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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이별을 준비하는 다섯 가지 방법
작가 : 멀이
작품등록일 : 2018.12.10

[일상물/잔잔물/결혼 이후로 시작하는 이야기/시한부남주/와 지켜보는 가족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은 아가사 당신이니까요.”
“나 나쁜 사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 있어요, 당신.”
“별말씀을.”

시원스레 응수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튼 레슬리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어디 도망을 안 가죠.

“누가 들으면 도망갈 준비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도망갈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저런. 아가사 말은 바로 해야죠. 나는 남겨질 사람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죠. 앞으로 나아가기. 순간 부는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공기마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설풋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레슬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뒷말을 짐작이라도 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표정에 가벼이 입을 맞춘 레슬리는 누가 들을 새라, 조그맣게 속닥였다.

“세상 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겠어요? 몇 없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랍니다, 나는.”
“말은 참 잘해요, 레슬리.”
“그럼. 사업가인데.”

그래서, 레슬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가사는 짙은 녹음 속에 잠긴 자신의 남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멋진 준비를 하는 중인가요?”
“그럼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10화
작성일 : 18-12-25 14:47     조회 : 196     추천 : 0     분량 : 4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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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준비하는 시간

 

 레슬리 렌체스터가 처음부터 병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막힌 인연의 시작은 아마, 레슬리의 아버지이자 전 렌체스터 백작인 클라우드의 외도였노라 훗날 레슬리는 그렇게 회상했다.

 

 “부인, 초대받지 못하신 분은 들어오실 수 없으십니다.”

 “클라우드에게 가서 말해요. 엠마가 왔다고. 그럼 당신들은 비킬 수밖에 없을 텐데?”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또래만한 아이를 데리고 당당히 렌체스터 백작저에 입성한 엠마라는 이름의 부인은 말 그대로 백작저를 발칵 뒤집어 놓기 충분한 것을 몰고 왔으니. 늘 단단하고 의연했던 백작부인은 엠마라는 이름의 사람이 찾아오기 약 1년 전 쯤에 세상을 떴고, 백작부인의 자리가 비었음을 알아챈 엠마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데리고 렌체스터 백작저로 걸음한 것이었다.

 

 “-엠마. 분명 말 했을 텐데.”

 “난 오로지 당신 때문에 연극 무대에서 내려왔어요. 말했잖아요,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아비의 부정을 실시간으로, 똑똑히 보는 기분이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어린아이 특유의 불안감과 더불어 귀족으로 자라오면서 교육 받은 탓에 드는 모욕감까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렌체스터 백작이 여자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레슬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건 레슬리에게 악재로 다가왔다.

 

 시작은 그저 몸이 쉽게 지치고 피로한 것이었다. 쉬면 괜찮아지겠지, 너무 열심히 놀고 공부했나봐. 차근차근 쌓여가는 일상에 배인 무력감과 잦은 병을 이상하게 여길 즈음엔, 그를 고칠 수 있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련님.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그래서. 나 죽냐고. 묻잖아. 대답해.”

 

 귀족의 일원이라면 늘 독에 대비하고 살아야했지만 고작 9살인 아이가 독을 이겨낼 수 있으면 얼마나 이겨내겠는가. 거기에 마구잡이로 섞어 쓴 독이 천천히 그를 말려 죽이고 있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아챌 수 있었을까. 침통한 표정의 주치의는 한 마디 말없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선고했다. 그렇게 소년의 세상은 빛 한 줄기조차 남기지 않고 어둠에 물들어졌다.

 

 으레 그렇듯,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보이는 태도는 ‘거부’였다. 죽음에 관한, 그 어떠한 사실도 자신의 것이 맞음을 인정할 수 없는 것.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 예민해졌고, 화가 잦아졌다. 그만큼 버티지 못하는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갔고, 때때로 찾아오는 엠마의 얼굴에는 조금씩 분명한 희열이 엿보였다.

 

 “도련님, 제발. 이리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그냥 둬. 내가 죽으면 좋아할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죽든 말든. 격렬한 분노와 거부 뒤에는 날 살려달라는 애원과 절망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졌다. 인정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태도로 레슬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처리하고 또 배워나갔다. 죽으면 쓸모도 없는 것이지만 최소한의 일상마저 포기하기는 조금, 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

 

 “아버지가?”

 “예, 그러니 어서 저택으로 가보셔야 합니다.”

 

 채 1년도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소년은 매 1년을 질기게도 계속해서 살아왔다. 거기에는 자신을 타박하는 친구의 도움이 있었을 수도, 자신을 아끼는 이들의 애정 덕이었을 수도 있었으나 그는 늘 초연한 태도를 겉으로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바삐 움직일 무렵, 병상에 누워있던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과 함께 찾아간 저택은 탐욕스런 미소를 애써 꾸민 슬픔 아래 숨겨둔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자신이 자란만큼 같이 자란, 건강한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레슬리, 백작님은 내가 잘 보내드렸단다. 이제 네가 왔으니 장례식을-.”

 “부인.”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끊어낸 말은 생각보다 유연하게 흘러나왔다. 말이 이어질수록 시시각각 굳어지는 표정에 자신이 조금 웃었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와 그의 아들은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겨우 버티고 있던 몸은 다시 꺾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독살당한 것 아닐까. 앓아누운 와중에도 꽤 쓸데없는 생각이 두둥실 떠오르다 가라앉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스스로 실소를 터뜨리며 레슬리는 탁자의 종을 울렸다.

 

 “매파 좀 불러줘.”

 

 이래도 저래도 결국 죽는 것이 마찬가지라면 그렇게 얻고 싶어 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해야지. 정통성 있는 후계자. 또 죽이면 된다고 하는 것일까. 잠깐 정신이 들었을 무렵, 작성해둔 유언장의 사본이 이불의 들썩거림에 가볍게 팔락거렸다.

 

 ❦

 

 “부인이 죽었던가.”

 

 아, 그래. 죽였지. 기억력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했는데, 가끔 심하게 앓고 일어나면 꼭 기억이 한두 군데 듬성듬성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의 아들은? 죽었던 것 같은데. 창백한 얼굴로 맥없이 누워만 있던 아가사를 보다 못해 제 손으로 전부 찾아내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괴롭혔던 것도 같고.

 

 힘없이 깜빡이는 눈동자가 느릿하게 감겼다. 벤자민이 오고, 다시 계절이 돌아 근근이 살아가는 한해살이풀처럼 또 1년을 살아낸 레슬리는 조금씩 살이 빠지고 죽음의 기운이 찾아오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만하면 또 오래 버틴 거지. 지난 저녁 유언장을 몇 번을 고치고 또 고친 탓에 유독 부연 시야를 문질러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가사를 보곤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잘 잤어요?”

 “나름?”

 “레슬리-.”

 “좀만 봐줘요, 자기.”

 “또 무슨 변명을 해보실까.”

 “음, 당신한테 무슨 선물을 줄까, 싶은 것? 곧 생일이잖아요.”

 “어머, 언제 당신이 내 생일을 그렇게 꼬박꼬박 챙겨줬다고? 우리 기념일을 언제 챙긴 적 있어요?”

 “좋아요, 이건 좋은 변명은 아닌 것 같네. 다음에 참고할게요.”

 

 해가 갈수록 능글맞아지는 것은 원래 그런 성품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 때문인 것인지 간혹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아가사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다 이마를 살살 펴주는 손길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요. 식사 준비 됐어요.”

 “요리는 내 몫이라니까. 당신이 더 일 많잖아요.”

 “됐어요. 가끔 한 번인데. 참, 윌리엄이 그러던데. 학교에서 발표수업을 한다고?”

 “아, 그거. 응. 그러더라고요.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나무 1 이라고 하던데.”

 “우리 아들이지만 참 욕심이 없어.”

 “오, 아니죠.”

 

 짓궂은 미소를 한가득 매달고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아가사를 번쩍 안아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식당을 향해 움직이며 레슬리는 즐거이 중얼거렸다. 날 닮은 거죠.

 

 “어머, 이 사람 좀 봐? 당신 욕심 엄청 많아요. 몰랐어요?”

 “이만하면 욕심 없지 않나요?”

 “나한테 사랑 구걸하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걸?”

 “그건 넘어가주면 안 될까요. 뭔 기억력이 이렇게 좋을까.”

 

 슬프게. 허리춤을 꼭 끌어안는 손길에 알았다며 항복을 외친 아가사는 멀뚱멀뚱 앉아 오늘도 그러려니, 싶은 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엄마 좀 구해줘!

 

 “누가 들으면 내가 아가사 괴롭히는 줄 알겠어요.”

 “괴롭힌 거 맞잖아.”

 “맞아, 아빠! 싫다는 사람한테 계속 하는 건 괴롭히는 거랬어!”

 “우리 아가가 너무 똑똑해서 어쩌지? 아빠니까 봐주면 안 될까?”

 “그런 걸로 봐주면 안 된다고도 그랬어!”

 

 세상에, 신이시여. 우리 아가가 드디어 아빠 품을 벗어나려고 해요. 폴짝폴짝 부모의 손을 잡고 뛰며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는 윌리엄은 이미 그 자체로 신이 나 보였다. 발표수업을 엄마랑 아빠 둘 다 봐준다는 것 때문일까, 끝나고 수도에 가서 놀자고 한 것 때문일까. 품에 고이 잠들어있는 유언장을 떠올린 레슬리의 낯빛에 그늘이 졌다.

 

 “엄마, 엄마. 있잖아-, 우리 반 공주님 역할이 사실은 남자애다?”

 “그래?”

 “응! 여자애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어. 근데 엄마, 왜 여자애는 학교에 못 나와? 데브도 나랑 나이가 같은데 학교 안 나오잖아.”

 “글쎄-, 왜 그럴까? 아들 의견은 어때?”

 “모르겠어. 솔직히 나보다 데브가 더 아는 거 많은데, 사람들은 내가 더 똑똑하다고 한단 말이야.”

 “그럼 아들이 이담에 여자애들도 학교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까?”

 “나중에? 지금은 안 돼?”

 “안 될 이유가 없지. 그럼 의회 아저씨들한테 편지 써볼까?”

 

 종알종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는 그의 부모가 채 인지하기도 전에 훌쩍 자라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입가에 걸리는 미소는 다정해서, 마치 꿈결처럼 다가오곤 하였다.

 

 “우리 아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아이의 머리를 힘차게 쓰다듬자 머리모양 망가진다며 빽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아빠도 이겨먹으려고 해. 상처받았다며 가슴팍을 두드렸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도란도란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마냥 열심히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 아빠! 빨리 와!”

 

 어서! 자신의 빈손을 들고 휘적거리는 폼이 손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 보여,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귀여워 죽겠다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냥, 언제까지고 머무를 사람은 자신이고 떠나갈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은 온기가 손 안에 잡혔을 때엔 모든 생각이 일순간 날아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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