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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이별을 준비하는 다섯 가지 방법
작가 : 멀이
작품등록일 : 2018.12.10

[일상물/잔잔물/결혼 이후로 시작하는 이야기/시한부남주/와 지켜보는 가족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은 아가사 당신이니까요.”
“나 나쁜 사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 있어요, 당신.”
“별말씀을.”

시원스레 응수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튼 레슬리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어디 도망을 안 가죠.

“누가 들으면 도망갈 준비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도망갈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저런. 아가사 말은 바로 해야죠. 나는 남겨질 사람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죠. 앞으로 나아가기. 순간 부는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공기마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설풋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레슬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뒷말을 짐작이라도 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표정에 가벼이 입을 맞춘 레슬리는 누가 들을 새라, 조그맣게 속닥였다.

“세상 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겠어요? 몇 없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랍니다, 나는.”
“말은 참 잘해요, 레슬리.”
“그럼. 사업가인데.”

그래서, 레슬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가사는 짙은 녹음 속에 잠긴 자신의 남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멋진 준비를 하는 중인가요?”
“그럼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18화
작성일 : 18-12-25 15:01     조회 : 215     추천 : 0     분량 : 6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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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또 다른 시간

 

 <레슬리가 건강했더라면>

 

 전날 늦게까지 붙잡고 있던 일을 겨우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던 아가사는 무언가 심하게 깨지고 엎어지며 종래에는 우당탕탕 구르는 소리에 치미는 욕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 것 아니기만 해봐. 아주 쥐 잡듯이 탈탈 털어줄 테다.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기세 좋게 문을 벌컥 여는 것과 동시에 뒤늦은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내가 진짜 저혈압을 찾아서 죽이던가 해야지.”

 “윌리엄! 그거 가지고 장난치지, 아가사? 여보? 어디 아파요?”

 

 소란의 원인은 아무래도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는 아이인 듯, 윌리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뒤집개와 주걱을 뒤로 감추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 쪽에는 아이가, 한 쪽에는 주저앉은 아내가 보이는 상황에서 레슬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재빠르게 아이를 품에 안고 손에 들린 것을 뺏은 레슬리는 문고리를 잡고 일어서는 자신의 부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또 갑자기 일어났어요? 여보, 그러다 잘못 쓰러져서 죽는 사람도 있다는데 조심 좀 해요.”

 “당신이 조금만 조용히 했어도 내가 일어날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내가 분명히 조용히 하라고 했을 텐데?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남편을 빤히 바라보다 문득 코를 스치는 탄내에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아차. 같은 것을 깨달았는지 레슬리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여보,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내려와요. 부탁할게요.”

 “부탁은 개뿔. 내가 식기 태워먹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어요….”

 

 자신을 막아서는 이를 밀치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프라이팬을 개수대에 담그며 아가사는 소리를 빽 질렀다. 뒤를 따라오던 두 남자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엄마 화났다. 응, 아빠가 잘못했어. 아빠를 버리는 거야? 살아서 돌아와.

 

 “다시 한 번만 이런 일 생기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죠?”

 “…주방에서 내쫓고 돈 벌어오라고 했죠.”

 “그럼 여보는 뭘 해야 할까요?”

 “열심히… 휴가를 반납하고 일을 해야겠죠….”

 

 오랜만의 휴가인데 정말 이렇게 버릴 거예요? 울망거리는 눈빛이 애처롭게 쏟아졌으나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이에게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북풍 서릿발보다 더 매서운 눈빛을 차마 이기지 못한 레슬리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주고 아주 우울한 모양새로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 일 해?”

 “응, 아빠 일 하신대. 아들은 엄마랑 다시 빵 구울까? 뒤집개 이리 주련?”

 “네에-.”

 

 도란도란 정답게 말을 나누는 것을 들으며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니. 레슬리는 다시 오랜만에 백작직을 때려 칠까, 올해에만 마흔 세 번째로 고민하고 있었다. 결혼 8년차에 내숭을 떨 정도는 아니라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휘어잡는 이에게 사랑 표현도 못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나. 타이 색을 고르는 손가락이 허공을 느리게 가로질렀다. 가기 싫다, 정말 가기 싫다. 정말정말정말 가기 싫다.

 

 “그럼 어디 가고 싶은데요?”

 “그냥 어디 안 가고 여기 있고 싶어요. 왜 여보는 날 내쫓지 못해서 안달이지?”

 “그럼 내가 나가요?”

 “응, …응?”

 “그래요, 내가 나갈게. 윌리엄은 친구랑 놀 거라고 하니까 간식 잘 챙겨줘요.”

 “잠깐, 잠깐. 여보. 자기야. 아가사, 어딜 간다고요?”

 

 익숙한, 굳은살이 박인 손이 자연스럽게 타이를 골라 목에 둘러주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에 착실히 대답해준 아가사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놀러. 아무 곳이나. 그렇게 집에 있고 싶다는데, 그럼 내가 나가야지.

 

 “집 잘 보고 있어요. 그렇게 좋아하는 집이잖아. 참, 난 수도에 갈 거니까 절대. 절대 찾지 말아요. 알겠죠? 쫓아오면 각방이야.”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요. 응? 난 당신이랑 아들이 있는 집에 있고 싶은 거지, 빈 집을 지키고 싶다는 게 아니었어요.”

 “지금 본인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시위하는 중이에요?”

 “컥, 아니, 그 넥타이. 그만.”

 “응? 지금 레슬리 당신만 잘났어요? 이번 달 들어서만 프라이팬을 벌써 다섯 개는 태워먹었어요, 당신. 우리 집이 프라이팬을 몇 번씩 갈아치워도 괜찮은 집이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아요? 아직 2주도 안 지났거든.”

 

 그래도 본인이 잘났지? 매듭진 넥타이의 끝을 잡고 목을 힘껏 조이며 아가사는 스산하게 웃었다. 내가 너무 부자랑 결혼했나? 그래서 이러나?

 

 “아가사. 여보. 우리, 말로 해요. 우리는 지성인, 컥-!”

 “미안해요. 자기. 난 못 배운 사람이라 지성인이 아니거든. 당신 아내가 좀 이래요.”

 

 학력으로 따지자면 모자라겠지만 지식으로 따지면 내가 더 부족하잖아요, 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았으나 꽉 조여진 목은 호흡을 하는 것도 버거워 레슬리는 손발을 버둥거리며 항복 자세를 취했다.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했습니다. 아주 많이 했습니다.”

 “그래요, 좋아요.”

 

 용서해줄 거야? 반짝이는 눈동자가 열망을 담고 한껏 휘어졌다. 그 웃음을 깨기까지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활짝 웃는 낯으로 아무렇지 않게 레슬리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아가사는 자신의 모자와 가방을 챙겨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놀다 올게요. 집 잘 보고 있어요.”

 “잘못했다니까요.”

 “알겠다니까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난 어제부로 내 할 일 전부 끝났어요. 여름휴가. 우리 올해는 각자 휴가를 보내고 가을에 만나도록 해요.”

 “…나 오늘 굉장히 당신을 많이 부르는데, 여보. 진짜? 나 안 볼 거예요? 윌리엄은?”

 “저녁에 와서 데려갈게요. 당신은 여기를 좋아하니까 여름동안 여기에 머물면 되겠네요. 그렇죠?”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 저녁에 오페라를 보기로 했거든. 애처롭게 옷자락을 잡은 손을 잡고 떼어내는 손길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이 사람이 진짜 화가 났구나. 머리꼭지가 돌았구나.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레슬리는 아예 아가사의 팔에 매달려 반쯤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나 버리지 좀 말아줄래요? 당신 아니면 누가 나 데려간다고. 우리 아들은 어째요.

 

 누군가 아내와 갈라선 이유를 물을 때, 답이 ‘프라이팬을 너무 태워먹어서요.’ 라고 답해야 하는 상황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레슬리는 더욱더 절박한 몸짓으로 아내에게 매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두 배 가까이 되는 덩치를 질질 끌면서도 현관으로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은 아가사는 힘겹게 문을 열었다.

 

 “아가사-, 나 왔는데 쟤 뭐하니?”

 “그 쟤 좀 떼어나 봐. 무거워.”

 “여보 내가 진짜 잘한다니까요? 응?”

 “싸웠니?”

 “뭘 싸워. 아직 그럴 정도는 아니야.”

 “에디스, 너도 좀 말려봐. 여보, 나 버리고 가면 난 어떻게 살아요.”

 “그럴 정도가 아닌데 쟤는 왜 저렇게 매달려 있어. 뭐 실수했어?”

 “집 보고 있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나 오페라 보고 온다니까 이래. 좀 떼놔 봐. 레슬리, 좀 놓아줄래요? 진짜 보고 싶었던 건데 당신 덕분에 늦을 것 같아요.”

 “나 안 버리겠다고 약속하면?”

 “난 당신 버리겠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그냥 집 좀 보라고 했지. 겸사겸사 땡땡이치던 일도 하고. 그게 이렇게까지 매달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프라이팬 이야기를 꺼내서!”

 “갑자기 웬 프라이팬?”

 

 저 부부는 두기만 해도 알아서 자라는 잡초처럼 묻지도 않은 말을 알아서 술술 뱉어내고 있었다. 대강 상황을 짐작한 에디스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껄렁한 자세로 레슬리를 향해 까딱, 고갯짓을 했다.

 

 “또 태워먹었어?”

 “깨먹기도 했어.”

 “그거 잘 숨겼…. 미치겠네.”

 “이만하면 오래 버텼지. 레슬리,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니. 너 데리고 살아줄 사람은 아가사밖에 없으니까 알아서 모시라고. 아가사 내가 잘 아는 변호사 소개시켜줄까?”

 

 한 명은 오해의 끝을 달리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오해에 부러 기름을 뿌리고 있다는 건 잘 알겠다. 아이고, 두야. 지끈지끈 아파오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천천히 호흡을 골랐으나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여전히 반갑지 않았다.

 

 “친구가 이혼당할 위기면 좀 도울 생각을 해야지, 부추겨?”

 “어머, 내가 뭘 부추겨. 난 그냥 변호사 소개나 해줄까-, 한 거라고? 요즘 세상에 변호사 한둘 아는 게 대수니?”

 “전혀 그런 눈빛이나 어조가 아니었잖아!”

 “네 눈이랑 귀가 삐었나보네. 난 안 그랬어.”

 “저기….”

 

 왈왈왈 컹컹. 개가 짖어도 이보다는 덜 시끄럽겠다. 이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 샌드위치의 속 마냥 끼어있는 것이 고달파 시선을 멀리 돌렸더니 쭈뼛쭈뼛 서 있는 조그마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친 것으로 용기를 얻었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낸 이를 위해 아가사는 친절히 두 팔을 뻗어 남편과 친구의 입을 막아버렸다.

 

 “데비 왔니? 안에 윌리엄 있어. 오늘은 아줌마가 잠깐 어디를 가야 할 것 같으니까, 간식은 아저씨한테 달라고 하렴.”

 “응. 그럴게요.”

 “그래, 아줌마 아저씨가 좀 시끄러웠지? 미안해.”

 

 아니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쫑쫑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이후에야 아가사는 입가에 그려 넣던 웃음을 싹 지웠다. 한 명은 찔끔하고, 한 명은 고소하다는 듯 웃고.

 

 “시간 얼마나 남았지?”

 “아직 충분해.”

 “아가사.”

 “레슬리. 내가 언제 이혼한다고 했어요? 그냥 수도에 오페라 보고 온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좀 오해할 만한 부분이 있었던 건 부정 안 하는데.”

 

 혼자 너무 멀리 갔어요. 자신의 허리에 절박하게 매달려 있던 이의 머리를 한차례 톡톡 쓰다듬어준 아가사는 마치 그것이 열쇠인 것처럼 스르륵 내려가는 팔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더 놀릴 기회를 차버렸다며 아쉬워하는 이에게 얼굴을 찡그리고 까딱 고갯짓을 했다.

 

 “그만 놀리고 가자. 참, 레슬리. 나 늦게 들어와요.”

 “여보!”

 

 애절한 외침이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오른 아가사는 빠르게 달리는 마차 안에서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졌다. 여보가 날 버릴 줄은 몰랐어. 우울하게 몸을 일으키고 시간을 헤아린 레슬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비, 수도 구경하지 않을래? 버리면 끝까지 쫓아간다. 이상한 열망을 안고 레슬리의 짙은 녹음을 닮은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

 

 오랜만에 남편과 아이를 두고 편안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보내는 하루는 그야말로 꿀맛 같았다. 왜 부인들이 카페에 모이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 오랫동안 앉아있어 찌뿌둥한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수도에 있는 저택으로 들어간 아가사를 기다리는 것은 여기에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남편이었다.

 

 “잘 놀다 왔어요? 늦었네.”

 “-늦는다고 했잖아요.”

 “자고 온다는 말은 안했는데 왜 여기로 왔어요?”

 

 설마 정말 자고 오려고 했어요? 치사하게? 서운하다며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은 제 아들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아, 아가사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입가를 가렸다.

 

 “쫓아오면 각방 쓴다고 했는데요.”

 “쫓아오다니. 나는 우리 아들이랑 아들 친구랑 그냥 잠시 집에 들러서 놀고 있었을 뿐이랍니다.”

 “당신 이런 성격인 것 알았으면,”

 “결혼 안했다고?”

 “더 고려했겠죠.”

 

 당신이 좋아하는 근육이 멋진 남자가 아니라서 참 미안하네요. 떨떠름한 얼굴로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는 레슬리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매끈한 미간이 찡그려지기 무섭게 레슬리의 다리에 털썩 앉아 볼을 감싼 아가사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미소 중 가장 환한 미소를 그려냈다.

 

 “서운해요?”

 “슬슬 서운하지 않으려고 해요.”

 

 눈을 굴리고 나름 뻔뻔하게 뱉던 말도 슬그머니 일어서려는 이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수그러졌다. 아가사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제 볼을 얹은 레슬리는 빙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여보, 나 믿죠?”

 “그 말을 안 믿은 지 벌써 5년이에요.”

 “세상에. 그렇게나 오래 믿음을 못 줬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네. 이제부터는 믿음에 꼭 보답하도록 할게요.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참고로 교환, 환불, 반품 모두 안 되는 건 잊지 말고요.”

 “어머나. 막돼먹은 판매자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오늘은 그냥 따로 자는 걸로. 그거면 될 거 같아요.”

 “자기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어요.”

 “여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마음이 멀어질 거라고 믿어요?”

 

 말로는 못 이기겠다니까. 애초에 아가사를 이겨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던 레슬리였으니, 그가 하는 말은 무조건 옳지 않겠는가. 무어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수긍하지도 못하는 얼굴에 아가사는 고개를 기울여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작게 속살거렸다.

 

 “그대를 향한 사랑은 아직 식지 않았으니, 오늘은 좀 따로 자요. 당신만 보면 타버린 프라이팬이 생각나.”

 “자기야. 나예요, 프라이팬이에요?”

 “프라이팬을 안태우는 당신이요.”

 “…정말 실수였어요. 내가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야지. 당신한테 아침 준비를 시킬 수도 없잖아요.”

 “왜요? 시키면 되지?”

 “피곤해서 비틀거리는 사람한테? 여보, 아가사. 나도 양심이 있어요.”

 “양심이 있으면 피곤하다는 사람 붙들고 이런 짓 저런 짓 하면 안 되죠.”

 “그건 아니지.”

 

 가까이 내려온 입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물러나는 만큼 다가선 레슬리는 입술을 머금고 숨결을 섞어내며 마주 속닥였다.

 

 “당신이라서 시키고 싶지 않은 거고, 당신이라서 같이 있고 싶은 거니까요.”

 “말은 참 잘해요.”

 “그럼요, 내가 말 하나만 내세우고 결혼했는데.”

 

 그러니까, 허리를 감싸 안던 손이 슬금슬금 올라와 뒷목을 받쳤다. 푸른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보이는 얼굴에는 어느새 늘 보여주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오늘 밤은 꼭 같이 있어야겠어요. 다짐인지, 선언인지 모를 말이 작은 틈을 타고 넘어왔다. 코끝이 스치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리에서 잇새로 새어나오는 말은 새벽이 터오는 시간까지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늘 그렇듯,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하루가 또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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