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제 손자놈은 그저께 돌아왔습니다. 왕성에서 말입니다….”
달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렇다면, 그가 한 말은 전부 진실이었다.
“저놈 뒤에는 말 그대로 수십마리의 악령이 따라오고 있었고, 미친놈처럼 말에 채찍을 때리며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저렇게 되었습니다. 반미치광이가 되어선….”
“안 미쳤어! 안 미쳤다고! 미친 건 당신들이야!”
브리택이 으르렁거리자 그는 다시 조용해졌다. 달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나를 살해하려고 한 까닭은 무엇이죠?”
“너도 머스그레이브잖아?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가 괴물이 되었는데 너라고 다르겠어? 게다가 너를 죽여달라는 청탁도 받았다고!”
엘리어트 브륜힐 대주교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셨다. 살인청탁까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지금 돈을 받고 묘지기님을 죽이려 했다는게냐?”
늙은 대주교의 눈동자에 노기가 어렸다. 안달튼 브륜힐은 잠시 멈칫했다. 제 할아버지가 노하면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런 만행을 지시했지?”
달리아도 그게 궁금했다. 사실은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이름이, 이름이, 젠장, 무슨 도르래였나….”
그런 이름을 가진, 살인청부를 넣을 만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브리택이 낮게 목소리를 울렸고, 달리아가 확인차 되물었다.
“넬시온 도르네아. 맞지요?”
“뭐야, 아는 인간새끼냐?”
안달튼의 싸가지를 묻어버린 말투에 브리택이 다시 송곳니를 드러냈다.
“혓바닥을 뜯어서 네 손에 쥐여주기 전에 입을 조심하는게 좋을 거다.”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명백히 눈앞에 실재하는 위협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방금 전에 팔과 다리를 한쪽씩 뜯어버린게 그였으니 더더욱 그럴 만 했다.
“브리택, 가서 넬시온 도르네아를 찾아서 데려와요. 여기로.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달리아의 요청에 브리택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십오 분.”
“좋아요.”
그는 마치 다이빙하듯이 성당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고, 이내 사라졌다. 달리아는 브륜힐 대주교를 향해 말했다.
“…저는 이번 사건의 뒷수습에 관해서 모든 권한을 담보로 아스포네 주교좌성당과 한 가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늙은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도는 아직도 극도로 공손했다.
“말씀하시게.”
“안달튼 브륜힐의 발언이 사실이라면…왕성 근처의 도시들이 위험해요.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이 땅을 다스리는 얀데스 왕국의 모든 도시들이 위험해질거에요. 도시의 안전에 대해서 두 배로 인력을 증가시키고, 내전상황에 준하는 수준으로 무장시켜주세요.”
“그 정도로…?”
달리아는 그 다음 말을 결단코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왕성은 무너졌어요. 저희 아버지는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로서 살아있지는 않을 거에요. 그리고 곧 악령들과의, 또 인간들끼리의…거대한 싸움이 벌어질거에요.”
달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피와도 같은 무언가가 울컥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 삼켰다. 대주교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인간들끼리의…거대한 싸움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달리아가 왼손에 든 선조의 장검을 집어넣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현왕께서…돌아가셨을테니까요.”
사람들의 수군거렸다. 그녀가 입에 더 담기 힘든 쪽은 아버지의 죽음이었겠지만, 사람들이 감히 말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쪽은 현왕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곧 암투가 벌어지고, 누군가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뜻이었다.
그 때, 성당의 그림자에서 브리택이 튀어나왔다. 그의 입가에는 사람이 하나 물려있었는데, 문제는 살아있는 채가 아니었다. 그것은 넬시온 도르네아의 시체였고, 자살한 것인지 목에는 밧줄자국이 사선으로 붉게 남아있었다.
“…달리아. 이미 죽어있었어.”
아마 영면했을 것이었다. 다시는 되살아나고 싶지 않겠지. 달리아 머스그레이브도, 자신의 처나 아들도 보기에 껄끄러울 터였다.
“잘했어, 브리택….”
안타까웠다. 그가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제 지아비를 믿지 못해 악령이 되어 황무지를 떠돌던 앨리스 도르네아와, 그런 아비라도 믿으며 죽은 다음에도 집 안에서 웅크려 있었던 그윈 도르네아가 안타까웠다.
“대주교님.”
“예, 묘지기님….”
“안달튼 브륜힐이 살인청부의 삯으로 받았다던 회중시계,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쓸 곳이 있습니다. 영혼이 되어서도 황무지의 집 안에 갇혀있던…그의 아들을 달래주고 싶어요.”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달리아는 안달튼 브륜힐의 탐욕어린 손아귀에 잡힌 회중시계를 빼앗고, 죽은 넬시온 도르네아에게는 그의 아들이 쥐고 있었던 오래된 식칼을 쥐여주었다.
‘당신이 쥐여주었겠죠…. 그윈은 이걸 죽은 다음에도 놓지 않았어요.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그들의 영혼을 찾아가 사죄하길.’
“브리택. 나는 그윈에게 갔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에요. 혹시….”
“태워줄게.”
달리아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안장 위에 올라가서 등자에 발을 고정했다. 그들이 달려나가는 것을 눈치 좋게 알아챈 성당경비병 하나가 크게 외쳤다.
“묘지기께서 나가신다! 정문까지의 길을 모두 터라!”
아스포네 주교좌성당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고, 정문까지 가는 길은 제법 지난하고 꼬불거렸다. 비록 잘 꾸며져 있긴 했지만. 아마도 외부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 분명했다.
물론 브리택에게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달리아는 안장의 주머니에서 고글을 꺼내 썼고, 브리택의 등 뒤에 바싹 몸을 붙였다. 지팡이를 안장의 가죽고리에 단단히 고정시키곤 손잡이를 꽉 잡았다.
“꼭 달라붙어 있어야 돼, 달리아.”
“…알아요.”
땅을 박찬 브리택은 마치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달려나갔다. 길이 예각으로 꺾일 때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정문까지는 말 그대로 한달음이었다.
정문은 열려있었고, 브리택은 그 문을 빠져나간 다음에야 속도를 늦추었다. 먼지구름이 일면 안되었으니까.
“…브리택?”
“응?”
달리아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빗어내리고, 고글을 벗어 안장의 가죽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
“더 빨리 달릴 수도 있어요?”
“그럼. 네가 떨어지지 않게 달린거야.”
그의 발걸음은 사뿐사뿐했다. 어느새 둘은 무형의 막을 뚫고 밖을 나왔다. 바로 뒤에 반투명하게 반짝이는 엷은 빛의 막이 보였다. 하늘 높이 기둥처럼 솟은.
“다시 황무지구만….”
“그윈만 잘 달래놓고 돌아가면 돼요, 브리택.”
하지만 브리택은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셀바 영지로 돌아가면…어떻게 할 생각이야, 달리아?”
많은 것들이 함축된 표현이었다.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가 괴물이 되었다는 안달튼의 말은 굉장히 신뢰도가 높은 증언이었다. 괴물은 곧 악령을 뜻할 것인데, 머스그레이브 일가의 묘지기 중 인간을 등지고 악령들의 편에 붙은 묘지기는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왕성 근처의 도시까지 가서, 생존한 도시들과 다른 묘지기들, 그리고 대주교님들을 만나 전선을 구축할거에요.”
그레이스톤 가문의 묘지기 중에서는 하나 있었다. 그 강력한 힘에 취해 스스로 악령이 되기를 자처한 자가. 백 년 전에 등장했던 ‘배반자’ 안토니오 그레이스톤이 그였다.
악귀는 악령을 다스리고, 악마는 악귀를 다스린다. 그는 이 땅 위의 모든 역사를 뒤져도 몇 없는 악마가 되어 인간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다.
유서깊은 묘지기 가문인 머스그레이브와 블랙리버의 가주와 그레이스톤의 차기 가주가 토벌에 앞장섰고, 다행스럽게도 사태는 십 년 만에 배반자의 영혼을 봉인하는 것으로 일단락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달리아,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가 만약에…정말 배반했다면….”
“…아버지라면, 충분히 악마가 되셨겠지요.”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대체 왜? 하지만 그것을 물으러 가봐야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악귀나 악마까지 영혼이 변질된 이의 망집은 공고해서, 제아무리 묘지기가 달래어 정화시키려 해도 통하지 않는다.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은 있었다. 애쉬튼 공작과 안달튼 브륜힐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았다. 애쉬튼 공작은 분명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가 마지막까지 악령과 대치하며 그들을 대피시켰다고 했다.
안달튼 브륜힐은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가 괴물이 되었다고 했고, 머스그레이브 저택에 도착한 악령인 ‘타죽은 공주’ 소에린 얀데홀스는 아브라함의 봉인이 붙은 마차를 깨고 나왔다.
‘하나도…앞뒤가 맞는 게 없어.’
브리택은 그녀가 고뇌에 빠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달리아, 괜찮아?”
“…별로 안 괜찮아요. 어쩌면, 아니 확실하게…아버지께 칼을 들이밀어야 하겠죠.”
머스그레이브에서 엮인 문제는 머스그레이브에서 풀어야만 한다. 그레이스톤이나 블랙리버 가문에 맡겨 해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배반자 안토니오 그레이스톤의 사태 때도 그의 아들이었던 프란시스 그레이스톤이 창을 들어 해결했다고 들었다.
“…달리아.”
“네?”
저 멀리 폐허가 된 집이 보였다. 그윈 도르네아가 숨어든 집이었다. 달리아는 품 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넬시온 도르네아의 회중시계를 꺼내들었다.
그윈 도르네아가 이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앨리스 도르네아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황무지를 떠도는 무명의 묘지기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주요 묘지기 가문으로 공동묘지를 운영하는 세 가문 이외의, 재능은 있으나 가문이 없는 묘지기들.
“네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거야.”
“…칫, 알고 있거든요?”
“그럼 다행이고.”
달리아는 잠시 긴장을 풀고 웃었다. 언제나 그는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어느새 그윈의 집에 도착했다. 달리아는 지팡이를 들고 브리택의 안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노크했다.
“…누구세요?”
그윈 도르네아의 목소리였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그에게는 더 이상 누군가를 찌를 ‘아버지의 식칼’이 없을 테니까.
“그윈 도르네아, 맞지? 아버지는…오지 못하시게 됐어. 대신 아버지의 유품을…대신 받아왔는데. 들어가도 괜찮을까…?”
어쩌면 앨리스 도르네아는 이 모든 것을 보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고 악령이 된 게 아닐까. 원념에 사로잡혀 지아비를 저주하면서, 그런 자신이 악령이 되어가자 제 아들에게도 스스로 다가가지 못하게 된….
“아버지의 물건이요…?”
“응, 네 아버지의 회중시계야. 어머니의 반지를 받았으니까…아버지의 시계도 갖고 있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천천히 문이 열렸다. 비쩍 마른 그윈 도르네아가 걸어나왔다. 브리택이 물어뜯었던 한쪽 다리는 이미 말끔하게 붙은 채였다. 역시 그는 망자의 영혼이 맞았다.
“자, 이거야.”
달리아는 싱긋 웃으며 금칠이 조금 벗겨진 회중시계를 내밀었다. 그윈 도르네아는 그것을 끌어안더니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냄새를 맡았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 얼굴에 어렸다.
“아버지….”
브리택은 괜히 딴곳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한쪽 다리를 날려버린게 은근히 찔리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데려오지 못해서 미안해, 그윈.”
소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영혼이 점차 황금색 거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웃고 있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목에는 아마도 아버지의 반지로 보이는 두텁고 푸른색 돌이 박힌 은 반지를, 손가락에는 달리아가 전해주었던 어머니의 반지를, 그 손에는 금박이 벗겨진 회중시계를 들고.
앨리스 도르네아의 영혼이 소년의 뒤로 나타난 건 그때쯤이었다.
— 정말 당신은 약속을 지켰군요.
“앨리스 도르네아….”
그녀는 아름다웠다. 달리아는 작고 아담한 자신과 달리 키가 크고 늘씬한 도르네아 부인을 보며 감탄했다. 그녀는 그윈 도르네아와 함께 황금색 빛에 감싸여선, 찬란한 빛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한 마디의 말을 남긴 채로.
— 당신 곁에, 그 충실한 늑대개 말고도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고 바래왔던 이가 하나 더 있어요.
달리아도, 브리택도 놀랄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다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미 둘의 영혼은 영면으로 그 걸음을 내딛어 순환의 물결에 합류했을 것이었다.
‘언젠가 다시 태어나면 만날 수 있기를….’
머스그레이브의 묘지기는 오래 산다. 귀족들이 오래 사는 이유와 같았다. 좋은 곳에서 좋은 것들을 먹고 사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달리아가 할머니가 되었을 즈음에는 다시 태어난 그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서로 알아보진 못하겠지만.
“…달리아, 너 바람 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