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는 순간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긴장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커피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이번엔 커피의 진한 풍미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수미는 눈앞에 서 있는 중년 여성-역술인의 얼굴을 최대한 건조한 표정으로 살펴보았다.
수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지금까지 두 번의 슬럼프를 맞았다. 첫 번째 슬럼프는 동생이 사망했을 때였다. 동생 수연이 죽었을 때 그 정신적 충격으로 수미는 몇 개월을 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필요할 때 말고는 방에서도 나오려 하지 않아, 부모님조차 걱정을 많이 할 정도였다. 수미가 방에 틀어박힌 지 십수 주 후, 수미의 방에서 한 소절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렸을 때, 수미의 부모가 느낀 심경의 변화는 말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수미는 조금씩 피아노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두 번째 슬럼프는 바로 요즘이었다. 부쩍 연습량을 늘렸음에도 수미의 실력 향상은 그 변화폭을 느끼기 어려웠다. 주변의 동기들에 비하면 월등한 솜씨였으나, 지금 실력으로 수미의 꿈을 이루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수미 자신도 이러한 슬럼프를 느끼고 있었지만, 친구들에게나 부모에게나 따로 말한 적은 없었다. 알린다고 해서 실력이 더 나아지지도 않을뿐더러, 괜히 그런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는 슬럼프에 대해 떠오르면서 수미는 중년 여성을 향해 힘없이 생긋 웃었다.
"하하. 말 못할 고민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죠."
"그런데 아가씨는 어딘가 달라요. 남들이 이냥저냥 말 않고 살아가는 고민들과는 결부터가 다르다고… 음, 예전에 무슨 큰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어?"
수미의 얼굴이 일변 어두워졌다.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고 웃고 있었지만, 주의 깊게 수미를 관찰하고 있던 중년의 역술인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구, 아가씨! 아가씨가 하자고도 안했는데 내가 나서 가지구 먼저 점을 보겠어? 그냥 이렇게 참한 아가씨가 내가 신경 써서 차린 카페에도 이곳저곳 관심 많아 보이고 하니까 예뻐서 물어보는 거야. 그냥 아가씨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 못한 얘기가 있는지 어떤지 떠올려봐요. 편하게 생각해봐."
역술인은 사람좋은 웃음으로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역술인은 테이블을 따라 조금 이동해 수미 맞은편의 비어있는 의자에 앉을 듯이 제스처를 취했다. 앉지는 않고 수미를 돌아보며 의견을 묻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수미는 술기운과 카페의 어둑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몇 마디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수미는 앉으라는 손짓을 했고 역술인은 의자에 앉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고 때문에 아가씨 마음에 큰 화가 자리할 수도 있는 법이지, 그래. 그런데도 도저히 남들한테는 얘기하기가 껄끄럽고 말이야. 보자… 그래, 이를테면 사고 때문에 큰 수술을 받고 후유증이 생겼다던가, 누군가를 잃게 되었다던가, 하다못해 아주 이상한 환청이나 환각 증세를 겪을 수도 있지."
잃게 되다… 그 단어를 듣자 커피잔을 잡고 있던 수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역술인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는 수미의 손과 살짝 숙인 채 테이블을 보고 있는 수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침묵이 흘렀다. 역술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수미에게 뭔가 말을 하려할 때였다. 수미가 입을 열었다.
"네, 몇 년 전에 사고로 동생이… 제 친동생을 잃은 적이 있죠. 그때 저는 동생이랑 같이 있다가 이야기가 끝나고 이야기하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죠. 그런데… 그 후에 동생이 그 장소에서 낙사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저런.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겠구나. 동생은 몇 살이었니?"
"21살, 동생은 저와 쌍둥이였어요."
"아니, 그러면 그 날에는…"
수미는 남은 커피와 적립 쿠폰을 손에 들고 카페 발코니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이상했어. 내가 가족한테도 그 사건에 대해서는 잘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얘기를 해줬지?'
대체로 수미는 동생의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을 꺼려했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힘들었던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도 거부감이 들기 때문도 있지만, 그날을 궁금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세세한 상황을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미는 카페에서 역술인과 대화를 이어갈수록 역술인이 굉장한 화술의 달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수미가 화두를 꺼내면, 역술인은 한두 가지를 더 물어보거나 얘기에 서너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수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거나, 슬픈 기억이 되거나, 수미를 위로하는 말들이 되었다. 수미는 역술인과의 대화에 점점 빠져들었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꺼낸 적이 없었던 말들을 하게 되었다.
수미는 골목을 돌아나가는 시점에서 카페 방향을 다시 뒤돌아보았다. 어느새 손바닥 반만해진 카페의 창문에 작은 그림자 같은 것이 어렴풋이 비춰졌다. 꼭 수미를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수미가 자세히 보기 위해 걸음을 잠시 멈추려 할 때, 그림자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수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긴 하루처럼 느껴졌다. 수미는 카페에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했다. 아직 취기가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역술인의 화술에 말려들었기 때문인지, 수미는 어느새 동생이 죽은 사고와 가족사까지 화제에 올렸었다. 수미는 그 사건에 대해 무슨 실언을 하지 않았는지 조금 불안해졌다. 수미는 역술인이 자신에게 물어봤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려 애썼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미는 그 날의 사고에 대해 회상했다.
쏴아아아-
장대 같은 빗줄기들이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몇 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수연은 저 아래쪽에 떨어진 허여멀건한 형체를 너무도 잘 분간할 수 있었다.
"수미야!!"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수연은, 자신과 달리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데다 마음까지 착해 쌍둥이면서 다 큰 언니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수미를 조금 골탕 먹이려고 했을 뿐이었다.
수연은 쏜살같이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제발, 수미야… 제발!'
수연은 차라리 수미가 자신을 깔봤으면 하고 바랐다. 아니면 세차게 나무라기라도. 밖에서 자기 친구들에게 언니의 없는 욕을 하고 다니다가 수미가 알게 되고, 집에서 언니를 일부러 무시해도 수미는 수연이 바라는 대로 반응하는 법이 없었다. 수미, 태어나서 지금까지 욕이라도 뱉어본 적 있을까. 수연은 상대를 싫어하거나 훈계 같은 것이라도 한 번 하지 않는 수미라서 더욱더 짜증이 난다고 느꼈다.
수연의 걸음이 수미에게 가까워질수록 눈에 띄게 느려졌다. 수미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수미의 코에 댄 손가락에 숨을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수연은 직감했다. 뜀걸음과 흥분으 헐떡일 때마다 하얀 김을 내뿜는 자신의 입 주변과는 달리, 수미의 코나 입 주변으로는 호흡을 한다는 일말의 흔적 같은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멈추지 않고 수연은 더 가까이 기어가서 수미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수연은 주저앉은 상태로 자신의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피아노를 잘 치는 언니의 손을 꼭 닮은 자신의 그 희고 긴 손가락 사이로 억수 같은 빗물과 함께 수미의 피가 흘려내렸다.
"수미야, 수미…, 수미 언니…! 아니야!"
그날 죽은 것은 수연이 아니라, 수미였다.
수연은 비와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 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곧 어떤 생각이 수연의 정신을 붙잡았다. 수연은 눈을 떴다.
단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는 수연의 눈은 굳은 결심으로 힘이 들어가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말하지 못할 정도로 처연했다. 수연은 수미의 시신을 내려보다가 이내 넋이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수연은 자신이 어떻게 수미의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옷을 입히고 수미와 자신의 머리칼을 손질했는지, 스스로 행동하면서도 마치 꿈을 꾸듯 모든 일을 처리했다.
수미로 위장한 수연은 집으로 돌아왔다. 약간 늦은 시간의 밤이라 집에 들어서자 엄마가 부스스한 얼굴로 현관에 나왔다.
"수미 왔니? 조금 늦었구나. 아니 수연이 얘는 들어올 생각을… 응? 아가, 비에 홀딱 젖었네. 얼른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수건 가져다줄게."
수연은 긴장과 두려움으로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잠시 뒤 욕실에서 수건을 들고 돌아오는 엄마를 귀찮은 듯 휙 돌아서고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수연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문밖에서 엄마는 이상한 시선으로 닫힌 방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수미가 들어간 곳은 수연의 방이었다.
다음 날, '수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수연'은 사고사로 판정되었으며 별다른 후속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 직후 '수미'는 내리 한 달을 끙끙 앓았다. 그 뒤로도 몇 달 동안 그 사건의 충격으로 수미는 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몇 달 뒤, '수미'의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슬픔으로 수연을 보내고 수미의 건강을 걱정하던 부모는 피아노 소리에 깜짝 놀라 수미의 방으로 달려갔다. 수미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고, 초췌하고 음울했지만 생기를 차린 수미의 눈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연은 회상으로부터 돌아와 수미의 침대 끝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수연의 뺨을 타고 기다란 눈물 줄기가 흘러 내려와 수연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정말 미안해, 수미 언니….'
수연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기어코 삼키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언니, 내가 더 열심히 할게. 아니, 내가 수미 너야. 네가 되고 싶던 거, 반드시 이루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