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수리야! 애들 명함 준비해 왔나? 너는 사소한 일을 워낙 잘 잊어먹었어 내가 항상 불안해서 일을 못 맡기겠다. 동원이 네가 얼른 일 배워. 저 놈도 이제 기력이 떨어져서 예전만 못해”
권태가 또 수리에게 말려 들어 있는 분명했다. 나이가 들면 잘 삐친 단 말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전국 최고의 주먹잡이도 세월의 위력에는 어쩔 수가 없다는 걸 증명이나 하듯이 심기가 심하게 뒤틀려 묻고 있다.
“형님! 그만한 일에 토라지고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요양병원에 가더라도 같이 갈 테니까 아무 염려 마세요. 그러니까 젊었을 때 나쁜 짓 안하고 살았어야죠. 혹시 벌써 밤길이 무서운 건 아니죠?”
“아니! 무섭다. 고양이만 지나가도 똥이 찔끔 나온다. 참! 이영재 그 놈 건물은 어떻게 되가?”
수리 얼굴이 갑자기 당황해 하고 있었다. 권태 눈에 딱 걸리고 말았다.
“또 까먹었지. 그러니 너는 안돼. 동원아! 그 일은 이 일 끝날 때까지 다른 애 맡기고 저 놈이 더 깜빡 거리기전에 알맹이만 쏙 가져와. 이 놈아! 메모 해라. 메모”
잠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동원에게 시선을 돌려 묻고 있었다.
“동원아! 그 일 내가 이야기 안 했어? 지난 번에 얘기 했는데. 물이 줄줄 세도록 하라고 했잖아. 형님도 그때 뭐라고 했는데… 메모 좀 하세요”
“야! 그런 걸 왜 메모하냐? 나중에 내 발등 찍으라고?”
권태가 히죽이 웃으며 눈을 깜빡 대며 수리를 쳐다 본다.
“동원이 너는 메모 안 했냐?”
수리가 동원을 쳐다 보며 묻는다.
“형님! 저는 아직 한글 다 못 배웠어요”
수리가 동원이 보고 어이없다며 핀잔을 주고 권태에게 묻는다.
“그래! 자랑이다. 이 놈아! 형님 메모는 자기만 알아볼 수 있게 적어두면 되지 뭐. 아무도 이해 못하게. 허허! 특히 우리 같은 업종은 괜히 메모해봤자 우리 발등을 도끼로 찍는 거나 같잖아요. 동원아! 지금 이 말은 농담 아니다. 이번 일이 마칠 때까지 절대 메모 같은 건 하지 마라. 형님이야 글자를 모르니 걱정이 안 되는 데 네가 걱정이다. 뭐든 처음 배우면 신기해서 나서기를 좋아하잖아. 글자도 재미있다고 듣는 대로 다 적으면 안돼. 형님이 예전에 골프를 가르쳐 달라해서 가르쳐드렸더니 3개월 지나니 나를 아예 가르치더라. 그래서 내가 형님에게 한글은 안 가르쳐줬어”
갑자기 신문이 수리 이마로 날아갔다.
“아이구 이 놈아! 이 놈아! 다른 건 맨날 까먹으면서 어떻게 그건 안 까먹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동원이하고 하던 일이나 마무리 해”
보스인 권태가 총무부에서 올려둔 두꺼운 장부를 펼치고 있다. 수리는 목소리를 낮춰 동원이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영어도 한글 배우듯이 배우면 바로 익혀져. 왜 싸움도 처음엔 무섭다가 자꾸 하면 늘잖아. 영어도 마찬가지야. 센 놈 만났다 생각하고 식은 땀 좀 흘려. 잘 봐! 꼬부랑 글씨가 다 똑같잖아. 그건 나중에 보고 그 옆에 한글부터 봐. 설마 한글을 또 까먹은 건 아니지? 애들 깔끔하게 차려 입혀 그 업체들을 찾아가서 미수금을 받아 오라는 말이야. 자! 여기 애들 명함도 있다”
동원이가 한 묶음의 명함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묻는다.
“이 회사는 어디죠? 그리고 왜 제 이름이 아니네요. 제가 한글은 다 아는데…”
“야! 임마! 그럼 본명으로 해 줄까? 그래도 부장이잖아. 다른 애들도 현장에 가서는 명함에 적힌 이름으로 서로 부르라고 해. 가능하면 이름은 부르지 말고 직책을 부르고. 사원은 하나도 없으니 박과장님! 김대리! 이렇게 부르란 말이야. 머지않아 이 회사 계열사의 대표가 될 사람이 깡패 출신이라는 말은 안 들어야지. 그래도 주먹질할 때처럼 열심히 붙어 봐! 처음엔 적응이 힘들겠지만 참아. 이제 전업을 해야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동원이 이런 일에 어색한지 긴장된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너 이놈! 수리를 무시했잖아. 그런데 네가 할 수 없다는 건 이놈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하는 셈밖에 되지 않는데 너는 자존심도 안 상하냐?”
권태가 팔짱을 끼고는 허리를 뒤로 젖히며 동원을 쳐다 본다.
“그거 하고는 틀리죠. 제가 수리 형님을 언제 무시했어요? 눈꼴 사납다 했죠”
“그 말이나 그 말이나 같지. 그런데 틀릴 게 뭐 있어? 배우면 되지. 우리가 사양산업에 매달려 있다는 다 같이 죽잔 말과 같아. 저기 있는 애들은 어쩌고?”
눈에 힘을 준 수리가 동원을 노려본다.
“그럼! 뭐부터 시작하면 되죠? 제가 그 신규 아이템에 대해서는 감이 잘 오지 않지만 한번만 형님 따라서 현장 경험을 하면 바로 따라 갈 건데... 허허허"
권태도 수리도 동원을 차기 보스로 지명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벌써 서너 단계의 자기가 할 일을 알아 차린다.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행동에 들어가는 행동대장의 소임을 다하는 '답다' 말이 점점 더 잘 어울렸다.
“일단은 입대하는 머리 한 놈들 다 빼고 검정 양복은 다 있으니 양복 살 걱정은 없고… 그리고 어디 보자. 음… 단추 두 개 푸는 놈들 교육 잘 시켜. 아니! 아예 넥타이 매라고 해. 일단 최대한 깔끔한 영업사원처럼 보여야 해. 허허허. 그리고 자! 이 명함을 들고 강성호가 납품하는 가장 소규모 회사들부터 찾아가서 숨통을 죄여. 그 사람들 다루는 법은 내가 가르쳐줄게. 아니다. 가르쳐줄 것 없이 네가 애들을 겁줄 때 그 애들의 반응을 떠올려봐. 살살 기지. 그렇게 하면 돼. 사근사근하게 기는 놈들 봤지. 그렇게 하면 돼.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물건’하지 말고 ‘제품 회수합니다’하고 점잖게 말하면 그걸로 끝. 오케이? 일단은 내하고 같이 가자. 내가 현장 교육을 시켜주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뭐 형님까지 가시게요. 허허허”
그날 이후로 동원은 또 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결과가 긍정적으로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고 강성호의 숨통은 점점 더 조여졌고 마음은 다급해져 갔다.
그들의 계획은 강성호 같은 중견 공장들이 아닌 강성호에게 납품 받는 작은 공장들에 대한 압박이었다.
그들에게 스스로 백기를 들던가 아니면 감옥 행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백기는 석유화학제품이 불법으로 판매됐기 때문에 반품하라는 점잖은 요청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그 제품이 저희 회사에서 불법으로 유출되었습니다. 아마 강사장님께서 실수를 하신 것 같습니다. 반품해주시기 바랍니다”
임운영의 차와 운수회사에서 입수한 전화번호로 그 동안 불법 거래한 회사들에게 일일이 조직원들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사근사근하게 안내 전화를 했지만 주먹세계에서 단련된 그들의 목소리는 받는 사장들에게는 위협이었다.
이런 위협적인 전화에 대한 입 소문은 작은 공장에게까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양아영은 쇄도하는 반품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이미 지급한 제품 비용에 대한 환불도 같이 포함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