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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3023년: 두번째 판게아
작가 : 윤그루
작품등록일 : 2018.11.2

100년전, 세상은 망했다. 지구 대재앙이 일어나 지구상의 모든 걸 집어삼켰고, 동물과 식물과 무생물을 한낱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속에서도 살아남더라. 살아남아서, 그나마 지구에 남은 그 작은 땅덩어리에 다섯 나라를 짓고, 또 다시 사회를 시작하더라. 그런데 오늘, 3023년, 그 다섯 나라 중 우리나라가 망했다. 나라가 망하는거야 딱히 상관없다만, 그것 때문에 다쳐서는 안되는 아이가 죽게 생겼다. 그래서 싸워야겠다. 이 끝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이대로 흘러가게 두지는 못하겠다.

 
#3. 판게아절
작성일 : 18-12-25 16:59     조회 : 266     추천 : 0     분량 : 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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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게아절이다.

 심지어 100번째 판게아절.

 남들에겐 그 어느 날보다 즐거운 축제 날인 오늘을, 나는 퀴퀴한 세탁실 바닥에서 맞이했다. 눈을 떠보니 해가 어느 정도 밝은 새벽이었고, 시계는 벌써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숨 아래로 욕을 지껄이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선다. 오늘을 휴일이라 수업도 없어서 저녁에 댄스 파티 시간만 빼고는 학교 밖을 마음껏 나돌아 다닐 수 있었다. 때문에 아침 8시부터 유진이와 카를과 시내로 나가기로 했는데, 지금 이 꼬라지대로라면 시간이 촉박했다.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한다. 다행히 다들 늦잠을 자는지 계단에서 누군가와 마주치지는 않았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샤워기를 가장 차가운 쪽으로 돌려 놓고는, 옷도 벗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아래에 선다. 처음 물이 닿을 때엔 피부가 벗겨질 듯이 달아오르지만, 웬만큼 있다보니 물의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던 쓰라림을 씻어 내려가 준다.

 내친김에 샤워까지 마치고는 나갈 준비를 한다. 세수를 하고 머리까지 말리니 얼추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것도 같지만, 퀭한 눈과 시뻘건 손목은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다. 급한대로 있는 옷들 중 팔이 제일 긴 후드를 골라 입는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팔을 걷어올려서는 안되겠다.

 짐을 챙겨 막 나가려는 참에, 방문이 홱 열리더니 해맑은 유진이의 얼굴이 나타난다.

 “해일 해일 강해일! 가자!”

 유진이는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모습이다. 그런 유진이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오늘은 웬일로 너가 먼저 오냐. 늦잠 안 잤나봐?” 내가 놀린다.

 “당연하지!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제 밤에 기대돼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구!” 유진이가 말한다. “너도 그랬지! 너 지금 눈 아래에 다크서클 장난 아니야! 뭘 얼마나 기대한거야?”

 그렇게 말하며 유진이는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잡고 깔깔깔 잘도 웃어댄다. 안도의 미소가 입가에 지어진다. 이럴때보면 유진이가 눈치없이 태어난 건 참 다행이다.

 “티나?” 내가 머쓱한 척 하며 말한다.

 “응! 완전!”

 “뭐, 어쩔 수 없지. 가서 카를이나 데리러 가자.”

 “좋아! 가자!”

 유진이가 신나서는 깡총깡총 뛰며 앞장선다. 그런 유진이 뒤를 나는 절뚝거림을 감추며 멀리 떨어져 따라간다.

 

 “나쁜 카를 자식. 어떻게 판게아절에 학교를 빠질 생각을 하냐.” 유진이가 자갈돌 하나를 걷어차며 말한다.

 카를을 찾으러 갔을 때 그는 이미 방에 없었다. 옆방 아이에게 물어보니 어제 밤에 짐을 싸서 바로 집으로 돌아갔댄다.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카를은 종종 이런 식으로 하루나 이틀씩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들이 있었으니까. 우리에게 전날 통보를 하고 가는 날도 있고, 안 하고 가는 날도 있었는데, 보통은 오늘처럼 그냥 얘기 한 마디 없이 가버리곤 했다.

 “우리 셋이 학교 밖에서 논지도 진짜 오래 됐는데, 지 혼자 집에 가고. 완전 치사해.”

 “가족 문제 때문이겠지. 항상 그렇잖아.” 내가 달랜다.

 “아, 그래도! 걔는 가족이 도대체 얼마나 복잡하길래 그렇게 맨날 문제 생겼다고 집에 불려 가냐.”

 그러게. 그건 나도 꽤나 궁금한 문제였다. 몇 번 캐내려고 노력해보긴 했지만 복잡하다는 말만 할 뿐, 카를이 자기 가족에 대해 제대로 얘기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저 언젠가는 얘기해주겠지, 하고 체념한지 오래였다.

 전혀 서운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난 지랑 더 같이 있기 위해서 어젯밤 내 스위치마저 스티븐에게 넘겨버렸는데, 정작 당사자는 말도 없이 먼저 가버리기나 하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를이 학교에 없다는 게 다행이기도 했다. 카를 그 자식은 유진이와는 다르게 눈치가 쓸데 없이 빨라서, 내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걸 바로 알아챘을테니까. 그 모든 걸 카를에게 설명해주어야 했을 생각을 하니, 괜히 머리가 아파왔다.

 “걔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내가 유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한다. “그니까 오늘은 우리 둘이 신나게 놀고 다음에 완전 자랑해주자. 알았지?”

  그제서야 유진이도 다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좋아! 진짜 배 아플만큼 신나게 놀아주겠어!”

  우리는 운동장을 건너 학교 정문을 나선다. 정문을 나오니 언제나 그렇듯 푸르른 자연이 우리를 반긴다. 우리 학교는 자연 보호 구역에 위치해 있어 거의 숲 속 한가운데에 있는거나 다름 없다. 자연 보호 구역은 제 6대륙 시대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지구 대재앙이 끝난 이후 각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 제정한 규정으로, 각 나라마다 일정한 범위의 지역을 꼭 자연 보호 구역으로 설정하여 환경을 보존해야 했다.

  때문에 이런 자연 보호 구역에서는 땅 위에 직접적으로 건물이나 길을 짓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특수한 경우라 땅을 깎고 건물을 짓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건물과 길들은 풀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기 위해서 땅에서부터 약 20cm 정도 떠올라 있어야 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무빙 워크웨이 역시 자기력을 이용하여 허공에 뜬 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빙 워크웨이 아래로 비치는 이슬을 머금은 풀들을 보니, 심란했던 마음이 그나마 안정된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 숲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자연 보호 구역에서 벗어나 시내로 나가야 우리가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무빙 워크웨이를 따라 한 30분 정도 걷자, 드디어 시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내로 들어선 우리는 우선 시내에 나가면 항상 제일 먼저 가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메뉴도 항상 같았다. 나는 해물 크림 스파게티, 유진이는 고구마 치즈 돈까스. 만약 카를이 왔으면 쉬림프 피자를 시켰을 것이다. 그냥 그렇다고. 판게아절이라 음료수는 공짜다. 우리는 신나서 먹어보고 싶었던 음료들을 마구 시켜서 폭풍처럼 먹었다.

 배가 좀 차자, 드디어 유진이가 기대하고 고대하던 드레스 가게로 향했다. 댄스 파티 때 입을 드레스를 빌리기 위해서다. 유진이는 이 시간만을 위해서 몇 주 전부터 예쁜 드레스 사진을 찾아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그 상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그 드레스 가게를 본 순간, 유진이는 돌고래가 낼 법한 소리를 내며 색색의 드레스들을 황홀하게 쳐다본다. 반면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내 눈썹은 어쩔 수 없다. 역시 이런 나풀나풀하고 레이스 가득한 옷들은 나와 맞지 않는다.

 “어떡해, 해일아.. 너무 예뻐...” 유진이가 자신의 볼을 부여잡으며 말한다.

 “그렇게 좋아?”

 “응! 완전..” 유진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넌 정말 안 골라?”

 “응, 난-”

 난 댄스 파티에 갈 생각 없다고 말하려는데, 그 순간 어젯밤 스티븐이 한 말이 떠오른다. 혀 끝을 맴도는 욕을 애써 삼킨다. 이로써 나도 이 나풀나풀한 것들과 하나가 되는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 아니. 생각해보니까 나도 이번 댄스 파티는 한 번 가보고 싶어서. 나도 하나 골라보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이의 눈동자가 터질듯이 커진다.

 “뭐? 웬일이야, 웬일이야!” 유진이는 방방 뛰며 내 손을 잡아 흔든다.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오다니! 강해일이 댄스 파티에 간다고? 카를이 이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야, 야, 진정- 진정해..” 내가 애써 유진이를 조용히 시킨다.

 유진이는 저지당하면서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쨌든 그래서 나도 둘러보면서 한 번 찾아볼테니까, 다 고르면 이 테이블에서 만나자.” 내가 창가 쪽의 한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한다.

 “좋아!” 유진이가 대답한다. “예쁜 걸로 골라와야 돼, 알았지! 다 고르고 서로 봐주기다!”

 그러고서 유진이는 수많은 사이로 쪼르르 달려가 버린다. 유진이의 귀여운 모습에 조금 웃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현실과 마주한다. 댄스 파티에서 스티븐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생각하니 손목이 다시 아려오는 듯 하다.

 일단은 모든 고민을 제쳐두기로 하고, 어두운 계열의 드레스가 있는 쪽으로 한 번 들어가본다. 내가 드레스를 고르는 기준은 간단하다. 손목이 가려지느냐, 가려지지 않느냐. 일단은 이 부어오른 손목을 가리는 것이 내게는 최우선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드레스들은 다 민소매거나 반팔 형태라, 내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반복되는 반팔 드레스들에 점점 혈압이 오르는데, 그 순간 옷걸이 끝자락의 드레스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온다.

 그 쪽으로 가까이 가 드레스를 한 번 꺼내본다. 어깨와 등 부분이 뚫려 목 부분에서 다시 원형으로 이어지는, 착 달라붙는 형태의 드레스인데, 마음에 드는 점은 소매 부분이 팔 전체를 휘감아준다는 거다. 소매가 시스루라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꽃 무늬가 꽤나 빽빽하게 수 놓아져 있어 그런대로 손목의 붉은기를 잘 가려줄만 했다.

 만족스럽게 드레스를 챙겨서는 유진이와 약속한 테이블로 돌아온다. 테이블에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유진이는 아직도 한창 고르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 애가 기대한 정도로 봐서는 드레스를 고르는데 족히 1시간을 걸릴 것이다.

 체념하고서 나는 테이블의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싱그러운 햇살을 맞으니 그나마 기분이 괜찮아졌다.

 나는 가만히 창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휴일이라 그런지 길거리엔 사람이 꽤나 많다. 놀러 나온 가족들, 친구들끼리 모여 다니는 학생들… 특히 휴가 나온 군인들이 가장 많았다. 그것도 메리니아인 군인들. 아까부터 황토색 유니폼에 얼굴 반절을 가리는 검은 고글을 쓴 메리니아인 군인들이 무리 지어서 되게 자주 지나가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메리니아 부대가 하나 있는데, 다 거기서 놀러 나온 모양이다. 오랜 만에 쐬는 바깥 공기가 좋은지 그들은 저마다 어딘가 통쾌한 웃음을 짓고 있다.

 창가에서 고개를 돌리고서 내가 앉은 탁자 가운데에 설치된 홀로그램 TV를 킨다. 마침 판게아절을 기념하여 베인 크럼스의 축하 연설 현장이 실시간으로 뉴스에서 나오고 있었다.

 베인 크럼스는 메리니아의 대통령이다. 사실 그가 속해있는 이 크럼스 일가는 지구 대재앙 시절부터 대대로 메리니아를 통치해오고 있었다. 지구 대재앙이 시작되기 전 6대륙 시대 때, 그레그 크럼스란 이가 당시 대통령의 비서 실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런 그가 지구 대재앙을 예측하고 이모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그야말로 판게아 최고의 영웅인 셈이다.

 이런 그레그 크럼스를 사람들은 완벽하게 신임하였고, 특히 이모르 안에서 생활했던 100년 동안에도 메리니아인들은 크럼스의 자식들을 대대로 총대장으로 받아들이며 따랐다. 게다가 이런 크럼스들은 모두 자신의 일을 훌륭히 잘 해내었다. 처음 자연 보호 구역을 규정하는 것을 제안한 것도, 혁신적인 공기 청정소를 개발하여 지구 대재앙 이후 난무하였던 화산재를 모두 없앤 것도, 뛰어난 건축 기술로 판게아를 빠르게 발전시킨 것도, 다 이 크럼스 일가들이 이루어 낸 업적이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제 2차 판게아 시대가 시작된 이후에도, 메리니아인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만장일치로 크럼스의 자손들을 메리니아의 대통령으로 세웠다. 이모르에 있었던 때가지 치면, 현재 대통령인 베인 크럼스는 벌써 메리니아를 통치한 6대 크럼스였다.

 그때 연설 준비가 다 되었는지, 베인 크럼스가 마이크에 대고 한 두 번 헛기침을 한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연설회장 앞에 빽뺵히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진다. 나는 그 광경을 감탄스럽게 본다. 역시. 베인이 원하면 뭐든지 다하는구나.

 베인은 감사의 의미로 관중에게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연설을 시작한다. 한아린 방송에 맞춰, 연설은 한아린어로 동시 통역 되어 나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들. 100번째 판게아절을 맞아 제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연설 자리에 나오게 되었는데요, 이런 뜻 깊은 자리에 설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는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을 잇는다.

 “[어느덧 제 2차 판게아 시대가 시작된 지 백 년이 흘렀습니다. 지구 대재앙이 끝나고 처음 이 낯선 땅을 밟게 되었을 때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가 그저 막막하고 불안했었던 것 같은데,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나름대로 이 땅에 잘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무대 앞의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대답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면, 마냥 기쁘지만은 않더군요.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이런 우리의 삶을 같이 누릴 수도 있었던, 지구 대재앙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으니까 말입니다.]”

 환호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숙연해진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베인은 조용히 말을 이어 간다.

 “[가끔 잠을 자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지구 대재앙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모르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대재앙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라앉아 버린 나라들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남’에 의해 이모르가 불태워져서 희망 조차 없이 지구 대재앙을 맞이한 이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도 억울하고, 너무도 비통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동의를 표하는 소리를 지른다. 베인 역시 목소리를 더 높여서 말한다.

 “[그 사람들은 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이라는 극악무도한 인간이 그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지요.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우리 판게아에는, 지금보다 수백 만 명, 아니, 수천 만 명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이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인구의 90%가 전부 몰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관중들이 전부 주먹을 휘둘러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열기가 너무 띄워지자, 베인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연설을 계속한다.

 “[이런 일은 다시는 판게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 테러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날 모든 가능성을 아예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베인 뒤로 커다란 홀로그램이 켜진다. 홀로그램은 몇 번 지직거리더니, 곧 영상 하나를 재생하기 시작한다.

 옛날 영상인지, 영상의 화질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좋지 않았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서 홀로그램에 집중한다.

 영상 속에서 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온 몸이 축 처진 남자의 양 팔을 잡고서 그를 질질 끌고 온다. 끌려 오는 남자는 옷이 여기저기 찢겨있었고,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두 군인은 남자를 흙 밭 한가운데에 무릎 꿇리더니, 뒤로 비켜난다. 그러자 또 다른 남자가 영상의 앵글 안으로 들어온다.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그 울랜인 남자는, 꿇려진 남자 앞에 선다.

 “[이제서야 너를 잡게 되었군, 남.]” 양복을 입은 울랜인이 말한다.

 ‘남’이라는 말에 홀로그램을 보고 있던 관중들이 술렁인다. 나 역시 놀란 표정으로 홀로그램 앞으로 더 다가가 앉는다.

 ‘남’이라고? 그 많은 이모르들을 홀로 다 폭파시켰다는 그 ‘남’?

 꿇려진 남자가 고개를 들어 울랜인을 본다. 그가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제 보니 그는 확실히 한이린인이었다. 눈썹까지 덮이는 긴 검은 머리에, 날카로운 턱 선을 가진 한아린인. 얼굴이 온통 상처투성이인데도, 그의 눈 만은 생기가 돌았다. 아니, 생기라기보다는 살기가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오랜만이네, 그레그.]” 그가 말한다.

 관중들이 또 한 번 술렁인다. 그레그? 그레그 크럼스? 이모르를 만든 장본인?

 머리가 저려온다. 판게아 최고의 영웅 그레그 크럼스와 최고의 테러리스트 남이 서로 아는 사이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는 알지? 너가 지금까지 한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그레그 크럼스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어 총구를 남의 머리에 겨눈다.

 남이 피식 웃는다. “[알다 마다. 그래도 유언 정도 남길 시간은 줄 거지?]”

 “[어디 해 봐.]”

 남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얼굴을 그레그 크럼스 쪽으로 들이밀어 자신의 이마가 총구에 닿도록 한다.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마, 그레그. 너와 네 후손들 모두. 나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거든. 그래서 사실 얼마 전에 내 자식한테 재미있는 걸 하나 심어놓고 왔어. 이루지 못한 내 목표가 내 자식과, 그의 자식,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의 혈관에 흐르도록 말이야.]”

 “[너..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말은 다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그레그. 난 글자 그대로를 의미하는 거니까. 난 꼭 언젠가 너희 크럼스들을 부숴버리고 말거거든.]”

 “[무.. 무슨..]”

 “[그럼, 행운을 빌어.]”

 남은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뻗어 그레그의 손에 들린 총을 쥔다. 그리고 누가 뭐라도 하기 전에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버린다.

 엄청난 양의 피와 함께 동영상이 종료된다. 관중들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나 역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검은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 정적을 깬 건 베일 크럼스였다.

 “[잘 보셨습니까? 사실 이 영상은 제 조상이신 그레그 크럼그 대통령 때부터 크럼스 일가가 보관해 오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영상이 가져올 파장이 두려워 숨겨두고만 있었지만, 저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요즘 들어 이 전에 '남'이 보였던 행적과 비슷한 행적을 보이는 이들이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이 영상 자료를 함께 보시죠.]”

 홀로그램이 다시 지직거리더니 또 다른 영상이 떠오른다. 영상은 시작 부분부터 엄청난 양의 총소리로 가득하다. 교도소 CCTV로 보이는 영상 화면에서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총으로 무장한 사람 몇 명이 나오더니, 보이는 문마다 족족 총을 쏴 수감자들을 탈출시키고 있었다. 덩달아 자유가 된 수감자들까지 교도관들과 사투를 벌이면서, 영상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얼마 전부터 나타나 메리니아의 교도소들에 무작정 침투하여 다짜고짜 수감자들을 전부 탈출시키고 있는 조직입니다.]” 베인이 말한다. “[탈출한 수감자들은 이 조직원들이 전부 데려가는지 대부분 그 위치가 포착되지 않고 있으며, 수감자들을 데려가는 이유조차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 조직에 대해 파악된 것은 전혀 없지만, 지금껏 조사한 영상 자료에 따르면 조직원들이 전부 한아린인들이라는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이고, 때문에 현재 메리니아 정부는 이들이 '남'의 후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관객이 또 다시 불안하게 술렁인다. 갑자기 들이닥친 너무도 많은 정보들에 내 머리 역시 터질 듯 하다.

 “[지금까지는 이 사태를 알리게 될 경우 부작용만 커질 것이라 생각하여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커진 이상 국민 여러분 모두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알고도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겠습니까? 몇 백 년 전, 억울하게 ‘남’에 의해 목숨을 일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이 ‘남’의 후손들을 찾아내서 수백년 간 우리를 괴롭혀온 악의 무리를 뿌리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커진 베인의 목소리에 힘 입어 사람들은 다시 주먹을 휘둘러대며 열광을 하기 시작한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기를 띈 열광이었다. 군중 여기저기서 “[싹 다 죽여버려!]”하는 섬뜩한 외침들까지 들려오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판게아가 새 출발을 하는 바로 오늘부터, 그 일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바로 지금 당장부터 말입니다! 여러분도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이제 군중은 막을 수 없는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가 되어 ‘남’의 후손들의 죽음을 외쳤고, 주먹을 치켜 세우며 베인에게 충성을 표했다. 그런 그들에게 베인도 주먹을 들어 올려 보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온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홀로그램을 끈다. 예감이 좋지 않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온 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남의 사형 장면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리플레이 되었다. 자비 없는 총소리. 흥건한 피. 우리 아빠도 그렇게 사형되었을까.

 다행히 그런 나의 망상은 유진이에 의해서 깨어진다. 마침 유진이가 드레스를 한 다발 안고 낑낑대며 나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너 설마 그거 다 살 거 아니지?” 내가 당황하며 묻는다.

 “아니지! 이 중에서 하나 고르려고 추려 왔어.” 유진이는 가져온 옷들을 내 앞의 테이블 위에 쏟아 붓는다.

 “그게 추려 온 거라고? 한 20벌은 되어 보이는데.”

 “몇 개 더 가지고 오려다가 말았어. 자, 내가 보여줄 테니까 한 번 골라봐.”

 유진이는 드레스 하나하나를 자기한테 대보면서 내게 보여준다. 각 드레스에 대한 친절한 부연설명도 절대 잊지 않았다. 나는 유진이의 설명을 반은 듣고 반은 흘리면서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쨌든 유진이도 모양만 나한테 설명해 주는 거였지, 사실은 혼자서 엄청 토론하는 거였으니까.

 결국 유진이는 고심 끝에 반짝이는 허리 장식이 달린 하늘색 드레스를 고른다. 발랄하면서도 청순해 보이는 드레스로, 유진이와 딱 잘 맞았다. 이어서 유진이는 내가 고른 드레스도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너무도 잘 골랐다며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드레스 가게에서 하루를 다 보내기 전에 대여비를 카운터에 내고서 유진이를 데리고 가게를 나온다. 불길한 기운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우선은 남은 하루를 알차게 보내기로 했다. 그 이후로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판게아절 퍼레이드까지 구경하니,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어 학교로 돌아갈 시간이 된다. 곧 댄스 파티가 시작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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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6. 나린에 나린 (4) 2018 / 12 / 29 252 0 2560   
15 #6. 나린에 나린 (3) 2018 / 12 / 29 251 0 5922   
14 #6. 나린에 나린 (2) 2018 / 12 / 29 249 0 3597   
13 #6. 나린에 나린 2018 / 12 / 29 271 0 7534   
12 #5. 끝이자 시작 (2) 2018 / 12 / 29 290 0 3015   
11 #5. 끝이자 시작 2018 / 12 / 28 294 0 7644   
10 #4. 인생의 2막 (3) 2018 / 12 / 26 270 0 4376   
9 #4. 인생의 2막 (2) 2018 / 12 / 25 248 0 6977   
8 #4. 인생의 2막 2018 / 12 / 25 271 0 2748   
7 #3. 판게아절 (2) 2018 / 12 / 25 245 0 4735   
6 #3. 판게아절 2018 / 12 / 25 267 0 10426   
5 #2. 족쇄 (2) 2018 / 12 / 24 269 0 4707   
4 #2. 족쇄 2018 / 11 / 16 263 0 3220   
3 #1. 혼자 사는 인생 (3) 2018 / 11 / 7 274 0 4329   
2 #1. 혼자 사는 인생 (2) 2018 / 11 / 4 284 0 8266   
1 #1. 혼자 사는 인생 2018 / 11 / 2 477 0 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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