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수는 신경정신과 의사다.
그녀는 막 오전 진료를 다 마치고, 몰려오는 나른함에 나직한 신음과 함께 하마처럼 큰 하품을 한다.
아직은 뒷마무리를 해야 하고, 점심을 먹고 와서 오후 진료를 재차 진행해야 한다. 간호사들은 먼저 지들끼리 식사를 하러 나간지라 지금은 그녀 혼자 진료실에 남아 있다.
‘슬슬 나가 볼까?’
식사를 하러 가기 전, 백화점에 들러 수선을 맡긴 옷을 챙겨야 한다. 다소 빠듯하다. 시간이.
‘그런데 저녁에 그놈이 오기로 했지.’
박은수가 속으로 그놈이라 지칭하는 이는 요새 어쩔 수 없이 자주 연락을 취하고 있는 의대 후배다.
나름 아는 사이임에도 그를 ‘놈’이라 일컫는 건 평소에도 상대가 선배든 어른이든 매한가지로 싸가지가 없게 굴기 때문이다.
거기다 놈은 의대를 진즉 나와 놓고도, 삼년이 넘은 듯한데, 마땅한 직장이 없다.
‘의대 졸업장에 자격증까지 있는데 탐정이라니.’
사실, 대학 새내기일 때부터 수차례 법의학자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했지만.
‘처음 들었을 땐 농담인 줄 알았더니, 나중엔 전공도 거기 맞춰 병리학과를 갔었지. 뭐, 근데 지금은 법의학자가 아니라 일개 탐정이잖아. 뭐, 녀석을 붙잡기 위해 그런 거라 볼 수도 있지만.’
여하튼 중산층 출신에 돈을 벌러, 출세하러 들어가기도 다니기도 어려운 의대를 나온 박은수 그녀와 달리, 어릴 적부터 품어온 꿈과 명예만을 위해 그 대단한 의대를 통과한 놈이다.
‘세상 참 편한 놈.’
살기 위해, 졸업하기 위해 죽어라 공부하고 그 힘든 인턴 과정까지 거치곤, 봉급의 생활도 거쳐 개원까지 했지만 돈 걱정으로 지금도 힘들어죽겠는데……, 놈은 일도 않고 탐정 노릇이나 하며 그 녀석 꽁무니나 쫓고 있으니.
‘뭐, 놈은 나와 달리 집안이 빵빵하지. 내게는 싹수없는 후배놈일지라도, 사회적으로 볼 때는 잘난 도련님에 뛰어난 두뇌로 스스로 의대까지 나온, 웬만한 젊은 여자라면 동경할만한 존재니깐.’
게다가 법의학자가 되고자 한 밑바탕엔 거기 가족 중에 관련 계통 일을 하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단 걸 알고 있다면, 더욱더 무시할 수가 없다.
‘근데 그쪽 일을 하는 게 정확히 누구였지? 아버진가? 친척? 아님 동생?’
사실 그녀는 그와 제대로 친한 사이가 아닌, 대학 시절에 적당히 알고 지냈던 선후배 관계일 뿐이니.
하지만 현시점에선 누구보다도 중요한 파트너이자 불가결한 동맹 관계다. ‘녀석’의 유혹에 넘어가 저지른 사태들을 수습하려면 말이다.
‘녀석의 능력을 과신하고 일을 크게 벌이고 만 게 화근이었어. 근데 화 그 놈은 왜 그를 녀석이라 지칭하지. 녀석도 버젓이 이름이 있는데. 녀석의 이름을 입에 담기도 싫은 건가?’
사실 화라는 이름만큼이나 녀석의 이름도 특이하고 간결하다. 화 그 놈 때문에 덩달아 녀석을 이름이 아닌 ‘녀석’이라 자꾸만 부르게 되지만. 화 그 놈 땜에.
‘매번 느끼는 거지만, 화란 이름이 특이해. 성은 김이요. 이름은 화? 크크. 이런 성명에 컴플렉스가 있지는 않을까? 에이, 근데 화는 그럴 놈이 아니잖아. 그놈 본연의 터프함을 생각하면 컴플렉스 같은 게 있을 리가.’
사실 화란 한 단어 이름이 우습게도 보일지 모르지만, 놈의 성향과 잘 어우러진다. 화, 그 놈은 진짜로 불(火) 같다. 진짜 이름이 ‘불 화(火)’자 일리는 없겠지만.
‘근데, 이름은 녀석도 만만치 않지. 따지고 보면, 녀석의 이름도 본인과 잘 어울려. 미스터리하면서도 차분하고 조용한 녀석의 캐릭터가.’
놈과 녀석. 이름에서도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 둘. 이름만 아니라 외양이나 성격도 극과 극이다.
건장하고 근육질인 화와 반면에 호리하고 몸집이 작은 편인 ‘녀석’.
거칠고 터프한, 그리고 머리는 좋은데 매사에 자주 불같이 버럭 하는 화. 반면에 진중하고 침착하며, 언제나 기다릴 줄 아는 그 녀석.
지금은 화가 이름도 언급하기 싫어할 만큼 증오하지만, 한때는 둘도 없을 만큼 친한 사이였다. 아니,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였지.
그 둘에 대한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지만, 그래도 놈의 대학 선배인 그녀가 아는 사실은 이렇다.
그 녀석은 다른 의대생이다. 같은 의학도지만도 다른 대학의 학생. 게다가 초중고 동창도 아니도 이전에 본 적도 없는 남남인 그들이었다. 이럼에도 그 둘이 서로 만나고 어울린 이유는 공통된 관심사 덕분이었다.
그건 바로 ‘기억’. 그것도 최면을 통한 기억의 관리.
당시 화는 최면을 통해 피해자나 목격자의 무의식 속 기억마저 깊게 파고들어 범죄 수사에 접목하는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졌다.
드라마 같은 데서도 제법 등장하지 않는가? 너무 오래되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친 거라 보통의 경우 떠올리기 힘든 그런 기억을 최면으로 생각나게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는 것.
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착상의 현실화를 위해 화는 최면을 이용한 기억 통제에 대한 연구에 녀석과 의기투합했다. 단, 이에 협력한 녀석은 어떤 속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 상황을 고려하자면 말이다.
애초 그녀는 화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녀석’과는 우연히 몇 번 마주친 정도에 불과했다. 인턴 과정에 들어가면서는 볼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억과 최면에 대한 관심과 연구로 친구가 됐다는 걸 알 뿐. 이후 그들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찌해서 지금은 서로를 쫓고 피하는 신세가 됐는지 자세한 전말은 모른다.
‘육개월 전 그날 제주에서 벌어진 사건이 결정적인 듯한데, 이에 관해선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어찌됐든 인턴 후 레지던트에 들어가면서 전공으로 신경과를 선택한 것이 ‘녀석’과의 접점이 될 줄이야.
4개월 전 녀석이 그녀에게 나타났고 능력을 소개했다.
최면을 위한 치료도 아니고, 최면으로 기억을 아예 뒤바꿔버린다니. 처음엔 터무니없는 내용에 반신반의를 했다.
허나 개원을 한지 얼마 안 돼, 어렵게 차린 병원이 망하진 않을까 하는 압박감에 스스로 조급해 했고, 그도 같은 의사 출신이라는 믿음에 덥석 손을 작은 게 이런 상황을 초래할 줄이야.
그를 믿고, 정확힌 단골 확보를 위한 몸부림에, 증상이 심각한 이들에게 그를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그의 힘을 체험한 이들은 주변에 추천을 하면서, 기억을 바꾸기 원하는 의뢰인과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녀석 간의 커넥션이 성립되었다.
현재에 와선, 김철수라는 정체 모를 남자가 여기저기로 중개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여하튼 그녀 또한 이 과정에서 단단히 한몫을 했다. 어찌 보면 개국 공신인 셈이다.
‘하기사 병원 매상에 도움이 되긴 했어. 그가 아녔으면, 병원문 닫고 페이닥터로 빚 갚는데 몇 년을 허송세월 보내야 했겠지.’
하지만 후폭풍이 문제였다. 최면의 위력이 너무 쎈 나머지 이게 세상에 알려져 커지기라도 하면, 자칫 세간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면허가 정지가 되면 아예 인생이 끝장나 버릴지도, 이십년 넘게 힘들게 공부한 게 허사가 되는 파멸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전전긍긍하게 됐다.
마침 후배인 화가 나타났다. 녀석을 죽일 기세로 찾아다니는 그가 탐정놀이 같은 걸 해대며 녀석이 해놓은 조작된 기억을 깨뜨리는데, 뭔 짓인가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와 녀석이 유발한 사태들은 뒷정리하는 효과가 있었다.
‘운이 좋았던 걸까? 필요할 때 녀석이 나타났고, 또 놈이 등장했다. 시의적절하게.’
우연일 수도 있지만, 녀석은 화의 등장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종적을 감춰버렸다. 때맞춰서. 연락도 끊겼다.
‘단, 어제까지 그랬지.’
그녀가 서랍을 연다. 무언가를 꺼낸다. 금색으로 된 줄 달린 회중시계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지고 다니지 않는 물건인데, 지금은 무슨 영문인지 그런 사물이 그녀의 손아귀에 있다.
‘예정대로 저녁에 화를 만나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제 여기서 있었던 일을.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까? 아냐. 어차피 일마치고 오늘 보기로 했으니까 그때 차차 말하도록 하자.’
들린 시계의 시간을 본다.
‘아참, 딴생각에 정신이 팔려 버렸네. 옷 찾고 식사할려면 지금 곧장 나가야겠어. 고민은 나중에 하자구.’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열고 병원 안에 어떤 이가 들어왔다. 흠칫 놀란 그녀가 시계를 원래의 위치에 되돌리고 서랍을 닫는다.
‘환자인가? 점심시간이라고 안내판이 붙어 있을 텐데.’
뚜벅뚜벅. 발자국이 가까워진다.
‘간호원? 아냐, 돌아오기엔 아직 일러.’
발소리가 문 앞에 멈췄다. 닫혀진 문 너머에 상대가 서 있다.
‘내가 안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건가?’
지금은 진료실뿐 아니라 병원 안도 그녀 혼자뿐이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온다.
놈이다. 의사 후배인 그 놈.
‘십년감수했네. 어찌나 무서웠는지. 근데 왜 지금 온 거지? 원래 저녁에 보기로 하지 않았나?’
곁눈질로 탁상 달력을 체크한다. 오늘 날짜에 장난 식으로 써 놓은 불 화(火)란 한자에 저녁이란 단어가 붙어 있다.
놈답지 않은 양복을 밝은 색상으로 짝 빼입고, 그답지 않은 사근사근한 얼굴로 선배를 향해 다가온다.
‘예쁜 여자와 붙어 다니더니 인상이 달라져 버렸네. 근데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아영이었나?’
“오랜만이죠?”
감미로운 목소리다. 여자를 홀리기 좋은.
‘오랜만? 뭐, 직접 얼굴은 본지 2주는 됐으니 나름 맞는 말이지.’
버젓이 서 있다. 마치 모델 같다. 날씬한 몸매에 말끔한 얼굴. 이에 어울리는 정갈한 복장까지.
‘여자가 남자를 바꾼 건가? 화 놈은 남에 의해 쉽게 바뀌는 인간이 아닌데. 애당초 눈치 따윈 씹어잡수는 새끼인데. 아영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대단하네.’
“앉아도 될까요?”
놈답지 않게 정중하다. 미인 하나에 바껴도 너무 바뀐 게 아닌가 싶다.
“으응, 그래.”
갑작스런 이 남자의 등장에 얼떨함이 남아있는 그녀. 힘든 오전 일정을 마친 직후라 피로하기에 신경을 제대로 집중하기가 어려운 그녀.
반면 새로이 등장한 이 후배는 여유롭고 호방하기 그지없다.
“내가 이상해요? 일찍 와서.”
빤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보통 환자들이 주로 앉는 맞은편 의자에 편히 걸터앉는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좀 지쳐 있는 상태라 그래. 근데 왜 지금 온 거지? 저녁에 만나기로 했잖아.”
“근처에 들릴 일이 있어서 이왕 들렸어요. 이때쯤이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바뀐 후배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본다. 이를 의식한 건지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런데 많이 변한 거 같아? 양복은 잘 안 입잖아? 그 깨끗한 얼굴은 뭐야?”
“좀 바껴 볼려고요.”
“혹시…… 아영이라는 아가씨 때문이야?”
“아영이요?”
“같이 다니는 기자 아가씨 있잖아. 전에 중아일보에서 근무했다는. 지금은 여기저기 같이 다니잖아. 그 여자가 여러모로 도와주고 있지? 그동안 같이 다니면서 좀 가까워진 거야?”
일부러 미소를 지어보이며 연애 건으로 이 싹수없는 후배 놈을 골려 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는다.
“아, 아영씨. 그럴지도요.”
‘어물쩍 넘어가네. 능구렁이 같이. 그답지 않게. 평소엔 곰 같이 고지식한 놈이. 단, 무지 똑똑한 곰이지만.’
놈은 그녀의 미소를 되받듯이 말없이 살짝 웃고 있다.
‘근데 백화점에 옷은 어쩌지? 뭐, 끌날 때 아니면 내일이라도 가기만 하면 되겠지.’
“식사나 하러 나갈까?”
“식사는 이미 하고 왔어요. 잠깐이면 돼요.”
“그래?”
이 불편한 후배와의 만남은 잠시면 된다. 그럼 빨리 어젯일을 얘기해야겠는데 자꾸만 망설여진다. 어떻게 말해야하지? 마치 꿈같이 느껴지는 그 만남을.
“김성훈씨는 만나봤어?”
“김성훈씨요? 마흔 살 남자에 상사에 근무하는 사람 말이죠?
“응, 그래. 그 사람까지 하면 다 끝나는 거 아닌가?”
뜸을 들인다. 그리고는 나직이 한마디로 답한다.
“아직이요.”
“뭐, 그 사람 기억을 되돌리는 거야 어렵진 않을 거야. 아주 오래 전 기억을 간단히 지운 거니까.”
옛날 기억을 잠시 동안 변경시키는 거긴 했지만 그런 새끼에게 도움을 줬다는 지금까지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환자고 돈이 됐으니.
“음, 그렇겠죠.”
담담히 답한다. 자신이 넘치는 건가? 하긴 그동안 수습해준 일들을 보면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지.
‘어쨌든 그 사람만 처리하면, 내가 주선시킨 사람들은 다 수습되는 거겠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소개해준 이들이 있겠지. 김철수라는 남자를 통해서. 그 규모가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뒷처리는 이제 여기 이놈의 몫일뿐이지.’
“이전 의뢰인들에 비하면 손쉽겠지? 이일애나 이연미 이런 사람들은 장난이 아니었지?”
“이일애하고, 이연미 말인가요?”
이름을 또박또박 말한다. 그리고는 간단히 덧붙인다.
“그랬었죠.”
“수월했어? 기억을 되돌리는 게. 내가 직접 가보지는 않아서.”
“별일은 없었어요. 아영씨란 여자 분이 잘 도와줬으니까요.”
“다행이네.”
‘잘 도와줬다니 그 여자가 똑 부러지게 잘하나 보네. 첫인상이 만만한 애가 아니었지. 근데 걔도 좀 재수가 없긴 하지. 이놈처럼.’
“최근에 별일은 없었나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제 말할 때가 됐어.’
그녀가 알기론 김성훈만 처리되면 자기 쪽 의뢰인들은 끝이다. 마지막 짐만 덜면 된다. 이게 그녀의 현재 본심이다.
‘어제의 일을 얘기해야 해.’
그녀가 서랍을 연다. 예의 회중시계가 놓여 있다.
“저기, 그 녀석이 있잖아. ……”
“그 녀석이요?”
“그래. 니가 쫓고 있는 녀석.”
“아! 그 녀석 말이군요.”
맞장구치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본다.
“만났어. 어제.”
“어제요?”
그녀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을 휘둥그레 뜨는 그.
“어제 바로 그 자리에 녀석이 앉아 있었어.”
그녀는 진즉에 눈치 챘어야 했다. 녀석을 만난 어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아직도 녀석의 손바닥 위에 놀아나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