡 두들기더니 문득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말이야..어차피 둘이 놀이기구를 다 이용해도 고백이 실패하면 말짱 황이잖아?"
"그..그건 무슨 소리에요 언니?"
"아니.잘 생각해봐 둘다.애초에 놀이기구를 다 이용하게 되면 영원히 맺어진다는 거부터가 이상하잖아? 애초에 둘이 서로 좋아해야한다는 전제 조건도 붙어있는데 말이지."
"음..그러고보니 그렇네요? 잠깐.그럼 태성 오빠랑 회장님은 애초에 전제 조건부터 해당안되니까 둘이 사귀게 되려면..?"
이어지는 나현의 반문에 명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어느 쪽이든 먼저 고백을 해야된다는거지.즉, 놀이기구를 전부 타는 게 중요한게 아냐.중요한건 어디까지나 고백을 할지 안 할지,그리고 한다고 해도 성사될지 어떨지야."
"자..잠깐만요.그럼 지금 우리가 진짜로 해야되는건..설마?"
"그래.둘이 분위기가 절정으로 무르익었을때.그리고 회장이나 반장 둘 중 한명이 작정하고 고백하는 것만 막으면 되는거야!"
나름 명쾌한 명희의 논리에 나현과 유리는 곧바로 뭔가 깨달은듯 동공을 크게 확장했다.
"대강 팜플렛 좀 보고 유추해봤는데..이 공원에서 고백하기에 딱 좋은 장소는 단 한군데 밖에 없어.만약 반장이든 회장님이든 둘 중 누군가 고백을 할 생각이라면 분명 거기로 가게 될꺼야."
"거..거기가 대체 어딘데요?"
"..로즈 아치 파크.통칭 '장미 공원'으로 불리는 장소에요.프로포즈나 고백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적의 공간으로 조성했고 성공률은..거의 90% 이상이라 하더군요."
대뜸 설명을 대신하는 유리의 말에 곧바로 나현은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장면을 떠올렸다.
명희도 대충 상상을 해본건지 슬쩍 미간을 찡그렸고 이내 나현과 유리를 빤히 바라보던 명희가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입을 열었다.
"..둘다 가까이 와봐.지금부터 플랜 B를 개시하도록 한다.각자 뭘해야 되는지 알려줄테니까 똑똑히 기억해둬.알아들었지?"
"대..대체 뭘 시킬 작정이에요? 괜히 이상한 짓이라도 시키는 거면 절대 안 할꺼에요!"
"흐음..그럼 이대로 반장이랑 회장이 커플맺는 꼴을 두고볼꺼야? 뭐 그럼 그렇게 해.대신 앞으로 반장은 내가 독점해버릴테니까 그런 줄 알라고?"
"누..누구 맘대로 그런..! 큭.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피식 조소지은 명희가 곧바로 유리와 나현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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