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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이별을 준비하는 다섯 가지 방법
작가 : 멀이
작품등록일 : 2018.12.10

[일상물/잔잔물/결혼 이후로 시작하는 이야기/시한부남주/와 지켜보는 가족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은 아가사 당신이니까요.”
“나 나쁜 사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 있어요, 당신.”
“별말씀을.”

시원스레 응수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튼 레슬리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어디 도망을 안 가죠.

“누가 들으면 도망갈 준비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도망갈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저런. 아가사 말은 바로 해야죠. 나는 남겨질 사람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죠. 앞으로 나아가기. 순간 부는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공기마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설풋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레슬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뒷말을 짐작이라도 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표정에 가벼이 입을 맞춘 레슬리는 누가 들을 새라, 조그맣게 속닥였다.

“세상 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겠어요? 몇 없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랍니다, 나는.”
“말은 참 잘해요, 레슬리.”
“그럼. 사업가인데.”

그래서, 레슬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가사는 짙은 녹음 속에 잠긴 자신의 남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멋진 준비를 하는 중인가요?”
“그럼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16화
작성일 : 18-12-25 14:59     조회 : 208     추천 : 0     분량 : 7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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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de. 살아가는 시간

 

 완연한 봄날, 레슬리 렌체스터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초록빛깔의 융단 위에 서 있는 검은 옷은 주변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이질적인 것처럼 보였다. 윌리엄은 목 끝까지 힘껏 조인 타이를 풀어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가만히 자신의 어머니 곁에 서 있었다.

 

 ‘어쩜. 그래도 오래 살았네요.’

 ‘1년 밖에 못 산다 하더니 3년은 살았네.’

 ‘재산 상속은 다 준비했겠어요.’

 

 속닥거리는 말은 마치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파드득 귓가를 울렸다. 저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아는 걸까. 윌리엄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말은 비웃음이기도, 동정이기도, 안쓰러움이기도, 부러움이기도 했다. 그 모든 시선을 받아내면서도 아가사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남편이 땅에 묻히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는다고 쑥덕거리는 말이 점차 또렷한 형태를 갖출 무렵, 윌리엄은 그대로 굳은 것만 같은 아가사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깜빡인 아가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마주보았다.

 

 “피곤하니? 이제 다 끝났으니까 들어가서 쉬려면 쉬어도 괜찮아.”

 

 자신을 걱정해 불렀다기보다는, 그냥 그 나이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윌리엄은 잠시 멈칫거리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저 말을 더 듣고 있다가는 아빠의 안식을 방해할 것만 같아서.

 

 “준비를 해? 남의 장례식에 초 칠거라면 부인, 그만 가세요. 안 말려요.”

 “어머, 로넨 영애. 왜 발끈하고 그러세요. 마지막에 내려와서 지내셨다더니, 정을 주신 모양인데-.”

 “부인!”

 

 바로 가까이 다가가 숙덕거리던 이의 멱살을 잡아챈 에디스는 입만 방긋 웃는 모양새로 살벌한 말을 쏟아냈다. 그 주름 자글자글한 입술 한 번만 더 멋대로 놀렸다가는 댁 파산 신청하는 꼴 보게 될 거예요.

 

 “어, 어머. 이렇게 말을 험하게 해서야.”

 “시작은 부인이 하셨잖아요. 망자의 가는 길에 스캔들까지 얹히시려고? 그래놓고 평화 속에 잠들라고 말하시는 건가요?”

 “로넨 영애!”

 “에디, 그만해.”

 “야, 야. 그래. 그만해라. 사실도 아닌 것에 힘 빼지 마.”

 

 에디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끈 벤자민은 멱살이 잡혔던 이를 등지고 서서 얼굴을 이리저리 찡그리는 것으로 분위기를 표현했다. 이 열정 가득한 친구야, 좀 진정 좀 하라고.

 

 “다 말씀 나누셨으면 이제 할 일은 없으니 돌아가시면 되겠네요. 나가는 문은 저쪽입니다. 남문은 사람이 많아서, 북쪽으로 나가셔야 할 것 같아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예의 우아한 미소를 그린 아가사는 조곤조곤 후미진 정원의 끝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망자가 가는 길이라고 잘 사용하지도 않는 북문을 굳이 언급한 것에 벤자민은 상황도 잊고 기침을 가장한 웃음을 흘려냈다. 야, 레슬리. 걱정할 건 없겠다. 잘만 한다.

 

 “바쁘신 와중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렌체스터 가의 고문 변호사인데요, 뭘.”

 “레슬리랑 했던 계약은 끝난 것 아시죠? 새로 하셔야 해요.”

 “아니, 아가사. 아니. 부인. 엄연히 계약상으로는-,”

 “레슬리가 살아있을 때, 까지였어요.”

 

 미치겠네. 친구가 죽어서 보내는 길에도 결국은 또 살아갈 걱정을 하고 있다. 이 상황이 못내 우습고 서러워, 벤자민은 우울하게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피고용인은 고용주의 말을 들어야죠, 뭐 어떡해.

 

 모든 사람을 정원에서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 아직 마르지 않은 검은 흙과 그 위의 비석을 아가사는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시간이 흘러갔다. 새싹이 움트는 계절을 지나, 누군가가 가장 사랑하는 녹음이 담긴 순간 역시도 스쳐갔다. 빨갛게 물이 들어가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코코아를 마시고 있던 윌리엄은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윌! 윌리엄! 너희 엄마 어디 있니?”

 “엄마요? 맨날 있는 곳에 있겠죠.”

 “없어. 안 보여. 어디 간다고 하지 않던?”

 “모르겠는데요.”

 

 윌리엄은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주 멀쩡하게 일상을 보냈고, 간간이 농담을 던지기도 했으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에디스는 생각이 다른지, 깊게 파인 미간을 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너희 아빠 유품 정리 안한 거 알고 있어?”

 “아빠 물건이라면 가끔 거기 가서 식사해서, 그냥 두자고 엄마가 그랬는데요.”

 “내가 미쳐. 윌, 진짜 미안한데 엄마 보면 나한테 꼭! 연락하라고 해줄래? 이모가 또 나가봐야 해서.”

 “그럴게요.”

 

 아주, 아주 가끔 날이 좋은 날 마차를 타고 나가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거야 누구나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윌리엄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의 죽음은 늘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하루, 낮, 한나절, 반나절, 그리고 한 시간. 계속 기대하는 시간은 달라지더라도 조금은 더 세상에 살아있을 것이라 그렇게 기대해버리게 되니까. 기대를 버리는 것과 동시에 다시 기대를 하게 되니까.

 

 그래서 아주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에디스가 아가사를 찾아 분주히 헤매던 날도 싱겁게 지나가고, 모처럼 집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엄마를 발견한 윌리엄은 재빠르게 에디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길게 늘어진 햇빛을 등 뒤로 받아내며 간간이 손을 움직이는 우묵한 그림자는 그 홀로 절망에 남겨진 것처럼도 보였다.

 

 “아가사!”

 

 문을 쾅 열어젖힌 에디스는 성큼성큼 걸어가 언젠가와 같이 책상을 탕,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미간을 좁힌 아가사는 분노에 휩싸인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윌리엄? 미안한데, 알버트 좀 찾아줄래? 내가 뭘 좀 가져왔거든. 이후에 할 말을 떠올린 에디스는 윌리엄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뭐하는 짓? 너, 너 레슬리 유품 정리도 안 했다더라?”

 “내 남편 물건 내가 정리 안 하겠다는데 왜 네가 뭐라고 하니?”

 “제발, 제발 좀! 누가 너한테 슬퍼하지 말라고 했어? 슬퍼해도 괜찮아. 당연한 거잖아. 왜 혼자 꾹꾹 눌러 삼키고 있냐고. 너 한 번도 안 울었다며.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에디스. 에디. 너도 알겠지만 난 렌체스터 백작 대리인이자, 백작 부인이야. 나는 내가 짊어진 것의 무게를 알아. 네 말대로 슬퍼만 한다면 여자라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줄 모른다고 하겠지. 지금처럼 의연하게 지낸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가 되는 거야. 난 어차피,”

 

 친구의 눈에 가득 맺힌 눈물을 가만히 닦아준 아가사는 말을 이어 맺었다.

 

 “그럴 거면 앞으로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여야겠지. 그뿐이야.”

 “난, 네가, 지금 너무 미워. 널 아끼는 사람 앞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되잖아. 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래도 괜찮잖아.”

 “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거야.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 신경 쓸게.”

 “…밖에 레슬리 그림 가져왔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정리해야하니까. 그림 보관하던 방에 가져다 달라고 했으니까, 그건 좀 정리해.”

 “조금 있다가-, 그래. 알았어. 갈게. 간다, 가.”

 

 이러다 한 사람 잡겠네. 피식 웃으며 레슬리와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방으로 걸음을 옮긴 아가사는 벽면을 가득 메운 익숙한 그림들에 가만히 숨을 죽였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착각할 만큼 빛나는 풍경들이 캔버스 위에서 한들거리고 있었다. 간간이 그 사이에 숨어 있다가도 불쑥 나오는 사람을 아가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완성 안 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붓을 쥐고 있지 않았으니까. 무언가 오래 쥐고 섬세한 작업을 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 위에 남은 붓의 흔적을 눈으로 더듬으며 미처 벽에 걸지 못한 그림들을 가만가만 세어보았다. 이건 내가 없을 때 그린 그림인가보네. 윌리엄만 있고, 집에서도 그렸고.

 

 분명 죽은 사람인데, 그가 남긴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꼭 당장에라도 나타나 설명을 해주며 칭찬을 바라는 사람이 뒤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 쥐고 몸을 돌리던 아가사는 협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수첩을 발견하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진짜 안 보여주던 건데. 일기장인지 메모를 해둔 것인지 알 수 없어 가끔 몰래 열어보려고 했지만 필사적으로 막던 이가 생각나 이제껏 열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세월을 따라 귀퉁이가 닳아진 낡은 겉표지를 톡톡 두드리다 아주 조심스럽게 잠금을 풀고 그 안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예산 관련 9시, 윌리엄 식사 12시.

 

 영지로 내려가기 전의 메모인가. 정갈한 글씨가 종이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보다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4시 오페라, 목걸이 잊지 말 것. (중요)

 -XXX.3.5 윌리엄 걸음마 - 생각보다 빠른 거 아닐까.

 -아가사 약 하루 4번 잊지 말기.

 -멜 휴가 9~13일

 -아론 발견->사망 확인

 

 “아론? 아, 엠마 부인 아들.”

 

 찾고 있었는지는 몰랐는데. 아무래도 윌리엄 낳고 정신없던 몇 년 사이의 메모인 모양이었다. 비슷한 것들이 적혀 있음을 확인하고 아예 훌쩍 건너뛰자 슬슬 자유분방하게 적힌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모자 구매하기 ; 아가 살 다 타겠어.

 

 -피로 회복 - (급하게 날아간 글씨)

 

 -아가사 머리끈

 ->찾음

 

 -“난방”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둠)

 

 “별걸 다 적었어.”

 

 소소하게 필요한 것들이나 생각해둘 것을 적어둔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어 내렸다. 펜이 지나가면서 남은 잘은 요철을 따라 그리며 종이를 넘긴 아가사는 잠시 몸을 굳히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연필로 그린 듯, 두 페이지에 걸쳐 그려진 그림은 그 언젠가 노을이 짙은 날, 윌리엄과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그 때가 흑백의 세계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뭐하냐고 물었더니 말도 안 해줬지. 자신이 그림을 망가뜨릴까, 한참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가사는 귀퉁이에 담긴 형상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거울 속 비친 모습이 반쯤 뭉개진 채, 남아 있었다. 그 많은 그림 가운데에 이것만 당신이 있는 거 알아요?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황급히 종이를 넘기던 아가사는 그 뒤에 적힌 글자를 읽곤 젖어드는 눈가에 헛웃음을 뱉었다.

 

 -Memory

 

 “꼭 중요한 건 말 안 해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미안해요.

 

 -주기가 짧아짐->약은 포기

 

 -윌리엄이 날 그려줬는데 아무래도 당신을 닮았나 봐요. 하니까 당신이 화냈어. :(

 

 -아가사 자는 거 그리다가 변태 소리를 들었, 아 여보…. (형태만 갖춘 얼굴 그림 아래)

 

 -데네브라는 친구가 놀러왔다. 딸을 가졌으면 어떨까 싶다가 당신이 생각났어요.

 

 -(그냥 원만 몇 개 그림)

 

 -유언장을 새로 준비했다. 화내지 않았으면.

 

 -어쩌다보니까 왜 이게 일기장이 되었는지.

 

 -유치하게 레슬리 렌체스터 소유, 읽지 마시오. 적어둘까 하다가 당신이 볼 것 같아서 말았어요.

 

 -매번 당신 이 노트 기웃거려요. 무서워 죽겠네. (뿔난 황소)

 

 곳곳에 적힌 글귀와 그 아래의 간단한 표정들은 그를 쉽게 유추할 수 있어, 아가사는 눈을 덮곤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금 헛웃음을 뱉었다.

 

 -아무래도 손 쓸 도리가 없는 것 같아요. 정말, 정말 오래 자고 일어났어요. 여전히 당신은 잘 잤느냐 인사해주지만.

 

 -보고 싶어요.

 

 -윌리엄의 나무 연기를 보고 싶어서 주문했더니 다 컸다는 소리를 들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데네브 어머니께서 애플파이를 구워주셨다. 자신의 이름보다 아이의 부모로 불리는 기분은 어떨지 잘 모르겠네. 여보, 당신은 어때요?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느꼈는데 나 당신한테 청혼을 한 적이 없어요. 이혼당해도 할 말은 없지만 버리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알면 잘 하지 그랬어요.”

 

 -다음 생에 같이 해달라고 했더니 현명한 그대는 조건을 걸었네요. 꼭 지키도록 할게요. 근데 이거 다 실시간으로 읽고 있는 중 인건 아니죠, 설마?

 

 -살고 싶다.

 

 -비가 와서 창을 못 열었더니 답답(이후 알아볼 수 없는 글씨)

 

 -죽음에 대해 묻는 아이에게 답을 하지 못했어요. 큰일 났어. 나 이제 그대한테 다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나봐. 수첩이 그대 같네요. 이 말을 당신한테 하면 뭐라고 할까?

 

 “내가 수첩 같아요?”

 

 -‘내가 수첩으로 보여요?’ 라고 하지 않을까요? 맞췄나요?

 

 “레슬리 멍청이. 틀렸어요.”

 

 이제는 정말 띄엄띄엄 있는 글씨 사이로 꽃을 그린 그림이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 아래 적힌 꽃말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어서 피식 웃은 아가사는 얼마 남지 않은 종이를 뒤적거렸다.

 

 -깨어 있을 때 꽃 선물을 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그려보는데, 문제는 내가 꽃을 꺾으러 나갈 수가 없다는 거네요. 큰일이야.

 

 “그러고 보니까 나 진짜 당신한테 꽃 선물은 못 받았어요. 남편 실격이네, 실격이야.”

 

 -생각해보다가 영원히 피어있을 꽃을 선물할까 해요.

 

 이번에는 색깔이 있는 펜을 들었는지 흰 종이 위에 노란 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리고 있었다. 결혼식의 신부가 들법한 화려한 부케 같은 꽃다발을 보고 아가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제 울음을 억지로 삼켜냈다.

 

 -일단 당신이 결혼식에서 들었던 부케랑,

 

 언젠가 무슨 꽃을 좋아하냐 물었던 것도 같다. 지나가듯 물었기에 마찬가지로 지나가듯 답했는데. 분홍빛 리시안셔스 꽃을 한가득 그려낸 종이 아래에는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이 꽃이 질 때까지 사랑할게요.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이게 뭐야….”

 

 글자가 남은 마지막 페이지에는 생각보다 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억지로 삼켜내던 울음이 결국 터져 나와 손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 마냥 엉엉 슬픔을 토해내는 것이 따갑게 방 안을 울렸다.

 

 -내 모든 시간은 당신을 사랑하기에 의미가 있어요.

 당신과 함께한 내 모든 시간은 사랑이었음을.

 

 -다시 만나요.

 

 잠시 머뭇거린 듯 잘게 흔적이 남았다. 사랑합니다.

 

 이미 멈춘 시간 앞에 있는 사람이 되려 나아가는 이를 위로하는 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수첩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어재낀 아가사는 아주 어린 시간과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내보였던 투정을 사라져버린 이에게 쏟아냈다.

 

 내가 진짜, 당신 때문에 못 살아요. 혼자만 그렇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그래놓고 사랑한다고만 하면 나보고 어쩌라고. 다시 살아가라면서. 그래서 억지로 참고 있는데 왜 건드려요, 건드리길. 진짜 오늘만 울 거야. 당신 생각하면서 죽어도 안 울어요. 보란 듯이 잘 살 거야.

 

 “‥진짜, 당신,”

 

 아주 옅은 틈새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에디스는 조용히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미련하게 왜 참아, 참길. 엄마의 울음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 앞을 기웃거리던 윌리엄은 방 안으로 들어가 엄마의 등을 토닥거리며 울먹였다. 엄마, 왜 울어. 울지 마. 응? 도리어 눈물을 쏟는 아이의 모습에 울음이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아가사는 윌리엄을 보듬어 안곤 힘을 주어 꼭 끌어안았다.

 

 보란 듯이 잘 살아서, 나중에 만나면 구박이나 더 해야겠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미묘한 상태를 손으로 덮어 가린 아가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시, 살아갈 시간이다. 순간을 채워나갈 추억을 만들어낼 시간이다.

 

 「상실은, 어느 한 부분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다더라. 그 시간을 그렇게 둘 것인지, 다른 것으로 채워 넣을 것인지, 그것은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나는 기꺼이 그 시간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채워 나가고 있다.」

 - 아가사 렌체스터의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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