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각성, 팬텀 프리스트!
교실이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뭐, 이유는 알고 있다. 10년 전부터 작년까지 화두에 올라간 한 괴도가 부활했다는 이야기겠지. 양측의 친한 척하는 녀석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근 1년 동안 아무런 활동도 없더니 다시 시작했다며?”
“괴도도 쉬는 시간이 있는 모양이네. 이번에는 대기업을 털었다며? 부활부터 화려하네.”
그렇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은 지치기 마련인데. 그 도둑놈도 사람일 테니까. 이제 좀 자리에 가줬으면 좋겠는데.
“쉬면서 방법도 바꾼 거 같아. 유리 상자를 깨거나 자물쇠를 망가뜨려서 털었다더라”
“돌려주지도 않았다며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치 유성아.”
탕!
책상을 치고 일어나서는 두 사람에게 차분한 분노를 맛보여주었다.
“슬슬 종칠 텐데 가면 안 될까? 난 괴도에는 관심도 없고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
머쓱해진 두 사람은 멀리 가며 내 욕을 하는 게 들려왔다.
유성이 쟤 왜 저래?
가족들이 큰 사고를 당한데다,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서 챙겨주는데도 되게 예민하네.
저 두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아직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뿐이었다.
‘오늘로 상도 끝나는 구나.’
조부모님과 형이 화재사고를 당하고 친인척 집을 전전하기를 딱 1년.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만으로도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집이라고 해야 할까, 조부모님과 형이 죽고 나서 머물게 된 먼 친척집. 다른 친척들은 유산은 쏙 빼먹었으면서 날 몇 달 이상 맡는 걸 거부했지만, 유일하게 이 두 분만은 혼자가 된 나를 받아주셨다.
두 분이서 사는 데다, 두 분 다 강력반 형사라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을 때까지 집안 관리를 해주는 조건으로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해주셔서 말이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조용하다. 두 분은 오늘도 안 들어오신 듯했다. 오늘도 예고장이 왔다고 했던가? 배려라고는 1도 없는 도둑놈이네.
불이 꺼진 짧은 복도를 지나 2층의 빈방으로 들어갔다. 방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당장에 쓸 건 다 정리해두었고, 남은 박스는 내가 겨우 지켜낸 조부모님과 형의 유품이 들어있었다.
조용히 앉아서 불에 그을린 세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부모님의 물건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도윤이 형의 물건이 손에 쥐어졌다. 형이 틈만 나면 자랑하며 내가 고등학교 가면 물려주겠다고 했던가? 나중에 써보면 놀랄 것이라면서.
촌스럽다고 안 쓴다고 했지만 이제 형을 추억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불에 그을린 흔적과 일부가 녹아내린, 더는 움직이지 않을 회중시계.
“도윤이 형.......”
슬픔과 후회가 잠식하기 전에 입술을 깨물고 정리해나갔다. 그런데 어딜 잘못 건드린 걸까, 따끔한 감각에 보니 손끝에 피가 맺혀있었다.
“아, 쓰읍.......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치료를 위해 구급상자를 찾던 중, 맺힌 핏방울이 회중시계 위로 방울져 내려왔다.
째깍.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거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게 잘못들은 게 아닌 것을 알게 된 건 확실하게 들려온 시계 초침소리였다.
째깍, 째깍.
점점 빨라지고 있는 소리의 근원은 회중시계였다. 두려움에 떨리는 손으로 회중시계의 덮개를 열어보았다. 회중시계는 초침, 분침, 시침을 제멋대로 움직이며 신비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빛은 선을 그리고, 선은 원과 연결되어 기괴한 나무가 그려진 문의 형태를 띄웠다.
그리고 서서히 열리는 문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비눗방울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난 이를 눈에 담을 생각도 못하고, 몸이 문쪽으로 끌려가면서 귓가에 들려오는 뒤섞인 소리와 보이는 복잡한 영상에 눈과 귀를 막아야했다.
우리와 계약을....
오늘 밤에.........
팬텀 프리.........!!!!
우리의 신을 모욕하는........!!!!!
미안해, 유성아.....
그만.......이제 그만!!!!!! 섞여버리는 모든 것들로 인해 정신을 놓고 미쳐가기 직전이었다.
“아, 뭐야! 누가 문을 멋대로 연거야?”
따악!
성난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눈을 떠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세계. 바닥도, 천장도 없는 곳에 책과 종이, 책이 꽂혀있는 책장이 떠있었다. 거기다 주변에는 아까 본 비눗방울 같은 것과 빛들이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며 맴돌고 있었다.
시야도 되돌아오고 있던 중,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것이 보였다. 비취색과 백금색이 어우러진 신비한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나를 있는 대로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 세피로트의 문을 연거야? 혼자서?”
소년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묻고 있었다. 세피로트의 문? 이건 또 무슨 말이람. 멍한 정신도 천천히 돌아오고 있던 중에 곧장 이 소년에게 멱살이 잡혔다. 꼬맹이 주제에 힘이 겁나게 세네.
“미친 거 아냐?! 고대의 연금술사들도 목숨을 걸고 다함께 연 문을 혼자서 열어?! 너는 뭐 목숨이 무한대세요?! 와, 살면서 이런 또x이 새끼는 진짜 오랜만이네!!”
“목숨은 하나 맞는데에에에에.....”.
날 쥐고 흔들면서 말한 들, 내가 어찌 알겠냐고.......그나저나 고대니, 오랜만이니 이 꼬마 오래 산 사람처럼 말하네. 그렇게 잡혀서 흔들리고 질식해 죽을 거 같을 때쯤, 다른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기, 적당히 해. 걔는 우리에게 손님이야.”
“허? 내 문을 멋대로 통과하려고 했는데 손님이라고?”
눈을 돌려본 다른 소년은 다소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하지만 그 소년의 비취색 눈은 어딘지 날 관찰하는 느낌을 들게 하고 있었다. 그 소년이 요기라고 부른 소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멋대로 통과한 게 아니거든. 제대로 통행증이 있었어.”
“우리가 통행증을 주지 않은 건 꽤 오래 전인데, 그게 남아있을 리 없잖아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명한 비취색인 소년이 나를 볼 때 그리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눈을 하고 있는데도, 그리워하는 이유까지는 묻지 않아도 그들이 말해주었다.
“요기, 네가 유능하다고는 하지만 잊을 줄은 몰랐다. 우리 마지막 계약자에게 준 증표. 회수 못했잖아?”
“계약자?”
아, 설마하는 얼굴로 요기라는 소년이 나를 본다. 떨리는 손으로 내 뺨에 손을 올리고는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이내 제 얼굴을 감싸는 거였다.
“닮았어, 빼다박았어.”
도윤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