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격전 끝에 편지쟁탈전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4반에서 약탈한 1등상 덕분에 태성의 반은 하루동안 섬 남쪽에 있는 해수욕장을 마음대로 이용할수 있게 되었고 여기에 유사범과 수아가 추가로 획득한 2등 상품 '종합 바베큐 세트' 덕분에 잔뜩 굶주린 배를 채우게 되었다.
- 치익.
시뻘겋게 달궈진 석쇠 위에서 갖가지 고기 부위들이 지글지글 익어갔다.
진작부터 석쇠 앞에 진을 치고 서있던 나현이 게걸스럽게 침을 흘리며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렸고 이내 나현의 옆에 서있던 원중이 황홀한 얼굴로 슬쩍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으~ 냄새 쥑인다..이런 열대의 무인도에서 설마 즉석 바베큐라니.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뭣하면 진짜로 죽여줄까? 마침 앞에 달군 석쇠도 있겠다.그러고보니 원숭이 뇌골 요리가 어느 나라에선 별미랬는데…."
즉시 태클을 거는 태성의 말에 원중은 흠칫 놀랐다가 애써 못들은 척 웃어넘겼다.
"흐힛! 새끼 여전히 까칠하긴.아무튼 니 덕에 이렇게 바베큐도 먹게 됐고 내일은 다른 반 애들 레크리할 동안 비치에서 해수욕이라고! 전부 니 덕이다 친구야!"
"누가 니 친구냐 새꺄.그건 그렇고 부반장은 어디갔길래 안 보여?"
"글쎄다? 한 장도 못 찾은 주제에 염치없게 얻어먹긴 싫다고 그러던데?"
"그래? 그럼 넌 염치가 없어서 얻어먹으러 왔다는 소리구나?"
"여..염치없긴 누가! 너 정도는 아니라도 나도 모기 물려가면서 무진장 고생했거든?! 물린 자국 보여줄까?!"
결국 버럭하는 원중의 항변을 태성은 싸늘하게 무시했다.
두 사람이 잡담하는 사이 어느새 석쇠 위의 고기는 노르스름한 색을 띄며 맛있게 익었고 그 순간 나현의 젓가락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거의 반 이상의 고기들을 접시로 쓸어갔다.
"야 이 짜식아! 너만 처먹냐?! 다른 사람 먹을 거도 남겨놔야 될거 아냐?!"
젓가락만큼이나 빠른 태성의 꿀밤이 나현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우엥?! 그..그치만 저 오늘 무진장 힘써서 배고픈데…."
"하핫.놔둬 반장.나현이는 그럴 자격 있으니까.그보다도 내일 말인데..다들 어떻게 할거야?"
"아, 그..그러고보니 그렇네요.해수욕장에서 하루종일 놀아도 되는데..어떻게 하실 거에요?"
문득 입을 여는 명희와 수아의 질문에 태성은 잠시 팔짱을 끼며 고민에 잠겼다.
"글쎄다..애초에 난 딱히 해수욕같은 건 흥미없거든.파라솔 아래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잔다면 또 모를까…."
"에이~암만 그래도 그건 아니지.무려 전세 낸 해수욕장이잖아! 일생에 한번 올까말까한 기회라고?"
"우물우물..맞아요! 안 그래도 맨날 학교에서도 잠만 자는데..가끔은 몸 좀 움직여야 된다구요!"
"맨날 입에 뭘 달고 사는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아주 틀린 말은 또 아니잖아? 즐길 수 있을 땐 실컷 즐겨둬야 되는거야 동생."
"맞아맞아! 넌 좀 움직여야돼 짜샤."
"충고에 귀기울이는 것도 지도자의 소양이네 도령.한번 가보는게 어떻겠나?"
나현에 이어 명호,원중,유사범마저 권유하자 태성은 점점 미간이 구부러지며 짜증돋친 얼굴이 되었다.
'귀찮아 죽겠네 진짜.여차하면 죄다 내 멱살잡고 끌고 갈 기세인데….'
짐짓 뒤통수를 긁던 태성은 집요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이 승낙하자 나현과 명희는 동시에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나눴고 이를 미소지으며 지켜보던 명호가 접시 위에 고기를 올리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날이 밝는대로 바로 출발하자고.부반장한테는 반장이 대신 좀 얘기해줘.알아들었지?"
"쳇.알았수다.그렇게 하자고.이제 됐지?"
"히힛.진작에 그렇게 나와야지.자, 그럼 마저들 고기 구워먹자고! 아직도 잔뜩 남아있으니까!"
활기차게 대꾸하는 원중의 외침에 모두는 그제서야 고기를 집어올리기 시작했다.
대충 몇점만 집어먹은 태성은 대강 식사가 마무리되가자 슬며시 자리에서 빠져나왔고 이후 곧장 유리를 찾기 위해 여학생들의 텐트로 걸어갔다.
"어이~부반장.안에 있냐? 설마 벌써 자는 건 아니겠지?"
곧바로 텐트 안을 살펴보았지만 애석하게도 텐트 안에는 다른 여학생들 몇명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잠시 궁금증이 돋은 태성은 수소문 끝에 유리가 근처의 호숫가로 나갔다는 제보(?)를 얻어냈고 곧 인근의 호수로 발걸음을 돌린 태성의 눈에 쪼그리고 앉아 수면을 바라보는 유리의 뒷모습이 슬쩍 보여왔다.
"밥도 안 먹고 어디로 갔나 했더니만..이런 데에 있었냐? 거기서 뭐해?"
"이..임태성?! 당신이 여길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긴.물어봐서 알았지.것보다도 왜 그렇게 청승맞게 앉아있어? 뭐 죄졌냐?"
"그..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머리식히러 잠깐 나온 것 뿐이라구요!"
급히 변명을 내뱉는 유리에게 태성은 슬쩍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럽지만 내일은 하루종일 남쪽의 해변에 단체로 놀러가기로 했어.가든 말든 그건 니가 알아서 결정하고 혹시 갈 생각이라면 오늘 밤은 일찍 자둬라."
"해..해변에 간다구요? 그치만 저흰 수영복도 한벌 안 가져왔는데…."
"걱정 마.수영복 대여점이 있다고 들었거든.점원이 있는 지 없는 지는 모르겠다만 보나마나 무인시설이겠지.내 맘에 드는 게 있을지는 또 모르겠다만."
"그렇군요..잠깐.그럼 혹시 당신도 내일 해변에 가는 건가요?"
"뭐 그렇지.다른 인간들이 안가면 날 보쌈해서라도 데려갈 기세여서 말이지."
"그..그럴수가.다른 사람들도 전부 다 같이 가는 거겠죠?"
"그야 당연하지.애초에 먼저 가자고 난리친게 그 인간들인걸? 난 죽어도 가기 싫었지만 말이야."
심드렁한 태성의 대꾸에 유리는 짐짓 끄응하며 낮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당장 자신도 그다지 해수욕장을 좋아하진 않았고 타인에게 자신의 맨살을 노출한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태성의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고 뭣보다도 그녀는 수영실력이 영 젬병이었다.
'이 이상 창피한 꼴을 보이긴 싫어! 그치만..만약 내가 안 간다면 혼자서 하루종일 캠프에서 지내야할텐데….'
짐짓 생각을 이어나가던 유리는 슬쩍 태성을 흘끔거리며 빤히 쳐다보았다.
단언컨데 태성이 해변에 가게 되면 십중팔구 평소 태성을 함락(?)시키길 원하는 다른 여자애들이 태성에게 추파를 던질 것이 불보듯 뻔했다.
당장 최대의 강적인 나현이는 기본이었고 친화력과 타고난 몸매로 무장한 명희,거기다 어리버리하지만 나름대로 귀여운 매력이 있는 수아마저 있었다.
'만약 내일 내가 불참한 사이에 그 세명 중 누군가가 태성 씨랑 사귀게 된다면..?'
문득 망상을 시작한 유리의 뇌리로 태성이 신원불명의 누군가와 진한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안돼! 죽어도 그것만큼은 인정할수 없어! 결코 내가 질투해서가 아니야! 난 부반장으로써 불순 이성교제를 막고싶은 것 뿐이라고!'
단숨에 생각을 정리한 유리는 어느새 거칠어진 자신의 숨을 진정시켰다.
어딘지 이상한 유리의 행동에 태성은 짐짓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에 슬쩍 태성을 돌아본 유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으흠! 조..좋아요.정 그렇다면 저도 기꺼이 동참하도록 하죠.그 대신 제 부탁을 한가지 들어주시면 고맙겠어요."
"부탁? 뜬금없이 뭔 소리야?"
"이..일단 들어요! 내일 해변에 놀러가면 저한테 수영하는 법을 알려주세요.설마 이제와서 수영할줄 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할줄이야 아는데..너야말로 수영 못했냐? 전혀 안 그렇게 생겨선 맥주병이었냐고."
"시..시끄러워요! 아무튼 내일 당신이 제 수영 강사가 되주지 않으면 전 동참하지 않겠어요.아시겠어요?"
"그래? 그럼 그냥 두고가야지 뭐 별수있나.."
"노..농담이랑 진담은 좀 구별하라구요! 하여튼 여자를 대하는 법을 전혀 모르네요 당신은!"
앙칼지게 대꾸하는 유리에게 태성은 잔뜩 귀찮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데려가지 않아도 딱히 지장은 없겠지만 외면하기엔 유리의 태도가 의외로 끈질겼다.
'뭐 차라리 잘된건가? 수영 가르친다는 핑계로 부반장이랑 같이 있으면 나현이나 명희도 덜 추근댈테고..후딱 가르쳐주면 그뒤부턴 그늘에서 잠도 잘수있을테고.'
나름대로 궁리를 마친 태성은 이내 피식 웃으며 유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부반장도 가끔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구만.크큭.나한테 가르쳐달라고 요청한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지.초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쳐줄테니까.'
어딘지 섬찟하게 크큭거린 태성은 이내 남학생들이 모인 지정 텐트로 돌아갔다.
여전히 호숫가에 서있던 유리는 그런 태성의 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이내 태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유리는 돌연 주먹을 불끈 쥐어올렸다.
'조..좋아! 해냈어! 이걸로 내일은 태성 씨랑 오붓하게 단 둘이서..!'
묘하게 불타기 시작한 유리는 수영 교습 도중에 일어날 헤프닝을 망상하며 서서히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