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에 도둑질을 당한 회사에서는 아무런 대응도 없었다.
도둑질을 했다고 고발을 해야 정상인데 그런 법적인 절차는 아예 없었다.
오히려 이런 회사들이 더 무서웠다.
이번 들통으로 다른 회사들도 자체 조사를 벌이고 난 뒤 불쑥 나타나 조사를 시작하면 양아영의 입장에서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일 게 불을 보듯이 뻔한 사실이었다.
밀거래 중에는 양아영이 아는 회사나 자료보다 모르는 회사가 더 많았다.
대부분이 신랑만 알고 있고 양아영이 모르는 회사의 소 사장들끼리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자료나 정보가 거의 없었다.
반응이 없는 회사들도 이번 사건을 대부분 알고 있지만 어떤 흐름으로 가는 지 추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들 회사들 중에는 양아영의 회사와 관련된 회사가 많아서 만약에 어느 한 회사가 걸려들면 줄줄이 걸려들게 돼 있었다.
이런 압박이 가중되질수록 양아영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된다는 심정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회사에 가서 자수를 할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반품된 제품을 실은 탱크로리들이 하나 둘 공장에 세워지더니 이젠 공장 밖의 도로들도 점령해 세워져 있었다.
그 차들과 기사들이 마치 사형 집행을 구경하기 위해 온 행렬과도 같았고 양아영은 그들 앞에 서 목이 매여있는 사형수 같았다.
피부색이 다른 직원들은 불법체류자 단속을 피해 모두 도망쳐버렸고 남편도 같이 안절부절 하나 싶더니 사라져 버렸다.
어디 한 곳도 도움을 청할 때가 없던 양아영은 무작정 울산으로 내려갔다.
며칠 내내 임운영에게 전화를 해서 겨우 받아낸 정보가 보세장치장에 가면 정수리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무작정 울산으로 향했다.
그 사람이 지금 뭐 하는 사람인 줄은 몰라도 그는 단 한 줄 밖에 없는 지푸라기였다.
오늘 안에 끝내고 싶었다. 만약에 끝내기 못하면 최악의 경우도 생각했다.
죽고 싶었다.
발끝에 힘이 더 세게 들어갔다.
벌써 서산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했다.
경찰서라도 찾아가서 이 사람 집을 알아내 찾아가고 싶은 심정으로 페달을 밟았다.
비록 남편이 저지른 사건이었지만 이번 사건의 시발점은 울산이었고 연계된 사람 중 하나가 김경일이었으면 정수리도 분명히 연관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임운영이 그 사람을 보세장치장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확신이 들었다.
그는 울산에 살고 있다.
비록 연관이 없더라고 그는 학창시절 마당발이었다.
희망이 쏟아났다.
“형님! 강성호 마누라가 형님 뵈려고 내려오고 있답니다”
임운영이 살 방법을 확실히 알았던지 제 발로 입사 신청을 했고 권태는 받아들여 주었다.
“어떤 새끼가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했어? 요즘 위계질서가 많이 느슨해진 거 아냐? 동원이 너부터 시범케이스로 해 줄까?”
분명한 건 수리는 이 조직의 조직원이 아니었다.
이 일이 벌어지고 자주 만나다 보니까 이 사람이 위계질서에 대해 뭔가 망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정상이지만 수리는 벌써 이 일에 너무 깊숙이 관여가 돼 있었다.
만약에라도 이번 일이 들통이 나면 이번에는 보스가 아닌 수리가 쇠고랑을 차야 한다는 보스와 수리와의 오랫동안 그 둘만이 지켜 온 무언의 서약이었다.
동원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수리에게 흡수되어 수리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 죄송합니다. 제가 단속을 잘못했습니다”
동원이가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러 세웠다.
“어떤 놈이야? 이 새끼들! 우리 회사 직원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놈들이 있어?”
“예! 없습니다”
전원이 외부에서는 이 회사! 이 조직원의 일원이라고 말을 할 경우 엄벌을 받게 돼 있다. 조직원들 일부만 여기에 상주하고 대부분은 직장생활이나 건설업을 하고 있었다.
“엎드려 뻗쳐”
일제히 엎드려 뻗쳐 동원의 다음 지시에 이행할 준비 자세가 되어 있다.
“시작”
아주 낮은 저음의 명령을 내리고 회의실 밖으로 나간 동원은 200대의 퍽 소리가 동시에 나는 걸 듣고 권태에게 엄중한 경고를 또 받았다.
그날 임운영은 회사의 사규인 ‘발설금지’을 어겨 또 동생뻘인 직원들에게 딱 400대의 몽둥이를 엉덩이에 맞아야 했다.
양아영이 보세장치장 앞에 차를 세우자마자 산적 같은 남자가 문을 열고 내리라고 하고는 조수석에 앉히고는 운전을 직접 해서 강변으로 갔다.
“아영이! 오랜만이야. 여전히 저돌적이야. 자식!”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하소연을 시작할 지 전혀 떠오르지 않고 머리 속엔 밤인데도 하얀 구름만 떠다녔다.
“물건 다 넘겨. 그 대신 자네 신랑 저장 탱크에 보관해야 해. 여기로 다시 반품하면 그땐 나도 손을 못 셔. 자네 신랑이 ‘나 도둑질 했소’ 하는 꼴밖에 안돼”
앉자마자 옛날의 부끄러운 행실부터 들먹여 핀잔을 주고는 바로 냉정하게 말을 했다. 양아영도 해후에 어떤 감흥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냉철해졌다.
“지금 소문이 많이 나서 신랑 이름으로 판매를 할 수 없는데 어떡하죠? 전량 다 회수해가시는 거죠? 물론 그 동안 들어간 운송료나 자질구레한 지출은 저희가 책임져야 한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자식! 너 같은 마누라를 두고도 네 신랑은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어? 등신 같은 새끼!”
그의 말투는 화난 오빠가 처남의 잘못을 질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건 비단 신랑을 원망해서가 아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염없는 눈물이 발 밑으로 뚝뚝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 사람은 이 꼴이 보기 싫은지 차에서 내려 버렸다.
강변에 내린 그는 걷지 않았다. 그냥 물끄러미 서서 가로등도 없이 달빛에 비친 강물을 팔짱을 낀 채 쳐다 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오래 전 갯바위에 서서 칠흑 같은 바다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과 똑같았다.
그때 저 곁에 다가가다가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날도 연어가 항상 한발 앞섰듯이 한발 앞서 그 곁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연어가 없다. 문득 그 생각에 헛웃음이 툭 튀어 나왔다. 왠지 자신이 측은해지고 가여워 보이기도 하고 수치심도 밀려 엄습해오고 있었다.
“내려! 갑갑하잖아!”
차문을 열고는 그가 손을 잡아 당겼다. 잠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 당시에도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손은 하나의 장난질에 불과하던가 그의 아무렇지 않은 하나의 습성이었다. 갓 스물을 넘은 아가씨에게 그렇게 내민 손에 오해를 하지 않은 아가씨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벌써 와 있었다.
차에서 내렸다.
“나쁜 놈!”
아영은 그의 가슴을 두드리며 펑펑 눈물을 흘렸다. 등에서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곧 가슴에도 느껴졌다. 얼마나 흐느끼며 울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눈물이 마를 때까지 밀어내지 않고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