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
11화
“달리아. 일어나.”
달리아는 자신을 깨우는 브리택의 목을 끌어안곤 속삭였다.
“…오늘인거죠?”
그 7일동안 둘은 하루를 빠뜨리지 않고 센드릭 언덕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코펠티아 할머니에게 손녀딸 곧 돌아올테니 편히 주무시고 계시라고 전해드리고, 사탕을 달라던 아이의 영혼에게 한 바구니의 사탕을 묘비 앞에 놓아주었다.
“오늘이야.”
이제 가야했다. 그는 코트걸이에서 코트를 꺼내 입었고, 먼저 방을 나가주었다. 달리아는 옷을 갈아입었다. 장롱 앞에 놓아둔 짐꾸러미는 그가 들고 나간 것 같았다.
달리아는 끝이 헤진 검은 양털 망토를 몸에 두르고, 선조의 장검을 등에 메었다. 오른손에는 은촛대지팡이를 들었다.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머스그레이브 공동묘지가 멀리 보였다.
‘…가자.’
답을 찾으러 가야만 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한 답, 그리고 이 사태를 해결할 답. 아무래도 그것이 달리아의 인생을 열어젖힐 열쇠가 될 것이었다.
방문을 열자 브리택이 이미 늑대개의 모습으로 복도에 웅크려 있었다.
“…먼저 나가있으려는 거 아니었어요?”
“같이 내려가고 싶어서.”
그는 그 입에 달리아의 가죽가방을 물곤, 달리아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집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시종들이 그의 등 위에 얹을 수제 안장과 양쪽에 실을 짐가방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가십니까, 아가씨.”
“…네.”
“마지막으로 선조분들께 인사 올리고 가셔야 한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택은 얌전히 시종들의 손길을 받았다. 새까만 가죽끈은 얇은 가죽을 세 갈래로 땋아 어지간하면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소의 머리뼈로 틀을 짠 안장은 가볍고 튼튼했다. 덮어씌운 건 질기고도 보드라운 송아지 가죽이었다.
“많이 무거워요, 브리택?”
“아니. 괜찮아.”
달리아는 폴썩 쪼그려 앉아선 양손으로 그의 뺨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그의 털은 언제 만져도 보드라웠다.
“브리택 군이 고삐를 좋아하진 않을 것 같아서, 안장을 튼튼히 고정하는 대신 손잡이를 달아뒀습니다.”
집사가 가죽으로 감싼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달리아가 그걸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집사님.”
“…꼭 가셔야겠습니까, 아가씨?”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브리택의 안장에는 양쪽으로 말린 식량과 물, 보드카와 침낭 같은 것들이 가득 담긴 짐가방이 매달렸다. 브리택이 물고 온 그녀의 가죽가방은 안장 뒤쪽에 고정되었다.
“브리택, 가요.”
“다시 지하계단인가?”
“맞아요.”
달리아는 등 뒤에서 선조의 장검을 뽑아들었다. 일주일 동안 장서관의 책들을 뒤져보았는데, 그것은 강철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악령으로 되살아난 망자의 뼈를 깎아서 은을 발라 만든 물건이었다.
‘유난히 가볍다 했어.’
둘은 지하계단을 익숙하게 내려갔다. 지하통로의 분위기는 왠지 조금 더 서늘했다. 달리아는 선조들의 영혼이 모여있는 금촛대 공동의 문 앞에서 고했다.
“여든 한 번째로 책무를 짊어진 머스그레이브의 묘지기, 달리아 머스그레이브가 밖의 원한들을 달래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나려 합니다.”
문이 아주 살짝 열렸다. 저 안에 빛나고 있는 금촛대만이 겨우 보였다. 목소리는 바로 들려왔다. 수십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 일흔 아홉의 의무를 자처한 죽음 이후의 선조들은, 여든 한 번째의 책무를 짊어진 작고 부족한 후손의 청을 들었노라. 머스그레이브는 그대, 의무자 달리아 머스그레이브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의 비호 아래 안전할 것이다.
달리아가 고개를 조아렸다. 브리택도 가만히 몸을 낮추었다.
“선조분들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문은 천천히 닫혔고, 낮은 소리가 났다. 달리아는 왼쪽을 바라보았다.
“…한 바퀴 돌고 가요, 브리택.”
“…그냥 가면 안될까?”
그는 아직 먹힌 왕자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의 팔에 밤마다 새겨지는 얇은 상처를 알고 있었다. 같은 자리를 계속 긁혀왔기에 가는 흉터마저 남아있었다.
“그래도요.”
“…그래.”
달리아는 한 번도 낮에 이곳을 걸은 적이 없었다. 손가락에 못이 튀어나온 여인은 언제나처럼 기괴한 소리를 냈고, 달리아와 브리택은 어렵지 않게 신경을 끄고 지나갔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먹힌 왕자의 군마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달리아는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고, 등 뒤의 장검을 뽑아들었다. 곧 먹힌 왕자의 방이었다.
“…어디 갔지?”
평소였다면 칼날같은 긴 손가락으로 창살을 붙잡고, 그녀를 불렀어야 했다. 달리아는 은촛대지팡이를 앞으로 쭉 내밀곤 빈 방의 창살 너머를 비추며 나아갔다.
“…왕자님?”
브리택은 털을 곤두세우고 이빨을 드러낸 채로 달리아의 옆을 지켰다. 방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지팡이의 불빛으로 환히 비추어진 반대쪽 벽에, 그가 칼날같은 손가락으로 긁어 쓴 글씨가 보였다.
⌜도흘린 얀데홀스는 소망을 이루는 법을 찾아냈노라.⌟
브리택과 달리아는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름이 도흘린 얀데홀스셨군.”
브리택이 중얼거렸다.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저도 몰랐는데. 언제쯤 돌아가신 왕자님이었을까요…. 묘지 명부에도 도흘린 얀데홀스라는 이름은 찾아보지 못했었거든요. 기록이 누락된 모양이에요.”
“그런 걸 보면 굉장히 오래 전의 사람이 아니셨을까?”
“…그렇겠죠?”
달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튼 다 잘됐네요. 왕자님은 아무래도 편안한 영면에 드신 것 같고, 저는 더 이상 팔에 피를 안 흘려도 되고.”
“어차피 오늘 떠나야 할 거였잖아.”
브리택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그래요.”
달리아가 피식 웃어버리곤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바퀴 도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달리아와 브리택은 계단 입구를 지키는 두 개의 횃불에 다시 은촛대의 불꽃을 옮겨붙이곤 올라왔다.
오코넬 로빈슨 집사가 시종들과 함께 로비에 서 있었다.
“이걸 가져가십시오.”
그가 내민 것은 가죽 벨트였다. 브리택의 안장에 걸 수 있는 강철 고리부터,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한 조그마한 투척용 단도 세 개, 부싯돌 같은 잡다하고도 긴급히 필요할 법한 것들이 단단히 바느질된 까만 가죽 주머니로 붙어 있었다.
“이런 건 부탁한 적도 없는데…고마워요.”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그가 허리를 굽히자, 다른 시종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집사님. 별 탈 없이 다녀올게요.”
“…물은 아껴드시고, 반드시 중간중간에 다른 마을들과 도시들을 충분히 들르십시오. 금화와 보석을 충분히 챙겨드렸습니다. 필요한 물건들은 넉넉히 구입하실 수 있을 테니, 최대한, 최대한 안전하게 다녀오셔야 합니다.”
브리택이 달리아의 앞을 가로막곤 말을 끊었다.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내가 알아서 챙길테니.”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집사는 그에게도 허리를 굽혔다. 브리택은 그런 대우가 별로 편하진 않았는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달리아가 그런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거듭된 배웅을 거쳐, 달리아는 브리택의 등 뒤에 올라탔다. 안장에는 조그마한 주머니들이 곳곳에 있었다.
비가 내릴까 지도를 넣어놓은 가죽주머니는 기름을 발라 방수처리를 해 두었고, 밖은 먼지가 가득하기에 나무로 틀을 잡고 유리를 끼워 가죽으로 감싼 고글도 있었다. 나침반과 회중시계는 언제든지 볼 수 있게 아예 안장의 앞쪽 가운데에 끼워져 있었다.
“갈까요, 브리택?”
브리택은 대답 대신 몸을 한 번 가볍게 흔들었다. 달리아가 가죽으로 감싸인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오코넬 로빈슨 집사가 준 벨트를 차곤 안장의 고리와 결합했다. 그의 발이 땅을 박찼고, 달리아는 마치 앞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몰아치는 바람에 급히 고글을 꺼내어 썼다.
“꽉 잡아.”
“안 그래도 꽉 잡고 있어요!”
폭풍같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순식간에 머스그레이브 가문의 자랑인 통짜 은으로 만든 대문을 지났고, 노랗게 말라붙은 거리로 나왔다. 저 멀리에는 희미하게 빛의 기둥들이 보였다. 아주 멀리 있고, 아주 높게 솟아선 마치 실처럼 보였다.
“브리택, 저거 보여요?”
“저 빛의 기둥들?”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게…저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도시들이에요. 도시에 계신 대주교님들이 친 결계인거죠.”
“…그럼 머스그레이브 영지도?”
“맞아요. 저렇게 보일거에요. 색은 저런 흰색이 아니겠지만. 조금만 더 달려서 완전히 영지를 벗어나면 우리 영지를 둘러싼 결계도 볼 수 있을거에요.”
브리택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그가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주변 풍경이 더 빠르게 지나갔다. 달리아는 손잡이를 잡고 몸을 한껏 숙여선 그의 등에 상체를 바싹 붙였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조금 속도에 익숙해졌어?”
브리택이 제 등에 닿는 그녀의 체온을 느끼곤 물었다. 사실 그는 발이 꼬일 뻔한 것을 방금 겨우 면했었다. 갑작스레 달리아의 상체가 제 등에 닿는 경험은 사실 처음이었다. 달리아는 한 번도 그를 뒤에서 껴안아준 적이 없었으니까.
“익숙해졌어요. 확실히.”
“그럼 조금 더 속도를 내볼까?”
“…네?”
달리아가 당황했다. 이게 최고 속도가 아니라고? 이미 저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활공속도보다 브리택의 달음박질이 더 빨랐다. 그가 땅을 한 번 더 거세게 박차자, 지금껏 고요하기만 했던 안장이 느릿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 여파는 컸다. 매서운 바람이 귓가를 쏜살처럼 스치고, 뒤를 살짝 돌아보자 마치 말이 네 마리는 달리고 있는 것처럼 엄청난 먼지구름이 길게 일어나고 있었다.
“…굉장해요. 허리는 안 아파요…?”
그의 허리 위에 얹힌 게 이 안장과 짐가방 세 개에 달리아의 몸무게였다.
“전혀. 끄떡도 없으니까 걱정 마.”
달리아가 한쪽 손잡이를 놓곤 그의 목을 어루만져주었다. 저 앞에 야트막하게 쳐진 울타리가 보였다. 붉은 끈으로 얼기설기 묶인 것이었다.
“브리택, 저 결계울타리는 출입구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뛰어넘어야 해요. 알았죠?”
“달라붙어만 있어.”
달리아가 피식 웃었다. 이윽고 그가 다리를 잔뜩 오므린 상태로 바닥에 닿았다가, 그대로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달리아의 얼굴에서 금새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너무 높았다.
“…아악!”
다 큰 성인 남성 키의 다섯 배는 될 법한 높이였다. 달리아는 바르르 떨면서 브리택의 등에 완전히 달라붙었다. 문제는 떨어질 때였다. 오금이 오싹해지면서 추락의 서늘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아아아아아!”
브리택은 방금 솜을 갓 채운 쿠션처럼 부드럽게 땅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멈춰섰다.
“…달리아?”
“…아무것도 못 들은거에요.”
달리아는 얼굴이 빨개져있었다. 마구 소리를 질렀던 방금 전까지의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쪽팔렸다.
“아니, 다 들었는데.”
“모, 못 들은 걸로 해요!”
브리택이 킬킬대며 웃었다. 그리곤 방금 넘어와서야 보이기 시작한 연보라색의 결계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한 결계라는 거, 이거구나.”
마치 커다란 기둥처럼 저 멀리 하늘 높은 곳까지 솟아 있었다. 어디가 그 높이의 끝인지는 알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었다.
“맞아요. 머스그레이브의 선조들께서 힘써주고 계세요. 우리는 보랏빛이고, 어디에서든 이 보랏빛을 보고 찾아올 수 있어요.”
“…그건 좋군.”
“황무지의 망자들도요.”
브리택의 표정이 굳었다. 달리아는 안장의 등자에 부츠를 넣곤 단단히 밟았다. 가죽 고리에 단단히 고정해 둔 지팡이와 등 뒤에 걸린 선조의 장검을 뽑아들었다.
“지금부터는 마냥 빠르게 뛰어가선 안돼요, 브리택. 먼지구름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경로의 모든 망자들에게 알릴 거에요. 그들은 비록 말 몇 마디와 자그마한 따스함으로 달래어질수도 있지만….”
저 멀리에서 기괴하고도 굵직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악령이나 악귀, 혹은 악귀마저도 지나서 악마가 되어버린 것들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