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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이별을 준비하는 다섯 가지 방법
작가 : 멀이
작품등록일 : 2018.12.10

[일상물/잔잔물/결혼 이후로 시작하는 이야기/시한부남주/와 지켜보는 가족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은 아가사 당신이니까요.”
“나 나쁜 사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 있어요, 당신.”
“별말씀을.”

시원스레 응수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튼 레슬리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어디 도망을 안 가죠.

“누가 들으면 도망갈 준비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도망갈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저런. 아가사 말은 바로 해야죠. 나는 남겨질 사람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죠. 앞으로 나아가기. 순간 부는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공기마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설풋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레슬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뒷말을 짐작이라도 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표정에 가벼이 입을 맞춘 레슬리는 누가 들을 새라, 조그맣게 속닥였다.

“세상 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겠어요? 몇 없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랍니다, 나는.”
“말은 참 잘해요, 레슬리.”
“그럼. 사업가인데.”

그래서, 레슬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가사는 짙은 녹음 속에 잠긴 자신의 남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멋진 준비를 하는 중인가요?”
“그럼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5화
작성일 : 18-12-17 14:05     조회 : 200     추천 : 0     분량 : 6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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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

 

 푸른 녹음의 색이 조금씩 바래지고, 천천히 앙상한 그 가지를 드러내는 계절이 돌아왔다. 지난 밤 사이에 내린 눈은 녹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 위를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한바탕 뒹굴고 들어온 윌리엄은 늦잠을 자는 엄마를 깨우려 살금살금 걸어가다, 지난밤을 꼬박 샌 아빠의 손에 덜렁 위로 잡혀버렸다.

 

 “아빠-.”

 “쉿. 엄마 자잖아. 아빠랑 놀까?”

 “아빠 맨날 물감 냄새 난단 말이야.”

 

 우리 아들 참 솔직하구나. 그래서 나한테 안 왔나? 새롭게 충격을 받은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버둥거리던 윌리엄은 더 단단히 붙잡힌 몸에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엄마 깨우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아빠는 맨날 엄마를 잘못 건드리면 죽을 사람처럼 대하고. 아이를 들어 눈높이에 맞춘 레슬리는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 그럼 아빠랑 목욕할까? 눈밭에서 굴렀는데 안 추워?”

 

 따뜻하게 씻고 나오면 코코아 타줄게. 유혹적인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윌리엄은 결국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욕조에서 참방참방 나는 물소리에 아가사는 부유하는 정신을 잡아채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누가 물 안 잠갔어. 수로 얼어버리면 안 되지만 저건 아닌데. 어제 저녁까지도 빠듯하게 백작가의 예산과 오두막의 경비를 계산하던 이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온통 숫자뿐이어서, 아가사는 벌떡 일어났다가 핑 도는 머리에 다시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이 놈의 저혈압을….”

 

 마침 목욕이 끝났는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고, 가볍고 묵직한 발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강 상황을 짐작한 아가사는 편안하게 숨을 고르며 다시 가물거리는 시야에 몸을 웅크렸다.

 

 “여보, 아가사. 자요?”

 

 추위를 잘 타는 아가사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잘 데워둔 담요를 들고 이불 위로 덮어주며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레슬리는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자면 안 되는데? 밥만 먹고 자요.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행동에 더 잠이 오는 것을 저 이는 알까. 아가사는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돌려 레슬리를 마주 끌어안고 그 품에 파고들며 답지 않게 칭얼거렸다.

 

 “너무 늦게 잤단 말이에요, 좀만 봐줘요.”

 “저런. 그래도 밥은 먹어야죠. 건강 상하면 내가 슬퍼요?”

 

 말은 어서 일어나라면서 손은 차분하게 등을 도닥거리는 태도가 우스워 픽 웃음을 흘리던 아가사는 문득 생각나는 것에 눈을 겨우 뜨고 고개를 올려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마주한 시선에 빙긋 눈웃음을 그린 이가 눈꺼풀에 가벼운 입맞춤을 내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던 아가사는 퍽 강경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레슬리, 내가 분명 건강 챙겨 가면서 그림 그리라고 했죠.”

 “이보다 더 건강을 챙기는 사람은 없어요.”

 “약도 먹으라고 했고.”

 “물론이죠.”

 “운동도 하라고 했고.”

 “당연한 말을.”

 “잠도 푹 자라고 했었는데.”

 “-노력은 해보겠다고 했어요.”

 

 이 인간이? 빠르게 품에서 벗어나는 통에 레슬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다시 끌어와 제 품에 꼭 욱여넣고 등을 도닥이는 속도를 높였다. 자요, 우리 여보님 푹 주무시자. 죽어도 잔소리는 안 듣겠다는 폼에 등허리를 둘러 안은 손을 내려 허리를 손가락으로 꼬집어준 아가사는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에 꼬물거리다 제풀에 지쳐 힘을 빼고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당신이 안 볼 때 정말 잘 자요.”

 “거짓말 마요. 나도 별로 안 잔건데, 당신이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이 자지?”

 “음, 그럼 오늘은 윌리엄 재워놓고 확인을 해볼래요? 얼마나 건강한지?”

 “대체 우리 남편을 누가 알맹이만 바꿔치기 했을까?”

 “설마요. 난 처음부터 이랬는데? 그대한테 사랑고백 한 이후로는 쭉 이랬어요.”

 “적어도 점잖은 척은 했었잖아요.”

 “우리 결혼한 지 팔년이에요, 자기.”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사람 속이야 충분히 바뀌죠. 필사적으로 빼낸 고개에 푸른 눈동자를 마주 담은 레슬리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못내 마음에 안 들어, 아가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다시 말했지만, 환불, 교환, 반품 전부 안 돼요.”

 “세상에, 이건 사기에요. 십 년도 안됐는데 내용물이 왜 이렇지?”

 “그러니까 체험을 해보라고 했잖아요. 아직 멀쩡한데 왜 고물로 만들지?”

 

 나만큼 멀쩡한 사람은 없어요. 진지하게 맺는말과 달리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가득 걸려있었다. 어휴, 부러 푹푹 내쉬는 한숨에 키득거리며 웃던 레슬리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아가사의 입을 막고 더 깊이 그를 끌어안았다. 품에 안기는 온기가 사랑스럽고, 조용히 쌓이는 눈의 소리마저 정다웠기에. 두근두근, 생의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

 

 “참.”

 “응?”

 “여보, 윌리엄이 학교 가고 싶어 하던 것 같던데.”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작은 서재를 만들어 놓고 즐겨 앉던 푹신한 의자 위에서 모처럼 독서를 하던 아가사는 갑자기 끼어든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틀어 올리지 않은 머리카락이 고갯짓을 따라 왼쪽으로 느리게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걷어 귀 뒤로 넘겨주며 시선을 맞춘 레슬리는 방금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학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는 찬성이고요.”

 

 세상에. 아가사는 입을 벙긋거리며 신뢰가 묻어나는 얼굴의 레슬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연히 자신의 생각과 같을 것이라 여기는 이의 표정에 잠시 머뭇거리던 아가사는 이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반대에요.”

 

 

 

 “엠마, 오늘은 나 여기서 잘래.”

 “예? 도련님, 백작님이랑 부인은 어쩌시고요?”

 “엄마랑 아빠랑 싸웠어.”

 

 자신의 덩치만한 베개를 들고 큰 눈을 끔뻑이며 엠마의 집 문을 두드린 윌리엄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 특유의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기에 길게 늘어진 석양의 그림자를 따라 자그마한 아이는 몸집을 불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두 분이 싸우신다고요?”

 

 이제껏 백작저에서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백작 부부가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엠마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윌리엄은 꽤나 익숙한 듯, ‘하지만 정말인걸.’ 하며 엠마가 열어둔 문틈으로 쏙 들어갔다.

 

 “엄마랑 아빠랑 자주 싸워. 아닌가, 이번에는 좀 크게 싸우는 것 같아.”

 

 소소하게 의견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는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대체로 레슬리가 자신의 의견을 굽히는 것으로 대부분의 싸움이 끝나고는 하였으나, 이번만큼은 이상하게도 레슬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잠깐 도망쳤어!”

 

 도망의 의미가 이렇게 쓰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나 여기 슈크림 먹어도 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묻는 이에게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엠마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고용인에게 그들의 아이의 행방을 알리는 것으로 작은 소동이 마무리 지어졌다.

 

 “윌리엄은 옆집에 있대요. 찾으러 안 나가도 괜찮아요.”

 

 겨울이 저물고 봄이 찾아온다지만 아직도 싸늘한 기운을 감출 수 없었기에 외투를 챙기고 윌리엄을 찾으려 문 밖을 나서던 아가사는 레슬리의 말에 묵묵히 문을 닫고 자신의 코트를 다시 걸어두었다.

 

 “아가사. 정말 나랑 말 안할 거예요?”

 “할 말 없어요.”

 “여보. 이제 해가 넘었으니까, 윌리엄은 여섯 살이에요. 이제 글도 배우고 이것저것 익힐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고. 여기서 가정교사를 부를 수는 없잖아요.”

 “왜 없어요? 사람이야 늘 남아돌고, 부를 공간이야 있는걸.”

 “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닌 걸 알잖아요, 현명한 아가사.”

 “-이제 겨우 여섯 살이에요. 뭘 지금부터 배우고 힘들게 공부를 해요. 아직 아이인걸.”

 “아이이지만, 동시에 배움이 필요한 나이에요. 언제까지 우리 옆에만 있을 것이 아니잖아요. 또래랑 어울리고, 우리와 고용인이 아닌 다른 어른들을 만날 필요가 있어요. 그대, 아가사. 당신이 매번 그랬잖아요. 귀족들은 자기 집에서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배워서 그런 건가 머리가 아주 굳었다고. 윌리엄도 같은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건 아니죠?”

 “그럼 레슬리 당신은 다른 귀족들처럼 지금부터 후계자로 키우고 싶은 거예요? 아이는 아이답게 놀면서 크는 거죠.”

 

 며칠 째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도 슬슬 이골이 날 지경이다.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에 머리를 짚으며 느리게 심호흡을 뱉던 아가사는 부드럽게 잡아끄는 손길에 감았던 눈을 뜨고 걱정스런 표정의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놀면서 크는 거지만, 동시에 사람이잖아요. 사회성을 기르는 것도 필요해요. 그건 어릴 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학교에 간다고 무조건 공부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난 그냥 윌리엄이 자기 또래 친구들을 다양하게 사귀었으면 하는 거예요.”

 “굳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다양한 환경에 접해야죠. 학교에는 부르주아 계층 외에 또 누가 다니죠? 작위를 돈으로 산 귀족들? 수도로 돌아가면 다 고만고만한 후계자들만 남겠고요. 차라리 영지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요?”

 “아가사.”

 “나는!”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외침에 한쪽은 놀란 얼굴로, 한쪽은 희미한 분노와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인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내가 집 안의 가장이 된 것이 고작 여섯 살이었어요. 지금 윌리엄 나이 때에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고, 나는 그 무섭도록 다가오는 현실을 굳이 내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있어도 괜찮잖아요.”

 

 결혼 전에 서로의 사정에 대해 짤막한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암묵적으로 묻지 않았던 과거의 어느 날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마저 끌어낸 아가사의 표정은 그가 절대 짓지 못했을 것이라 보이는 절망이 어린 것도 같았다. 아득할 정도로 가슴을 파고드는 말에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고 레슬리는 묻어두었던 내심 한 자락을 꾹 삼켜내다 결국 흘려내 버렸다.

 

 “여보. 그냥 교육이니 뭐니 다 빼놓고.”

 

 아가사의 왼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부여잡고 이마에 대며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뱉은 말은 이내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내가 볼 수 있을 때에 볼 수 있는 것을 다 보고 싶어요.”

 

 알아요. 내 욕심이죠. 마지막 말을 속삭이고 느리게 눈을 떠서 바라본 이의 얼굴에는 절망과 뒤섞인 크나큰 슬픔에 외려 자신이 고통스런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레슬리는 느리게 손을 내려놓고 애써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레슬리는 답을 찾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현실과 맞닥뜨리고 조용히 마음을 접는 것으로 일련의 생각을 끊어내었다. 적어도,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비관에 빠져있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아가사 역시 담담하게 이전과 같이 생활하고 그를 대하고 있었으니까.

 

 조용히 이야기할 때에 간혹 슬픔이 어리곤 하였으나 이내 털어내고 웃는 이에게 어찌 다시 슬픔을 안겨준단 말인가. 그토록 사랑스러운 이들의 모습을 매순간 발견할 때마다 레슬리는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아 헤매었다. 내게서 제발 시간을 뺏어가지 말아달라고.

 

 고작 1년. 의사가 내려준 선고는 지난날의 그 모든 시간들보다 더 덧없고 강대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이 한 순간의 물거품이 되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늘 죽음이 주위를 맴돌았지만 목덜미를 틀어쥐는 것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느낌은 이토록 선명했으니.

 

 싸늘한 바람이 뺨을 날카롭게 훑고 사라져갔다. 지난여름에서 반년, 겨울을 지나고 있으니 채 반년도 남지 않은 시간이 의사가 내려준 자비와도 같은 믿음이었다. 그 안에 그가 하지 못했던, 하고 싶었던, 동시에 바랐던 것들을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씩 이뤄가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이 조급해진 탓일까, 결국 품에서 놓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지나쳐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니.

 

 메마른 눈가에선 물기 한 점 묻어나오지 않았다.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감각을 선연히 느끼며 다시 한 번 살아있음을 확인한 레슬리는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곤 걸음을 돌려 그가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천천히 되짚어 올라가자 싸늘한 적막이 그를 반겼다. 그의 부인을 찾아 침실을 찾은 레슬리는 수도의 백작저나 영지 내에 있는 저택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공간의 침실에서 오도카니 침대 위에 앉아 깊게 생각에 잠겨있는 이를 발견했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레슬리는 침실 문 앞에 서서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기로 했다.

 

 “거기서 뭐해요.”

 “-아가사.”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하늘빛 눈동자가 피곤한 낯에 가려져 반쯤 빛이 죽어있는 모양새에 레슬리의 얼굴이 안타까움을 담고 일그러져 갔다.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침실 문 앞에서 얼쩡거리던 그는 숨을 깊게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요, 보내요.”

 “미안해요.”

 

 그리고 동시에 나온 말에 멈칫하던 두 사람은 부산스레 서로에게 눈짓을 하며 양보하기 시작했다. 승자는 레슬리였다. 미묘한 얼굴로 제 볼을 쓸어내린 아가사는 시선을 살짝 비켜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큼. 그러니까, 어차피 언젠가 다녀야 할 곳이고, 본인도 가고 싶다고 한다면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죠.”

 

 소리쳐서 미안해요. 짤막하게 웅얼거리는 말이 느릿하게 인식되었다. 그제야 긴장한 얼굴을 풀고 앉아있는 이에게 성큼 다가선 레슬리는 허리를 숙이고 시선을 맞추었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훑어 내리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굳이 얼굴을 꾸며내지 않은 레슬리는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아무리 욕심이 생겼어도 당신한테 하지 말아야 했을 말을 꺼내버렸어. 정말 미안해요.”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도 미안해요. 생각하지 못해서.”

 “그대는 늘 나를 생각해주는걸.”

 

 넘칠 정도로 충분해요. 가까워진 거리만큼 따뜻하게 느껴지는 체온을 제 품 안으로 끌어안자, 밖에 나가 있던 탓에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몸에 놀라는 이의 기색이 느껴졌다. 아마 애잔함과 미안함, 일말의 기쁨을 담고 기묘하게 일그러졌을 자신의 표정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레슬리는 아가사를 꼭 끌어안고 작은 어깨에 제 얼굴을 묻어냈다. 달큰한 체향과 더불어 싸한 잉크와 마른 종이의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묻어있는 약 냄새가 섞여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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