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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3023년: 두번째 판게아
작가 : 윤그루
작품등록일 : 2018.11.2

100년전, 세상은 망했다. 지구 대재앙이 일어나 지구상의 모든 걸 집어삼켰고, 동물과 식물과 무생물을 한낱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속에서도 살아남더라. 살아남아서, 그나마 지구에 남은 그 작은 땅덩어리에 다섯 나라를 짓고, 또 다시 사회를 시작하더라. 그런데 오늘, 3023년, 그 다섯 나라 중 우리나라가 망했다. 나라가 망하는거야 딱히 상관없다만, 그것 때문에 다쳐서는 안되는 아이가 죽게 생겼다. 그래서 싸워야겠다. 이 끝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이대로 흘러가게 두지는 못하겠다.

 
#5. 끝이자 시작
작성일 : 18-12-28 23:06     조회 : 284     추천 : 0     분량 : 7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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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막 밖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우리 학교는 맞았다. 우리 학교는 맞는데, 학교가 웬 부대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온 천지에 군인들이 줄을 맞춰 바쁘게 돌아다녔고, 여기저기에 군용 천막들도 여러 개 쳐져 있었다. 심지어 운동장엔 헬리콥터도 몇 대 세워져 있었다. 우리 학교를 시작점으로 한아린을 정복해 나가기 시작할 거라더니, 우리 학교를 본거지로까지 삼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나 보다.

 그때 돌무더기가 되어버린 별관의 모습이 내 눈길을 끈다. 순간 숨이 턱 막힌다. 우리 세 명의 아지트였던 별관이, 이제는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히 부서져 있었다. 우리의 비밀의 방, 우리의 옥상, 우리의 추억들과 함께 영원히 없어져 버린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필립을 따라가면서도 내 눈은 오랫동안 별관에 머무른다. 별관의 처참한 모습이 현재 상황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일깨워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곧 시선을 돌려야 했다. 건너편 천막에서 군인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으니까. 군인은 우리 앞에서 멈추더니 필립에게 깍듯하게 경례를 한다. 필립도 가볍게 경례를 해준다.

 “[충성.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보고 드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필립은 말해보라는 의미로 눈썹을 까딱인다.

 “[폭발지 앞에서 우리 군인들 중 한 명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폭발 때문에 사망한 게 아니라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되겠습니까, 장관님? 저희 부대에 마스퀘레이더라도 있을까 의심됩니다.]”

 마스퀘레이더. 원래는 ‘가면 무도회 참가자’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지만, 판게아 시대가 시작되면서 ‘첩자’라는 의미로 변질된 단어이다. 이모르 시대에 가면 무도회가 유행하면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 가면 무도회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는 첩자들이 많아지자, 마스퀘레이더라는 말이 아예 첩자를 뜻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붉은 수염 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긴, 한아린인도 아닌 울랜인 군인이 죽어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할 것이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필립을 올려본다. 그러나 의외로 필립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마스퀘레이더의 존재를 충분히 의심해 볼만해. 하지만 설령 마스퀘레이더가 있더라도, 병력이 이렇게나 많이 투입되어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 활동하기 어려울거다. 우선은 더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 큰 작전들부터 먼저 시행하고, 그 사건에 대해서는 일단 최소한의 조사만 진행하고, 상황이 좀 정리된 후에 다시 보도록 하지.]”

 그 말에 군인은 절도 있게 경례를 한다. “[예, 장관님. 대대장님께도 바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필립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례를 하고 있는 군인을 지나쳐 다시 갈 길을 간다. 군인에게서 조금 멀어지자, 나는 참고 있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 내 옆에서 유민수가 말한다. “이 오빠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모셔줄테니까.”

 능글능글한 말투에 긴장한 와중에도 픽 헛웃음이 난다. “니 걱정이나 해. 나도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까.”

 “뭐, 아까 보니까 그래 보이긴 하던데,” 그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보이더니 두어번 짤랑인다. “그래도 운전은 내가 할 거라구?”

 우리는 학교 주위를 빙 돌아서 마침내 학교 정문에 도착한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두 군인은 필립이 다가오자 그를 알아보고는 바로 비켜선다.

 “조심히 가십시오, 장관님!”

 필립도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경례를 한다.

 정문 밖에는 언제나 그렇듯 자연 보호 구역답게 드넓은 숲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제는 수많은 황토색 지프 차와 천막들이 그 푸르름을 짓밟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지프 차들 중 하나에 올라탄다. 유민수는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올라타며 조수석을 두어번 두드린다.

 “너 자리는 여기야, 신입. 아쉽게도 오늘의 귀빈은 필립이라구.”

 모두 올라타자 곧 시동이 걸리면서, 우리는 빠르게 풀밭을 거슬러 내려가기 시작한다. 바퀴 아래로 우르르 쓰러져가는 풀들에 눈살이 살짝 찌푸려진다.

 “자연 보호 구역에서 차 타면 벌금이 엄청난데.” 내가 중얼거린다.

 “몇 시간이면 한아린 정부가 없어질텐데, 뭘.” 유민수가 말한다. “그 걱정보단 당장 너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걸?”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민수의 발이 세차게 악셀레이터를 밟는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뚫린 천장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지프 차는 수많은 나무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요란하게 풀밭을 굴러 내려간다.

 “[아무리 바쁘다지만 적당히 가자, 민수야!]” 필립이 소리친다.

 “[에이, 왜 그래요, 필립! 지금 완전 적당한데!]”

 유민수는 환호성을 내지르며 신나게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간다. 덕분에 우리는 곧 시내의 도로로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 시점 쯤 내 정신은 금방이라도 달아날 듯이 혼미했다.

 드디어 차가 멈추자, 나는 비틀거리며 좌석에서 내린다. 그와 달리 유민수는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지 필립의 짐까지 다 챙겨서는 내쪽으로 다가온다.

 “다행히 시간 딱 맞춰서 도착했어. 지금 떠나는 기차까지는 아마 아직 교통 통제에 안 들어갔을 거야. 이 기차만 타면 되니까 좀만 힘내.”

 고개를 끄덕이고서 필립의 뒤에 서 기차역으로 들어선다. 맘 같아선 더 늦어버리기 전에 기차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기에 정중한 걸음으로 기차표를 사들고 승강장으로 향한다.

 “[이제 메리니아로 가는 기차만 타면 된다.]” 필립이 말한다. “[아마 3번 승강장에서-]”

 잘 이어지던 필립의 말이 순간 멈칫한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필립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본다. 그 순간 내 정신도 함께 멈칫한다.

 승강장 아래로 늘어선 기차에는, 각 문마다 두 명의 황토색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틈도 없이 따닥따닥 붙어 늘어진 황토색 점들에 환멸이 날 정도였다.

 필립의 입에서 조용히 욕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마냥 해맑기만 하던 유민수의 표정도 이 순간만큼은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결국 우린 여기까지인 거다. 역시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조직에 들어가는 건 너무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메리니아가 어떤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라도 아니까, 나는 유진이를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숨어 살면 되는 거다. 그럼, 그럼.

 그러나 그런 나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기라도 하는 듯 우리와 가까이 서 있던 군인 하나가 필립을 알아보고는 달려오기 시작한다. 망할. 나는 얼른 고글과 모자를 고쳐 쓰며 고개를 풋 숙인다.

 “[윌라드 장관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군인이 깍듯하게 경례하며 말한다. “[기차 타러 오셨습니까?]”

 이번에는 필립도 난감함을 감추지 못한다. “[음.. 그.. 완벽히 그런 건 아닌데... 그런데 어째서 벌써 교통 제한이 시작된건가? 한영고 쪽 일도 아직 확실하게 해결이 안된 마당에. 난 분명 한영고부터 완벽하게 장악한 후에 교통 제한을 시작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예, 하지만 사망한 군인 사건에 대해 마스퀘레이더가 있을지도 모르니 최소한의 조사를 시작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군인이 말한다. “[대대장님 측에서 그 내용을 들으시고 혹여라도 마스퀘레이더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교통 제한을 당장 시작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흘러나올 뻔한 한숨을 겨우 참는다. 이 일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필립이 당황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군인이 필립의 서류 가방을 가져가 들어준다. “[그럼 제가 기차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필립과 유민수가 불안한 눈길을 교환하지만, 그 사이 군인은 이미 기차를 향해 앞장 서 내려가고 있다. 결국 우리는 마땅한 대책 없이 군인을 따라 기차 문 바로 앞까지 다다른다. 유민수의 손이 총을 더 굳게 쥐는 게 보인다.

 “[충성!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관님.]” 문 앞에 서 있던 다른 군인이 말한다. 은색 반지를 낀 그의 손에는, 이상한 기기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어, 그래. 수고한다.]” 필립이 얼떨결에 대답한다.

 “[죄송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가 기차에 탑승하는 모든 이들의 신원검사를 해야 해서 말입니다. 실례지만 혈액 검사 좀 하겠습니다.]” 은색 반지가 말한다.

 그제서야 그가 쥔 물건의 정체가 인식된다. 끝에 작은 바늘이 달린 그 기기는, 혈액으로 신원을 알아내는 혈액 검사기였다.

 군인은 필립의 손을 살짝 잡고는 검사기를 필립의 검지 손가락 끝으로 가져간다. 필립까지는 괜찮겠지만, 그 다음 순서는 나나 유민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던 저 바늘이 손가락에 꽂힌다면, 우리는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불안보다 분노가 차오른다. 언젠가 끝은 오겠지만, 그 끝이 이 순간이 될 수는 없다. 유진이를 되찾기 전까지, 난 악착같이 내 생명줄을 붙잡고 있을 예정이었다.

 무의식이 의식을 거쳐가기 전에, 혈액 검사기를 든 군인에게 달려들어 혈액 검사기를 뺏는다. 그러곤 있는 힘껏 검사기 양 쪽에 힘을 주어 두 동강 내어버린다. 검사기가 산산 조각이 나며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진다. 모두가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면서,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두 군인은 잠시 벙쪄 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내가 총을 겨눈다. 순간 붉은 수염 군인이 떠오르며 머리에 식은 땀이 맺히지만, 내 모든 정신력을 끌어모아 잔뜩 화 난 얼굴로 내게 겨눠진 총구 중 하나를 잡아 땅에 내리 꽂는다. 이미 쌓인 게 충분히 많은 터라 화를 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은색 반지가 소리친다.

 나는 되려 그 군인에게 매섭게 다가가 그의 얼굴에 대고 소리친다. “[너야 말로 지금 뭐하는 거야? 니들 미쳤어?]”

 “[무슨..]”

 “[감히 장관님 손에 그 바늘을 꽂겠다고?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당황한 듯 군인이 살짝 움찔한다. “[난 내 명령을 이행하는 것뿐이야! 기차에 타는 사람들은 전부 신원 검사하라고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고!]”

 “[아, 니 눈엔 장관님이 한아린인인지 아닌지 헷갈리나 보지? 그 바늘을 꽂지 않고서는 장관님이 울랜인인지 한아린인인지 알아낼 수가 없나 봐? 니 눈엔 장관님이 섀니로 보이냐? 어?]”

 “[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 그건 또 아니야? 그럼 그 바늘을 왜 꼭 꽂아야 했을까? 그 죽은 군인 때문에 부대 내에 마스퀘레이더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혹시 너가 그거냐? 그 바늘 안에 꼭 넣어야 하는 독약이라도 들어있었나 봐? 어?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이었나 봐?]”

 군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아니..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 건 절대! 저흰-]”

 “[이봐, 카를 이병.]” 내가 유민수에게 손짓하며 말한다.

 “[예, 비서님.]” 유민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한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이는 게 보인다.

 “[지금 당장 한영고 쪽 대대장한테 연락해서 이 두 놈 잡아가라 그래. 마스퀘레이더 용의자로.]”

 “[예, 알겠습니다.]”

 유민수가 한 걸음 떨어져서 전화를 거는 척까지 하자, 군인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무릎까지 꿇는다.

 “[안돼! 아니, 안됩니다! 제발…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들이 내 팔을 잡고 애원한다. 다급해진 그들의 눈빛에서 눈물마저 약간 묻어난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다. 그러곤 평온한 표정으로 애원하는 군인을 지긋이 내려본다.

 “[이제 당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깨달으셨습니까?]”

 군인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럼요. 당연하죠.]”

 “[좋아요. 그럼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드리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없던 일로 해줄 테니 이번엔 제대로 장관님을 모셔보세요. 이해 되셨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군인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필립에게로 가서 그를 기차 안으로 안내한다.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 발짝 뒤에서 필립을 따라 기차에 오른다. 유민수가 나를 따라 마지막으로 기차에 오르며 슬쩍 팔꿈치로 어깨를 친다.

 군인들은 방 하나 앞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매표소에서 예약한 방보다 훨씬 더 좋은 방이었다. 그들은 방문을 열어주고서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꾸벅 경례하더니 매서운 속도로 사라진다. 내 연기가 제대로 먹혀 들어간 모양이다.

 방에는 소소하면서도 기품 있게, 붉은 카펫 위에 둥근 나무 탁자 하나와 폭신한 의자 네 개가 배치되어 있다. 탁자 위에는 다양한 다과거리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눈길을 가장 끈 건 방 안의 창문이었다. 벽 한쪽 면이 통째로 안에서 밖으로만 보이는 창문으로 되어 있어, 보고 있자면 방 한 쪽이 뻥 뚫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각자 의자 하나씩을 잡고 앉는다.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이 급격히 찾아온다. 그런 나를 필립은 유심히 보다가 입을 연다.

 “[방금 대단했어.]”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유민수도 기다렸다는 듯 펄쩍 뛰어오른다. “[그쵸, 그쵸! 와, 난 진짜 소름 돋았잖아!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난 그냥 여차하면 튀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의 칭찬에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냥 남들한테 화내는 걸 좀 잘하는 거지. 너도 며칠만 나로 살아보면 쉽게 할 수 있을 걸?]”

 “[아니, 정말로 진심이야. 너 정말 대단했어.]” 필립이 말한다. “[널 나린에 영입한 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순간 따뜻해져오는 감정을 급히 억누른다. 그러곤 거짓 웃음으로 필립에 답한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마음을 줄 수 없다. 아니, 주지 않을 거다. 마음을 연다는 건 그만큼 내 마음이 찔릴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진다는 건데,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 마음은 죽어도 없으니까. 나는 그저 적당히 이 사람들과 붙어있다, 적당한 때에 유진이를 찾아,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이제는 맘 편히 쉬어도 된다. 메리니아에 도착하려면 꽤 걸릴 테니, 그 동안 눈 좀 붙이자꾸나.]” 필립이 말한다.

 바라던 바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쓰러지듯 의자에 기댄다.

 

 곧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한다. 커다란 창문 밖의 풍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쉭쉭 지나간다. 많이 피곤했는지 필립은 먼저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나 역시 피곤했지만, 눈이 선뜻 감기지는 않는다. 한아린의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도로 위에 늘어선 크고 작은 건물들, 길을 푸르게 수놓은 가로수들, 평화롭게 길을 걷는 사람들… 그러나 곧 이 평화로운 풍경들은 메리니아 군인들과 무기들로 더럽혀질 거다. 그리고 한아린은, 나는, 유진이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어렵겠지.

 “하지 마.”

 유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 그 애 쪽을 돌아본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깊이 기대고서, 눈만 꿈뻑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누가 봐도 불행해보이는 표정.”

 “아..”

 뒤늦게 경직된 눈썹을 누그러뜨린다. 그걸 보며 유민수는 픽 웃는다.

 “좀 낫네.” 그 애가 말한다. “이런 일에 가담하기로 한 이상, 그 어떤 일에도 긍정적일 수 있어야 한다구. 안 그럼 웃을 일이 앞으로 평생 없을지도 모르거든.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유민수는 능글맞게 웃고 있지만, 그게 애써 만들어진 웃음이란 건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애, 일전에 나 때문에 사람을 죽였었다. 그 붉은 수염 군인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지울 수 없는데, 이 애는 어째서 이렇게 하루종일 해맑을 수 있는 것인가.

 지독한 사이코거나, 자기도 속으로 미친듯이 발악하고 있다는 거겠지.

 유민수는 그렇게 말하고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눈을 감는다. 그런 그 애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나는 오래도록 창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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