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수미와 동생 수연은 일란성 쌍둥이 자매로 태어났다.
수미는 스무 살이 되고 얼마 후에 수연을 잃었다.
수미는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흐트러져버릴 것 같은 모호한 정신 속에서 생각했다.
'수미야, 아직 멀었어… 한참 더, 쉬지 말고 더 해야 해.'
아니, 순간적으로 졸음이 왔던 모양이다. 수미는 숨 쉴 때마다 양 뺨으로 올라오는 취기와 관자놀이를 두드리는 두통이 느껴졌다.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드니 옆으로 흘러내렸던 긴 생머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며 수미의 얼굴이 보였다. 톡 튀어나온 흰 이마, 놀란 듯이 동그랗고 큰 눈, 뚜렷한 콧날과 살짝 벌어진 콧방울, 가만히 있어도 끝이 올라가 있는 입술. 전체적으로 예쁘고 선한 인상을 주었다. 수미는 고개를 들면서 눈앞의 작은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휴, 이수미. 지금 술을 얼마나 마신 거지?'
수미는 지금까지 마셨던 술병들로 슬쩍 눈길을 돌리자마자 옆에서 동기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싫어! 또 걸렸어! 나 오늘 왜이렇게 못하냐?"
"그럼 마셔야지, 뭐. 자꾸 먹다보면 술이 가르침을 줄거다. 으하하하하!"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아!"
"수미야, 뭐해? 한잔해, 한잔해. 잔 들어~ 안 마실 거야?"
마주 앉은 동기는 100미터 거리에서도 들릴 듯한 크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동기의 권유에 수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은 사라지고,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도록 생긋 웃어 보이며 잔을 들었다.
"응, 그래! 짠."
"잘 가, 얘들아~ 다음 주에 봐!"
"수미도 잘 들어가고. 주말에는 연주 연습하지 마! 손가락이 힘들단다, 야. 으하하하!"
"하하. 안녕. 조심해서 들어가~"
덩치가 큰 저 대학 동기가 손가락을 걱정할 정도로 연습하는 악기,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수미는 교우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하얀 피부, 또렷하고 귀여운 인상의 이목구비,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정말 건반같이 희고 예쁜 이와 생글거리는 눈웃음도 매력이었지만, 수미의 주변에 친구들이 모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수미의 순한 성격과 겸손한 언행이었다.
수미는 5살 때 처음 피아노를 접한 후로, 피아노에 대한 흥미와 재능을 보였다. 어릴 때 뭐든 경험하게 해보자는 부모님의 양육 방침에 따라 수미와 수연 자매는 여러 학원을 다녔다. 그림, 논술, 웅변 학원-심지어 태권도에서도 수미는 심심찮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가장 높았다. 수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이 콩쿠르에 입상하고, 그 뒤로도 각종 피아노 컨테스트들에 참가하는 족족 그 대회들의 트로피를 집으로 가져왔다.
이미 열아홉 살이 되기도 전에 수미는 피아니스트가 될 자신의 미래를 그렸고 당연히 자력으로 최고의 명문대에 전공 수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수미를 보는 주변 사람들 누구나 수미의 실력과 엘리트 코스를 걷고 있는 그녀의 인생에 대해 칭찬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수미는 늘 순하고 담담했다. 물론 대회에서 상을 받아오면 기뻐하고 가족들과도 그 기쁨을 공유했지만, 주변에서 그녀를 치켜세우는 말들에 대해서는 결코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예의 그 선하고 예쁜 미소로 생긋 웃으며 대응할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노를 치러 갔다. 어디서든 튀지 않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수미의 이러한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친구들도 자연히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수미는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진심 어린 응원들도 받을 수 있었다.
몇 년전 사망한 쌍둥이 동생 수연을 제외하고는.
수미는 부모님이 자신이 태어난 해에 대해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25년 전, 한 산부인과에서 두 쌍둥이가 태어났다. 두 자매를 본 일가친척들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놀라고, 또 그 부모도 헷갈릴 정도로 복사한 듯이 정말 똑 닮은 둘의 외모에 다시 놀랐다고 한다. 수미, 수연 자매의 부모는 굉장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부족함 없이 원하는 것을 지원해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자매는 물심양면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컸다.
20여 년쯤 전, 수미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그림 학원 선생님과 어떤 친구의 부모님에게 사과를 하던 날을 떠올렸다. 동생인 수연의 성격은 수미의 그것과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타입이었다. 수미와 함께 그림을 곧잘 배우는 것 같으면서도, 옆자리 친구의 얼굴에 물감으로 채색을 하는 장난을 쳤다. 또 수연은 피아노 연주를 무난하게 따라하는 것 같으면서도, 하얀 원피스를 입은 복장 그대로 놀이터로 도망가곤 했다. 수연은 무언가를 배우면 어렵지 않게 습득했지만, 실력이 조금 붙을 때면 금방 배우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늘 자신을 신나게 하는 것만 찾아다녔다.
부모는 자매가 자유롭게 성장하기를 바랐다. 그 때문에 두 자매가 각자 하고 싶어하는 것을 막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매가 함께 학원을 갔는데도 동생만 옷이 흙탕물로 지저분해져 돌아오더라도,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비온 모래사장에서 뒹구는 것은 재미있었는지 등을 신경 써주었다.
15년쯤 전, 수미는 부모님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날을 떠올렸다. 그 직후에 제 방문을 조용히 닫던 수연과 눈이 마주쳤었다. 두 자매를 동일한 방침으로 키웠지만, 부모는 어디서든 착하고 무엇이든 잘 해내고 특히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큰 재능과 성과를 보인 수미에게 무언가를 내심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연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오냐오냐하고 받아주면서도 사실은 언니 수미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는 부모님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수연이 언니에게 괜한 화를 내든 질투 어린 장난을 걸든 수미는 크게 반응하지 않고 담담하게 수연을 동생으로서 아끼고 감싸주었다. 수연은 왠지 그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수미와 수연은 외모 말고는 닮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수미는 작은 규모의 컨테스트에는 참가하면 눈치가 보일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매일같이 연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고 세계적인 연주자들을 본보기로 삼아 꿈과 실력을 키워나갔다. 반면 수연은 이제 자신이 언니와 어떻게 비교당하는지 잘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릴 때보다 더 제멋대로 행동하고 다녔다. 학생의 본업과는 거리가 먼 친구들과 어울렸고 학교 수칙의 울타리를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더 재밌는 것만을 찾아다녔다. 수연은 머리는 좋았기에 나름의 방식으로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연주 연습과 성적을 둘 다 놓치지 않는 언니에 비하면 수연은 지금보다 훨씬 더 잘했어야 하는 동생이었다. 연습실에서 밤늦게 귀가하는 언니를 집 앞에서 만나면 수연은 수미를 흘겨보며 어깨를 밀치면서 집으로 먼저 들어가곤 했다.
수미도 수연의 이런 질투와 시기 어린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미는 수연을 미워하지 않았다. 수미는 기회가 되면 수연과 대화를 하고 싶어했다. 가끔은 답답할 정도로 유순한 성격상 수미는 단지 수연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5년 전, 수미와 수연이 모두 같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후인 시점에, 수연은 할 얘기가 있다며 언니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갑작스런 사고가 일어나면서 수연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 때문에 수미는 겁에 질려 곧장 집으로 도망쳤었다.
'이수미. 너가 그때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의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수연이를 챙겼으면 그런 일은 안 생기지 않았을까.'
이십 년이 넘도록 함께 산 쌍둥이 자매가 사망한 것은 남은 자매에게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수미는 몇 해가 지나도 종종 떠오르는 동생에 대한 회상을 멈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