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저편’ 기자회견이 한창 진행중인 h호텔 다이아몬드홀. 1부 작가와 피디, 주연배우들이 인사말이 끝나가고 2부순서에선 라운드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다. 라운드 인터뷰는 기자들이 빙둘러 앉아있는 테이블마다 주연배우들이 돌아가면서 20분씩 인터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인터뷰전에 서정아의 댄스 무대가 예정되어 있었다. 서정아가 소속된 그룹 알파걸의 신곡 ‘두둠치’댄스를 라이브와 함께 선보일 예정이었다.
“어멋 안녕하세요. 진마리 기자님. 오랜만에 뵈어요”
서정아가 귀은에게 아는척 인사를 했다. 귀은은 당황했지만 짐짓 진마리인 것처럼 행동했다.
“아...네. 서...서정아씨도 여전히 아름답네요”
“어맛, 고마워요. 그런데 옆에 아름다운 이 소녀 분은 누구세요? 넘 귀여웁다”
“도..동생이에요. 배우들 보고싶다길래”
“어맛, 정말요? 그럼 이따가 끝나고 저랑 사진찍어요~”
인사를 끝마친 서정아는 홀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가늘고 긴 몸을 쭉 뻗으며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듯 그녀는 손끝까지 고운 선을 만들며 남자기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슴이 깊이패인 의상을 입은 채 골반을 흔들며 뱅글뱅글 도는 섹시댄스의 끝을 보여주는 그녀.
서정아는 기자들의 테이블을 빙글빙글 돌다가 멈췄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고 기자들은 손바닥이 부르터라 박수를 쳤다. 이 춤 하나로 서정아의 이름이 양욱을 제치고 실시간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도발적이고 화끈한 춤사위는 사진기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자아냈다.
양욱은 냉소를 지었다.
“아주 발악을 하는구먼”
대세 걸그룹 센터이긴 하지만 거물스타 양욱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서정아의 소속사가 생각해낸 고육지책이었다. 섹시댄스로 양욱보다 기사수를 더 많이 올리려는 수였다. 인터뷰내내 무뚝뚝한 양욱 대신 서정아는 생글생글 웃어가며 조리있게 대답을 했다. 물론 전날 소속사가 예상 질문지를 뽑아주고 거기에 맞는 대답을 달달 외우게 했던 덕이었다.
기자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고 극존칭을 써대는 서정아에게 호의적인 기사들이 많이 양산될 터였다.
어느새 기자회견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여기저기 빈 의자에 걸터앉아 마무리 기사를 전송하는 기자들만이 남았다.
배우 서정아는 혜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려는 귀은을 불렀다.
“진기자님”
“아...네. 서정아씨.”
“오늘 저 어땠어요? 대답 너무 못했죠. 아잉, 속상해라”
이 여잔 도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한건가? 귀은은 헷갈렸다. 그래도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낫겠지.
“정말 또박또박 잘하던데요. 속상해 할 필요 없어요”
“다행이다. 저 처음 드라마 출연할때는 입술이 얼어붙은줄 알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아, 그때는 입술이 아니고 주뎅이라고 하셨지.”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서정아는 가시가 느껴지는 대답을 했다.
...주뎅이? 서정아 같은 탑스타한테? 귀은은 다시한번 이 진마리라는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 미칠지경이었다.
“...동생이 너무 예뻐요. 참, 아까 사진찍기로 했잖아요. 얘, 이리와. 언니랑 사진 찍자”
혜나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서정아는 혜나를 끌어 자신의 옆으로 데려갔다. 이어 혜나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철석 붙어 ‘브이’자를 하며 휴대폰 사진기능을 작동시켰다.
덜덜덜덜...
이게 무슨 소리지? 지진이라도 났나? 귀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샹들리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정아는 혜나를 붙잡고 셀카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귀은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서정아가 사진을 다 찍으면 서둘러 혜나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우지끈...
남아있던 기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혜나와 서정아의 머리위로 육중한 샹들리에가 떨어질 듯 떨어질 듯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서정아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한 순간, 간발의 차이로 샹들리에가 홀 중앙으로 곤두박질 쳤다.
“혜나야”
순간 귀은이 소리를 질렀다.
간신히 화를 면한 서정아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진 샹들리에를 쳐다보았다.
“아이는...아이가 여기에, 아이가 깔렸어요! 아이가! 제발 도와줘요! 아이가 이 밑에 깔렸다구요!”
서정아가 눈물을 터트리며 고함을 질렀다. 기자들이 급히 119에 신고하고 샹들리에 주위로 몰려들었다. 떨어진 샹들리에 밑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상을 갈아입고 나오던 양욱이 아비규환이 된 홀안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뚝 섰다. 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정아가 아이를 살려달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혜나!
“혜나야!”
그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기자들과 함께 양욱은 샹들리에 뼈대를 치우며 미친 듯이 되뇌었다.
“혜나야. 안돼. 혜나야. 아...미안해. 미안해. 내가 방심한 바람에...나 때문에...”
양욱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혜나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자신을 용서할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을 믿고 딸을 맡긴 희주누나를 어떻게 본단 말인가. 제발 무사하기만 해다오.
“어머낫..애는 무사해요.”
드디어 밑에 깔린 사람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녀는 혜나가 아닌 진마리였다. 놀랍게도 진마리가 자신의 몸으로 혜나를 감싸안은 덕분에 혜나는 작게 베인 상처 외에는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진...진마리...당신...”
양욱이 잠시 말을 잃었다. 왜 진마리가 혜나를 구해준 것 일까.
“당신 괜찮소? 진마리! 진마리! 눈 좀 떠봐. 정신 좀 차려보라고”
피범벅이 된 귀은이 겨우 눈을 떴다. 그녀의 몸은 샹들리에가 떨어져 박힌 상처로 피가 철철 나고 있었다. 핏물이 카페트를 붉게 물들였다.
“혜...혜나는유...내 동생 혜나...혜나는유...”
귀은이 눈을 떠 물은 것은 혜나의 안위였다. 양욱의 등골이 이상하게 시려왔다. 내 동생 혜나라니? 이 여자 좀 이상하다.
“혜나는 괜찮소. 좀 베이긴 했지만. 그것보다 당신 피를 많이 흘렸소. 조금만 참아요. 곧 응급차가 올거요. 조금만..조금만 참아요”
“...하...다행이에유..우리 혜나 무사혀서. 불쌍한 내 동생...무사혀서...증말 다행이어유,,,”
귀은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임비서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독중 중의 독종 진마리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 양욱은 자신의 양복재킷을 벗어 떨고있는 귀은의 몸에 덮었다. 덜덜 떨면서 정신을 잃어가는 진마리의 모습을 양욱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