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가 아마 20~21살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 두 녀석과 제 동생, 그리고 저 이렇게 넷이서 고향이 충무인데도 더구나 저는 한산도에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세계 해전사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룩한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의 장수들, 이름 모를 수많은 병졸들과 백성들의 혼이 서린 제승당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누가 이곳에 대해 물어봐도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 그날 점심 무렵 친구들과 충무시-그 당시에는 아직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지 않았음-여객선 터미널 대합실 옆 한 귀퉁이에 있던 아주 작은 선술집에서 낮술 한잔하다 의기투합해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내린 결정이라 여객선을 타지 않고 제일 먼저 출발하는 유람선을 탔던 우리들은 객실 안에만 있자니 다소 답답하긴 했으나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푸른 바다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지는 초록빛 섬들에 마음을 뺏겨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옮겨 다니다 보니 어느새 우리를 태운 배는 거북 등대를 지나 선착장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듣던 대로 지형이 예사롭지 않은 게 바다가 뭍 안으로 들어와 있어 배가 정박하기 좋은 곳이었고,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에도 더 할 나위 없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사당이라 그런지 크게 특별한 것은 없이 장군님 영정사진만 모셔놓고 있었는데 하다못해 거북선 모형이라도 하나 갖다놓지 싶은 게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활용은 커녕 그냥 방치하는 것만 같아 무척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인상 깊었던 건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활쏘기 연습을 했던 곳이었는데 수군이라 배 위에서 적을 향해 활을 쏴야 해서 그랬는지 과녁과의 거리가 상당한 게 일부러 이런 장소를 찾아 연습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곳은 바로 우리들이 기념사진을 찍은 수루였는데 이 곳에서 장군님을 비롯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작전회의도 하고 행사도 치르고, 또 근무도 서고 했을 것입니다.
모두들 깊이 잠든 고요한 밤에 보초를 서고있노라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를 생각해 보니 옛날 사람이나 요새 사람이나 사람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고향생각, 두고 온 가족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님의 그 유명한 시조가 지어지지 않았을까? 그리운 고향과 두고 온 가족들, 무엇보다도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비통한 심정과 적의 기습에 대비해야 하는 긴장감이 대비를 이루며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는......
閑山島 明月夜 한산도 명월야
한산섬 달 밝은 밤에
上戌樓撫 大刀深愁時 상술루무 대도심수시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차에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하처일성강적갱첨수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歌)는 남의 애를 끊나니
(주) 여기서 一聲羌笛, 즉 일성호가를 두고 그 해석이 분분한데, 저는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적의 기습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음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돼 이에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제 나이 어느덧 중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우리 넷 중 친구 한 명과 제 동생이 벌써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때 찍었던 이 사진을 꺼내 들여다보며 그들과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곤 합니다.
과연 이 녀석들은 나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부질없는 생각이 또다시 끝도 없이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