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브리택은 알았다고 고개는 끄덕여놓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새까만 말이 괴물같은 속도로 달리아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대로 치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그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괴물 말이 달리아에게 달려들었다. 달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 울렸다. 그녀는 눈을 한 순간도 감지 않고 있었다.
“—그대의 악을 미워하노라!”
부러진 장검에 새겨진 알 수 없는 옛 문자에 빛이 차올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은촛대지팡이의 불빛처럼 따스하고 새하얀 빛이 부러진 끝에서 솟았다.
달리아는 망설임 없이 팔을 길게 뻗어 칼을 내질렀다. 환한 빛으로 만들어진 날의 끝이 괴물 말의 몸에 닿자, 그 말은 그저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허무하게, 더없이 허무하게.
“…나 양손잡이인거 혹시 기억해요, 브리택?”
달리아가 검을 휘둘러 연기를 흩어버리며 물었다. 브리택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새 칼날이 나오진 않았어요. 그래서 더 무서웠고….”
그럴 만 했다. 더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요.”
달리아의 칼에서는 이내 빛이 스러졌고, 놀랍게도 장검의 날은 마치 새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그 날에 새겨진 문자는 그녀가 외쳤던 약속된 주문 그대로였다.
그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대의 악을 미워하노라.
“저 군마는… 이곳에 갇힌 한 왕자의 말이에요. 아버지께서 죽은 왕자의 악해진 영혼을 이곳에 모실 때, 그의 말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묘지기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한 번씩 나타나요.”
“왕자?”
“깊게 물어보지 마요. 나도 사실 ‘먹힌 왕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저 말은 왕자께서 돌아가실 때 땅에 꽂힌 창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해요.”
브리택은 그제서야 그 말이 왜 장검을 겨눈 달리아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달리아는 걸음을 재촉했다. 왼손에는 여전이 장검이 들려있었고, 오른손에는 은촛대지팡이로 앞을 밝혔다.
“…조용히. 쉿. 곧 먹힌 왕자의 앞이에요.”
브리택은 그제서야 왜 그 이름이 먹힌 왕자인지 알 수 있었다. 달리아가 오른쪽을 비추자, 유난히 넓은 감옥 안에서 반쯤 녹은 왕관을 쓴 남자가 기괴하게 말라비틀어진 검은 몸을 일으켰다. 방금 흘린 피처럼 붉은 눈동자였다.
그 손가락은 길고 날카로운 칼날이었고, 몸 곳곳은 무언가에 먹힌 것처럼 패여있었다.
— 왔는가, 묘지기여….
쉰 목소리였다. 브리택은 온몸의 털이 삐죽 솟는 것을 느꼈다. 달리아는 검은 왕좌터의 선왕 얀데홀스 4세를 만났을 그 때처럼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왕자시여.”
— 이리로 오게….
달리아는 뒤를 돌아 브리택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오지 말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는 브리택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가버렸다. 먹힌 왕자는 쇠창살 가까이 다가왔고, 그 칼날 같은 손가락 끝으로 달리아가 소매를 걷고 내민 하얗고 여린 팔뚝을 가볍게 긁었다.
“…으.”
한 줄기 피가 얇게 흘러내렸다. 달리아의 손은 어느새 창살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팔에서 흐르는 핏줄기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 고여 똑, 떨어졌다. 먹힌 왕자는 그 피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긴 혀를 내밀어 받아먹었다.
— 만족스러워….
“저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사람같지도 않게 뒤틀어진 그 머리를 끄덕이곤, 방 안쪽의 깊은 곳까지 조용히 들어갔다. 달리아의 은촛대지팡이로도 그가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방이었다.
“브, 브리택….”
브리택은 그녀의 애처로운 부름에 바로 자리를 박찼다. 눈 깜박할 사이에 주저앉은 그녀의 곁에 와선, 살짝 긁힌 달리아의 상처를 혀로 핥아주었다. 피는 금새 멈추었다.
“괜찮아?”
“…네.”
“…대체 저건 뭐야?”
달리아가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통로의 가운데로 걸어가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영혼들 중에서 그 유래를 알지 못하는 몇 안되는 분들 중 하나에요. 이 방법도 아버지가 알려주신거고…다른 걸 원하시진 않아요. 그저 피 한 방울이면 만족하시거든요….”
브리택이 눈살을 찌푸렸다. 달리아는 걷었던 블라우스 소매를 다시 내리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 펴요. 난 정말 괜찮다니까요?”
“…빨리 나가기나 하자.”
그는 이 공간 자체가 탐탁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별 일이 있진 않았다. 여전히 쇠창살로 가로막힌 방 안에는 지네의 꼬리를 가진 대왕파리나, 뱀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마냥 기괴하게 생긴 것들이 가득했다.
“…이걸 악령이라 불러야 하나?”
“사실…악령을 넘어서 악귀나 악마라고 해야 할 만한 것들도 있어요.”
머스그레이브 저택의 지하는 말 그대로 되살아나는 망자들 중에서도 결코 되살아나면 안되는 것들이 갇혀 있는 셈이었다.
이 긴 여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다시 그들의 눈앞에 계단의 앞에 걸렸던 횃불과 금촛대 공동의 까만 나무 문이 보였다.
“…브리택.”
“응?”
“나가서 다시 침실로 가면, 나 안아줄 거에요?”
브리택이 싱긋 웃었다.
“싫다고 해도.”
“그건…좀 괜찮네요.”
달리아는 두 횃불의 불을 입으로 불어 끄곤, 제 은촛대지팡이의 불꽃으로 다시 불을 붙였다. 그러자 지하통로 전체의 스산함이 아주 조금은 더 사그라들었다.
“…당신과 만나면서 좀 많은 게 바뀐 거 같아요.”
달리아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묘지기들은 수많은 망자들의 운명을 달래는 직업이었고, 묘지기 본인의 운명이 또다른 누군가와 강하게 얽힐수록 그 힘이 강해졌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은 묘지기견과 행하는 의무의 동반자 서약이었다.
“그야, 내가 널 그 누구보다 사랑하니까.”
“…흐윽, 제발요. 안부끄러워요, 그 말? 막, 막,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그러지 않아요?”
달리아가 파르르 떨었다.
“나 사랑한다고 안 해 줄거야?”
“아, 아, 아직이거든요?!”
달리아는 제 발갛게 달아오른 귀가 들킬까 급하게 먼저 계단을 올라가버렸고, 브리택은 킬킬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달리아가 계단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그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선 달리아를 껴안았다.
달리아는 제 등으로 그의 가슴에서부터 울려 전해지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꼈다. 그대로 굳어선, 가만히 그의 팔에 제 허리를 내주었다. 그의 코가 제 오른쪽 목덜미에 파묻혀선, 가만히 그 향을 들이마셨다.
“…달리아.”
“왜, 왜, 왜 자꾸 불러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알고 있었다. 달리아는 괜히 벌써부터 설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지만, 그래도 마음은 설레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사랑해.”
“…알고 있어요.”
부러 퉁명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그는 제 목덜미에 진하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하지만 달리아는 몸을 빼내지 않았다. 도리어 몸을 반 바퀴 돌려선, 칼과 지팡이를 좁은 계단의 양쪽 벽에 기대놓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달리아?”
브리택은 그녀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앞머리에 가려선 그늘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아는 그의 목을 끌어안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작고 보드라운 붉은 입술이 가볍게 포개어졌다.
“…!”
달리아의 가냘픈 팔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한 행동에 스스로도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곧 둘의 눈동자가 마주했다.
브리택의 눈동자에는 기쁨과 슬픔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달리아는 눈을 꼭 감아버렸고,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과 머리를 붙잡았다.
브리택이 가볍게 달리아의 입술을 깨물어 열었고, 그녀의 조그마한 입 안에 그의 혀가 부드럽게 밀려들어왔다. 그는 달리아의 조그마한 입 안을 가볍게 훑어 맛보곤,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달리아의 팔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질끈 감은 눈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브리택이 그녀를 놓아주자, 달리아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다, 달리아…!”
브리택이 겨우 그녀를 붙잡아 자신에게 기대어놓았다.
“…이, 이런 거 처음이에요.”
달리아의 숨이 조금은 가빠져있었다. 브리택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달리아가 결국 한 마디 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무 자주…하진 말아요.”
브리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달리아는 그제서야 제 풀린 다리가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을 느꼈다.
“많이 놀랐어?”
“…네.”
그녀의 뺨에는 아직도 홍조가 가득했다. 달리아는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곤 툴툴거렸다. 브리택은 그런 그녀가 그저 귀여웠다.
“뭐, 뭘 그렇게 봐요.”
“예뻐서.”
달리아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곤, 갑옷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도망갔다. 그리곤 제 왼손의 검을 다시 칼집에 꽂아놓았다.
“진짜, 진짜 자꾸 그럴거에요?”
“예쁜걸 어떡해.”
“아악!”
달리아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곤 먼저 침실로 도망가버렸다. 브리택은 킬킬대며 웃다가 늑대개의 모습으로 변해선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았다.
“같이 안 가?”
“…그, 그 말 안하면요.”
“예쁘다는 거?”
“흐악.”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뛸 힘이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그의 고백을 계속 듣는 수밖에. 브리택은 침실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달리아에게 예쁘다는 말을 거듭했고, 달리아는 결국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어던지곤 이불을 뒤집어 썼다.
“으윽, 으악, 그만….”
“옷 안 갈아입어? 우리 예쁜…읍.”
달리아가 이불을 박차곤 제 옆에서 그 말을 속삭이는 브리택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버렸다. 얼굴이 온통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 옷 갈아입을 테니까, 그 말 하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있어요.”
입이 막혀선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서야 달리아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야 양말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도 벌써 코트와 구두를 벗어놓은 상태였다.
“이리와, 달리아.”
달리아는 몸을 잠시 움츠린 채로 주저앉아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곤 그의 팔에 머리를 뉘였다.
“…제가 이러고 있는 걸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보면 경을 치실 거에요.”
“오코넬 집사가 봐도 경을 치지 않을까?”
“…그걸 위로라고 해요?”
목까지 단추를 꼭 붙잡아 채우는 달리아의 블라우스와는 달리, 그녀의 잠옷은 편안함을 위해서인지 어느정도 깊게 라인이 파여있었다. 그래서 옆으로 돌아누운 달리아의 쇄골이 환히 드러났다.
솔직히, 브리택은 유혹을 잠시 참지 못했다.
“브, 브리택, 자, 잠시만, 흐윽….”
브리택의 머리가 그녀의 턱 밑을 파고들었다. 그가 그녀의 쇄골 사이에 입을 맞추었다. 달리아의 작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제서야 브리택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다.
“…미안.”
“…어, 얼른 거기서 얼굴 치워요.”
그는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서, 이번에는 달리아를 제 품 안으로 쏙 끌어안았다. 달리아는 뭐라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 따듯한 품 속에 안겨 있자니 화가 사르르 녹아내려선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왜 화가 안 나는지 모르겠어요.”
달리아가 투덜거렸다. 그리곤 가만히 그의 등으로 손을 뻗어선 마주 끌어안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가 널 사랑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 아닐까.”
“…그게 뭔데요?”
달리아가 감던 눈을 뜨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브리택이 조용히 속삭였다.
“나도 몰라.”
“…에?”
달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브리택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한 번 입을 맞춘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갑자기 사랑에 빠졌거든. 첫눈에. 네가 너무 아름다웠고, 찬란했고, 예쁘고, 매력적…흐읍.”
달리아가 다시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것이었다.
“조, 조, 조용히 잠이나 자요.”
브리택이 킬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는 그제서야 그의 입에서 손바닥을 치워주었다. 그는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달리아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흐읍.”
결국 달리아는 체념하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브리택은 입술을 떨어뜨린 후에도 그녀를 깊게 끌어안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싱그러운 흙 냄새가 가득 감돌았다. 편안했다. 그리고 설렜다.
‘…이게 뭐야. 하루만에 기억도 안 나는 남자랑….’
뭔가 제대로 빠져들어버린 것 같았다. 혼자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그에게. 그리고 이 모든 게 싫지 않았다. 사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은 설레었다.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