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달리아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욕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킥킥대며 웃어버렸다.
“아니, 꿈, 꿈이라니까요? 뭘 그렇게 왈칵 화를 내고 그래요?”
“아무리 꿈이라도 그렇지. 내 꿈 꿔야 하는 거 아니야?”
달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브리택은 그럼 밤마다 내 꿈 꿔요?”
“그럼.”
“…네?”
브리택은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고, 심지어 지금도 아주 당당했다. 달리아가 오히려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데?”
“아니, 저도 모른다니까요….”
달리아가 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곤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화났어요, 브리택?”
“…안 났어.”
“화난 것 같은데.”
그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달리아는 킥킥대면서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춰주었다. 털가죽이 보드라웠다. 여전히.
“이제 화 풀어요. 알았죠?”
“안 났다니까….”
“좋아요.”
저 멀리에선 바람에 섞인 망자들의 외침이 간간히 들려왔다. 달리아가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바람을 타고 온 소리일 뿐이었다.
“…긴장을 놓을 수가 없네요.”
“자주 쉬는 수밖에.”
안장에는 은촛대지팡이의 끝을 고정시킬 수 있는 홈이 있었다. 지팡이를 계속 들고 있는 것은 팔이 아프니 해둔 장치였다. 달리아는 집사의 유심한 배려에 감사했다.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반짝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밑에 그녀가 든 은촛대지팡이의 불꽃도 별을 머금은 등대의 불빛으로 메마른 땅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곳에도 많은 영혼들이 쉬지 못하고 있겠죠.”
“그렇겠지만…모든 영혼을 머스그레이브의 묘지에 들여올 수는 없으니까.”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스그레이브 묘지에 아직 자리가 조금 남아있긴 했지만, 이제 정말로 위험한 영혼들을 위해 남겨두어야 했다. 세심하게 달래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악령으로 뒤바뀔 만한 영혼들을 위해.
“그건 그렇죠….”
달리아가 씁쓸하게 그의 말을 긍정했다. 이 황무지의 돌부리에 깃든 그림자 하나 하나마다 까만 것들이 작게 고개를 들이밀다가, 달리아가 들어올린 은촛대지팡이의 포근한 빛에 하얗게 물들면서 다시 땅 속으로 돌아갔다.
“이 땅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글쎄….”
얀데스 법국. 얀데홀스 법왕가. 얀데노르 왕성. 이 저주가 이곳을 덮어쓴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었고, 사실 그 누구도 제대로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모두가 해결하기를 포기한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무사하실까요?”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왠지 브리택과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 사이에는 별로 좋지 못한 일이 있는 것만 같았다. 달리아는 그에게 아버지에 관한 것들을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브리택은…저희 아버지를 잘 알고 있나봐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뭔가 분명히 좋지 못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달리아는 어깨를 으쓱이곤 손잡이를 놓았다. 더 이상 주변에 이상한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금은…안전해졌나.’
달리아는 은촛대지팡이의 밀랍초를 손끝으로 네 번 두드리곤 안장에 매달아선 세워두었다. 이제 잠시 동안은 그녀가 지팡이를 쥐지 않아도 불이 꺼지지 않을 터였다.
“브리택.”
“응?”
브리택은 그녀가 제 목을 다시 와락 끌어안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흐뭇한 미소밖에 지어지지 않았다. 제 등에 달리아의 상체가 닿는 보드랍고 따뜻한 감촉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가 달리고 있었더라면 바로 발이 꼬였을 터였다.
“설레요?”
“…그래.”
그는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야 대답했다. 달리아의 얼굴도 조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브리택은 좋겠다. 늑대개 모습이면 얼굴 붉어지고 귀 빨개지는 것도 안 들켜서.”
“너도 내 뒤에 타고 있을 때는 그렇잖아?”
“그건…그건 그렇네요.”
달리아의 웃음소리가 브리택의 커다란 귓가를 간질였다. 달리아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줬다. 어차피 이런다고 해서 그의 목이 졸릴 리는 없….
“달리아, 숨막혀.”
“…에.”
“장난이야.”
“…브리택!”
…그의 목이 졸릴 리는 없었다. 달리아는 괜히 좀 더 브리택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고, 그는 여전히 끄떡도 없었다.
“그셀바까지는 얼마나 걸리는거야?”
“글쎄요…한 나흘은 가야 할 거에요. 물론 브리택이 달음질을 한다면 두 배는 더 짧아지겠지만, 그건 위험해요.”
브리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네가 들고 켜고 있는 불빛은 괜찮은거야?”
“이건 괜찮아요. 영혼들을 달래는 묘지기의 촛불이거든요. 마치…영면을 향한 길을 비추어주는 등잔불 같은 거에요.”
그녀의 말은 참으로 진실이어서, 조그마한 영혼들이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일정 반경 안쪽으로는 다가오지 않고, 주변을 빙빙 돌면서 따뜻한 불꽃을 한껏 쬐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실은 가끔씩 나와서 이렇게 주변의 영혼들도 달래주어야 해요. 악령으로 변해가는 영혼들은 어쩔 수 없이….”
“…부숴야 한다는 거지?”
“맞아요.”
사실 ‘부순다’보단 ‘다시 죽인다’가 더 올바른 말이었지만, 브리택도 달리아도 차마 그 말을 쓸 수는 없었다.
죽어서도 깨어나는 이 망자들의 영혼은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다시 죽여버린다니, 그건 차마 입으로 쉬이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한 번 악령이 되면 달랠 수는 없는거야?”
“할…수는 있어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망이나 집념이 뭔지 알면요.”
그걸 알아내는 것이 요원한 일이었다. 묻히러 온 사람이 죽기 전에 대한 신상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머스그레이브 일가의 묘지기들도 다루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기에 저택의 지하감옥이 있는 것이다.
“다만 검게 비틀어 말라버리는 외모를 보자면…생전 처음 보는 악령을 누군지 알아내고 달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브리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내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날 잘 달래주고 있잖아?”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도 머스그레이브 공동묘지에 묻힌 망자의 영혼이었다.
“…어, 그게 그렇게 돼요?”
“그럼.”
“제가 뭘…어떻게 달래주고 있는데요? 아니 그 이전에 브리택의 이루지 못한 소망이 뭐였는데요?”
브리택이 빙긋 웃었다. 그리곤 또렷하게 말했다.
“너를 마음껏 사랑해보는 거.”
“…아, 진짜. 또 그런다.”
달리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곤 괜히 그의 뒷목을 꼬집었다. 브리택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말을 덧붙였다.
“진짜야. 너도…기억이 되살아나면 알게 될 거야. 내가 지금 악령이 되지 않고 있는 건 정말 달리아 오로지 너 하나 덕분이야.”
“…내가 뭘 그렇게 많이 해줬다고….”
브리택은 그 이유를 그셀바에 도착할 때까지 말할 수도 있었다.
“네가 날 안아주잖아. 내가 널 안아줄 수 있고. 밤마다 네 침대 위에서 널 껴안고 있는데다,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도 있고, 게다가….”
“…아아악!”
달리아가 귀를 틀어막곤 다시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영혼 몇이 화들짝 놀라 도망갔다.
“그, 그만해요, 당장.”
“부끄러워하는거야?”
그는 즐거워보였다. 목소리에서부터 즐거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달리아는 또 당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 그런 말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면 좋아요? 막 재미있고 그래요?”
“아니. 달리아가 좋아.”
“흐아악….”
손가락이 다 오글거려선 손잡이에서 손을 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달리아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 남자, 어디까지 느끼해지려는거야.
“방금…브리택 진짜 너무…느끼했어요.”
“참고 견뎌.”
“…뭘 참고 견뎌요!”
브리택은 완전히 킬킬대며 웃고 있었고, 달리아도 바르르 떨다 결국은 웃어버렸다. 그리고 풀썩 앞으로 몸을 기대선 그를 꼭 껴안았다.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요?”
“내가 그렇게 되게 만들거야.”
달리아가 가만히 머리를 굴리다 질문했다.
“…어떻게요?”
“사랑해.”
또 걸렸다. 달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걸 어떻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웃게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정답이었다. 달리아는 손가락을 세워선 그의 목을 간질였다.
“달리아, 나 간지럼 안 타는데.”
“으윽,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달리아가 팔을 축 늘어뜨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브리택이 킬킬대며 웃었다. 달리아는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황무지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하늘이 참 맑네.”
“…그러게요.”
인간이 없는 땅 위의 하늘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히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멀리서 묵직하고 커다란 발굽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브리택, 들려요?”
“이건…소 발굽 소리 비슷한데.”
그의 말은 옳았다. 달리아는 급하게 은촛대지팡이를 다시 오른손으로 잡았다. 은으로 만든 촛대 부분을 왼손 손톱으로 가볍게 튕기자, 맑은 소리와 함께 새하얗던 촛불이 횃불처럼 커졌다.
오른쪽이었다. 오른쪽 저 멀리에서, 바짝 말라 비틀어진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브리택, 우리가…호흡을 맞춰 본 적이 없었죠?”
“걱정 마. 맞을거야.”
놀랍게도 그의 말에 믿음이 갔다. 달리아는 싱긋 웃었다. 브리택이 앞발을 한 번 구르자, 달빛에 비추어진 그의 그림자에서 새카만 가시나무가 잔뜩 뻗어나왔다.
‘…가시나무?’
달리아는 등 뒤의 칼을 뽑아들었다. 깔고 앉은 안장의 등자에 발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지금 브리택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지막하게 칼날에 새겨진 약속된 주문을 외었고, 선조의 장검은 은은한 빛을 뿌렸다.
“달리아, 준비는 끝났어?”
“…네.”
저 멀리 다가오는 녀석은 하반신에 비쩍 마른 검은 다리를 네 개나 가지고 있었다. 팔은 없었고, 상체는 사람의 몸에, 머리에는 몸 전체만한 길이의 기다란 뿔이 한 쌍이나 돋아있었다.
그 눈빛이 한없이 붉게 빛났다.
“정말…기괴하게 생긴 녀석들이 많군.”
“다 사연이 있어서 그래요. 예를 들면 소가 모는 마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려 했지만, 소의 뿔에 팔이 받히면서 아이도 죽고 본인도 죽었다던가….”
물론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묘지에 묻힌 수십 수백명의 사연을 외워가며 영혼들을 달래다보면, 악령들의 생김새만 보고도 얽힌 비사를 어느정도는 유추해낼 수 있었다.
“확실해?”
“…아니니까 칼을 뽑았죠.”
브리택이 땅을 박찼다. 달리아는 왼손의 장검을 겨누었다.
“내가 발을 묶을테니, 한 번에 찌르고 지나가는거야. 알았지, 달리아!”
“알았어요!”
저 멀리 밤하늘을 배경으로 악령이 발굽 소리에 박차를 가하며 다가왔다. 녀석은 고개를 깊게 숙이곤 던져진 투창처럼 달려왔다. 달리아는 깊게 심호흡했다.
묘지기의 업을 짊어지게 된 순간부터 연습한 게 장검이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하라 해서 했다. 해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장검을 다루는 솜씨는 꽤 훌륭했다.
‘할 수…있어…!’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고, 뻗어나간 브리택의 그림자 가시가 녀석의 앞다리 무릎을 박살냈다. 악령의 뿔이 궤적을 잃고 옆으로 빗겨나갔고, 달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달리아!”
브리택이 아슬아슬하게 악령의 옆으로 지나가며 외쳤고, 달리아는 장검을 옆으로 크게 휘둘러 녀석을 가로로 길게 베었다. 브리택은 바로 뒤를 돌았다. 달리던 힘 때문에 조금은 뒤로 밀렸지만, 방향은 바로 바꿀 수 있었다.
— 내 아이… 내 아이….
악령이 쓰려져 비틀거리고 있었다. 달리아는 장검에 묻은 새까만 피를 털어내곤 칼집에 넣었다.
“…아무래도 달리아, 네 예상이 반쯤은 맞는 모양인데.”
“그러게요.”
— 달리는 것들… 모두 죽여야… 내 아이… 내 아이….
달리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검을 집어넣곤 벨트의 고리를 풀고 안장에서 내려왔다.
“달리아, 위험—.”
“—괜찮아요.”
달리아가 브리택의 말을 끊었다. 은촛대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촛대의 불꽃이 횃불처럼 타올랐다.
“그대, 망집에 사로잡힌 영혼이여. 머스그레이브의 묘지기가 이야기를 들어주러 왔습니다. 부디 나의 칼을 용서해주세요.”
쓰러져 헐떡이는 악령의 붉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배어나왔다. 검게 얽은 뺨거죽을 타고 흘렀다. 쉬고 메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 내 아이, 불쌍한…내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