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건 굉장히 곤란한 문제였다. 배반자 안토니오의 육신과 영혼이 이 밑에 있다는 건 달리아도 알고 있었지만, 죽음의 눈동자에 대한 건 처음이었다.
“이걸…배반자 아브라함도 알고 있을까요.”
원래는 물음표로 말이 끝마쳐져야만 했다. 하지만 달리아는 그러지 못했다. 말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져 올라가지 못했다. 차마 자신의 아버지를 배반자 아브라함이라고 낮추어 부를 수가 없었는데도, 이를 악물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르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배반자 안토니오를 입에 담을 때면 수치스러움과 함께 껄끄러움이 혀끝에 감긴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마…아직 모를 겁니다.”
“…그건 다행이군요.”
달리아는 그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지만…최초의 배반자 안토니오가 죽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높다는 건 곧 그도 깨닫겠네요. 그래서 미리 빼돌리려 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씀도 맞습니다. 봉인을 반쯤 풀어제끼는 행위니 위험하긴 하지요.”
증원된 경비병들이 횃불과 창을 들고 빽빽하게 달려와 달리아와 테오도르를 에워싼 것은 그 때였다.
“묘지기님! 물러나십시오! 침입자입니다!”
그레이스톤이 어깨를 으쓱였고, 달리아도 어깨를 으쓱였다. 브리택도 그 무시무시한, 반쯤 악귀같은 모습에서 그저 거대한 늑대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분은 저나 테오도르 그레이스톤 묘지기님, 또는 실비아 영지에 위해를 끼치려고 들어오신 분이 아니다!”
조용히 있던 늙은 화이트우드 주교의 일갈이었다. 경비병들은 움찔 하며 멈추더니, 이내 경례를 올려붙이곤 말끔히 사라졌다. 주교는 곧 달리아에게 쪼글쪼글해진 손을 내밀었다.
“이사벨라 화이트우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은촛대지팡이를 보니 머스그레이브의 묘지기시군요.”
포근하고도 따스한 목소리였다. 머리카락은 금발에 새치가 절반쯤 섞인 엷은 색감이었다. 달리아는 깍듯하게 허리를 반쯤 굽혔다.
“달리아 머스그레이브에요. 무턱대고 들어와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달리아. 제가 묘지기분들의 일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급하신 일이었을 테니까요. 저는 꽉 막힌 주교가 아니랍니다.”
한눈에 봐도 꽉 막힌 주교보단 푸근한 할머니같은 인상이었다. 달리아는 함뿍 웃음을 머금은 그녀에게 맑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와서 제가 갈구기만 하고, 저와 제 묘지기견의 소개를 안 드렸네요. 머스그레이브의 여든 한 번째 의무자, 묘지기 달리아 머스그레이브에요. 이쪽은 제 묘지기견인 브리택이고요.”
“벌써 묘지기견까지 갖고 계시는군요.”
달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열아홉살에 묘지기견을 가진 묘지기가 머스그레이브의 역사 속에 단 한 명도 없긴 했지요.”
“…열아홉이십니까?”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달리아가 눈을 깜빡였고, 브리택은 가만히 엎드려선 달리아의 손바닥 아래에 머리를 디밀었다.
“…네? 그런데요?”
“아니, 생각보다 어려보이셔서….”
달리아는 피식 웃었고, 브리택은 그런 테오도르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테오도르는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테오도르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도 열 아홉입니다.”
“동갑이네요?”
달리아가 먼저 그 작은 손을 내밀었고, 테오도르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뭐…결과적으로 일정은 늦춰졌지만, 달리아 씨가 도와주시면 보다 덜 위험하게 죽음의 눈동자를 꺼낼 수 있겠군요.”
달리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더러 도와달라는 거죠?”
“정확합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와주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레이스톤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그리고 이 일에 뛰어든 이상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는 운명공동체였다.
“테오도르 씨는 죽음의 눈동자를 꺼내는 데에 성공하면 어디다 쓰실 생각이에요?”
테오도르 그레이스톤이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그것을 마땅한 주인인 죽음에게 돌려줄 것입니다.”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은 죽음에게요?”
“예. 죽음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그것 또한 찾아나서는게 아마 이 모든 문제를 가장 먼저 일으켰던 저희 그레이스톤에 씌워진 굴레가 아닐까요.”
브리택이 갑작스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그 때쯤이었다. 그는 그 핏발이 선, 커다란 손으로 맞잡은 달리아와 테오도르의 손을 갈라놓았다. 테오도르는 당황했고, 브리택은 가늘게 뜬 눈으로 달리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브리택?”
“손 그만 잡아. 내 거야.”
달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테오도르는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고, 이내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아, 제가 실례했습니다.”
“그, 실례가 아니라—.”
“—어. 실례했다, 너.”
달리아는 그냥 한숨을 푹 쉬었다. 테오도르는 그런 그녀를 빤히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죽음의 눈동자를 배반자 안토니오의 품에서 빼 오는 의식을 다시 거행해야 할 텐데, 머스그레이브의 의무자님께서는 언제쯤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저게 엄밀하게 말해서 가장 정중한 표현이었다. 이제는 교회의 분들도 기억하지 않는, 묘지기를 부르는 가장 오래되고 유서깊은 칭호. 그것이 바로 의무자였다.
“…방금 전까지는 달리아 씨라고 불러줬잖아요?”
“이건 그래도 의무자끼리의 업에 관한 이야기잖습니까.”
브리택은 용케도 놓지 않고 달리아를 계속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늘어진 눈으로 테오도르를 계속 노려봤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사벨라 화이트우드 주교님마저 불편해하는 상황에서 테오도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쯤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달리아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한 번 흐트러진 의식을 다시 거행하는데에는 어느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주일. 일주일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좋습니다.”
테오도르는 달리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뒤돌아서 가버렸다. 아마 그도 교회 내에 있는 거처를 제공받고 있을 터였다.
“묘지기견과 사이가 좋아보이네요.”
이사벨라 화이트우트 주교가 넉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브리택은 그제서야 달리아의 목에 감긴 팔을 푸는가 싶더니만, 답삭 안아들었다.
“사이가 좋은 게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달리아는 마치 갓 낚인 물고기처럼 바르르 떨더니 브리택의 가슴을 그 작은 주먹으로 때렸다.
“브리택!”
“왜. 거짓말 아니잖아.”
이마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그의 사고구조는 어떻게 되어먹은걸까. 자신에게 침을 한껏 발라놓고 자기 거라고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으르렁대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걸까. 이사벨라 화이트우드 주교는 괘념치 않는 것 같았다.
“뭐, 젊은 남녀가 붙어있으면 보기 좋지요. 실비아 영지에 있는 저희 성당이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두 분이 묵을 방은 있답니다. 사제님과 수녀님들께 말씀드려 놓을 테니 편히 이용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달리아는 브리택에게 안겨있는 채로 겨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사벨라 화이트우드는 성당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브리택은 달리아를 안아든 채 성당으로 들어갔다.
안내된 방은 깨끗하고 정갈했으며, 다분히 금욕적이었다. 소박한 책상과 걸상, 그리고 침대 하나,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달리아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져놓곤 뒹굴거렸다.
“브리택, 있잖아요….”
달리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브리택은 바로 거절했다.
“싫어.”
“내, 내가 뭘 말할 줄 알고요…?”
그녀의 청회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브리택은 가만히 달리아를 바라보다가 그 곁에 누웠다. 브리택의 팔이 달리아의 가녀린 허리를 단단히 감아 끌어당겼다. 달리아는 별다른 저항없이 그의 품에 안겨들어갔다.
“내가 안고 싶을 때 안게 해 줘….”
달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의 추론은 정확해서, 달리아는 좀 장소와 경우를 가려가며 애정행각을 하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 애잔했다. 몇 년은 헤어진 연인을 끌어안는 것처럼. 아니, 사실 맞을 것이다.
“…알았어요. 그, 그 정도야 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달리아가 승낙하자, 브리택은 배시시 웃더니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부끄러우면 어때. 이렇게 좋아하는데.’
달리아도 살짝 고개를 틀어선 그의 빰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그의 목에 팔을 걸곤 끌어당겨 안았다. 뺨과 뺨이 스쳐 지나가고, 서로의 어깨에 턱을 기대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요?”
“…응.”
가끔 이럴 때를 보면 애 같기도 했다. 안아주기만 하면 다 좋대. 달리아는 노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렇게 자야겠다….”
“옷 안 갈아입고?”
“아, 맞다.”
기껏해야 이레 정도 머물다 갈 거라 짐을 완전히 풀기에는 애매했지만, 일단 그래도 옷가지는 어차피 꺼내놔야 했다. 달리아는 늘 입던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누워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브리택. 브리택은 잠을 안 자잖아요.”
“그렇지.”
“그럼…나 잘 때 뭐해요?”
브리택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추고 난 후에야 대답해주었다.
“음…너 옷매무새 좀 다듬어주고, 머리카락 빗어주고. 너 은근히 잘 때 뒤척이거든.”
“…옷매무새?”
달리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무어라 말하려는 브리택의 입술을 급히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마, 마, 말하지 마요.”
입이 틀어막힌 브리택이 고개를 끄덕였고, 달리아는 그제서야 그의 입에서 손을 뗀 채 다시 그의 품에 안겨들어갔다.
“…그래서 만날 엉켜있던 머리카락이 브리택하고 잠든 이후부터는 안 엉킨 거였네요.”
브리택의 끄덕이는 고개가 정수리로 느껴졌다. 그의 턱이 제 머리를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왠지 피곤했다. 얼른 잠들고 싶었다.
“나…잘게요, 브리택.”
“잘 자. 내 꿈 꾸고.”
자기 꿈 꾸라는 말이 왠지 빈말같진 않았다. 달리아가 속삭였다.
“…노력은 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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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 애는 어디로 갔어요?⌟
꿈 속이었다. 어린 자신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달리아는 가만히 조그마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청회색 눈망울이 유난히 초롱했다.
⌜다른 영지로 갔단다. 더 좋은 곳으로 말이지. 그러니 슬퍼하지 않을 거지, 달리아?⌟
⌜…정말요? 아무데도 안 간다고 했는데….⌟
달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발에 붉은 눈을 가졌던 소년도, 조그맣던 늑대개도 없었다. 자신의 없어진 기억을 엿보는 기분은 참 묘했다.
⌜그랬었니? 그래도 이미 가버렸는걸 어쩌겠어. 너무 낙담하지 마렴.⌟
⌜네….⌟
꿈은 거기서 끝났다. 오늘의 꿈은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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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 꿈 꿨지?”
눈을 뜨자마자 브리택이 말했다. 달리아는 그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품 안에 파고든 제 몸이, 그 하얀 목덜미와 등을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에 달라붙는 머리칼의 감촉이 별로 좋진 않았다.
“…그게.”
“내 꿈 안 꿨구나.”
“내가 꾸고 싶다고 해서 그 꿈이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브리택은 웃고 있었다. 달리아는 괜히 그의 목을 두 팔로 껴안곤 코를 부볐다. 브리택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그녀를 마주 안아주었다. 아직 커튼은 닫혀 있었고, 방은 그가 켜둔 촛불 두어 개 덕분에 희미하게 밝았다.
사실 달리아는 농담할 기분은 아니었다. 꿈 속의 내용이 무언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분명 그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맞춰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 내 꿈 안 꿔도 돼.”
사실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브리택은 그런 가벼운 농담으로라도 그녀를 진정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달리아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알았기에, 브리택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질 수 있었다.
“저번에는 다른 사람 꿈 꾼다고 엄청 화냈으면서.
“화…까진 안 냈어.”
달리아가 피식 웃어버렸다. 브리택은 달리아의 조그마한 등을 쓸어내렸다. 따듯한 손길이 뒷목부터 허리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조금만 더 해줘요.”
“뭘…?”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브리택은 그제서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등 쓰다듬어 주는 거…?”
달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택은 피식 웃으며 몇 번이고 그녀의 조그마한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달리아는 그럴 때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맺힌 응어리를 토해내듯, 조금씩 조금씩 더운 숨을 뱉어냈다.
“…브리택. 내 꿈 말인데요.”
“응.”
사실 말하기 어려웠다. 겁이 났다. 기억이 정말 사라진 채, 그냥 막연히 그렇구나 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그 기억의 파편과 흔적을 하나하나 손에 쥐는 것이 두려웠다. 날카로운 조각에 손을 베일 것만 같아서.
“아무래도…옛 기억들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