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아니, 도련님!"
복잡한 저잣거리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데도 불구하고, 고종은 계속해서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길거리를 활보했다. 덕분에 화연은 고종의 뒤를 일일히 쫓아다니면서 챙겨야 했다.
"도련님! 자꾸만 어디로 그렇게 가시는 겁니까?"
"조용히 하고 따라오너라. 시간 안에 들어오려면 재빨리 움직여야 할 것이야"
"아, 정말..."
결국 화연은 입이 튀어나온 채로 고종의 뒤를 쫓았다. 불만을 표출한 듯 무엇하리...내 말은 씨알도 안 먹히는 것을...
고개를 떨구고 걷는 화연에게 누군가가 부딪혔다. 남이라 생각해 죄송하다고 입을 떼려 고개를 드는데...!
"정...도명?"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그게"
뭐라 대답해야 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10년 이상을 같이 지내와 비밀 같은 건 있다고 하는 게 거짓말일 정도로 내막 없는 사이가 하루만에 허물어질 줄이야...
폐하를 따라나왔다고 하면 분명히 누군가가 들을 테고, 그냥 나와봤다고 하면 무책임한 멍청이로 비춰지리라...게다가 고종 때문에 나오게 된 잠행을 자신의 멍청함 탓으로 떠안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게서 뭐하고 있느냐? 내 서둘러야 한다고 했거늘"
갑자기 고종의 음성이 둘 사이로 끼어들어 화연을 재촉했다. 아까 같으면 분명히 살해 의도가 솟구쳤을 법한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재촉하는 목소리가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가, 갑니다!"
"빨리 오너라"
"나 갈게...자세한 건 이따 궁에서 얘기해 줄 테니 숙소에서 만나자"
결국 도명의 물음을 무시한 채 화연은 상황을 피해 버렸다. 거짓말 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심장은 왠지 까끌까끌해졌다. 비밀 같은 건 없었는데 왜 한 순간에 바뀌었을까...
'나중에 만나서 자세히 얘기해 줘야지...'
결국 나중을 기약하는 것으로 화연은 마음의 죄책감을 지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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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딥니까?"
"내게 유익한 서책들을 들여오는 서책방이다"
"서책방이요? 책쾌를 부르시면 될 텐데..."
"책쾌들은 돈 많은 자들에게 매수된 자가 여럿이다"
"그래서 이렇게 손수 가져오신단 말입니까?"
"무능한 왕은 책을 멀리하고, 유능한 왕은 책을 가까이 한다는 말이 있다"
"정확히는 교역에 유능해지고 싶으신 거겠지요"
"녀석...주위나 둘러 보아라. 혹시 아느냐? 네게도 필요한 서책이 있을지"
그리하여 화연과 고종은 서책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나는 책들이란 책들은 다 모아놨는지, 종류도 양도 굉장히 많았다.
'이래서 폐하께서 오시는 구나...'
일국의 왕이 잠행을 감수하고 들락날락 한다는 것이 납득되는 곳이었다. 마냥 화려하지 않고, 아담한 멋이 묻어나오는 외관에, 천장까지 꽉 채워진 책장들, 그리고 책장들 속속히 채워진 서책들...
게다가 한강 쪽에 지어져 있어 경관도 일품이었다. 마음 속에 쌓여진 분을 풀어내기에 좋은 곳 같았다.
"손자 병법? 재미있을 것 같은데...무협지인가?"
화연은 어느새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서책을 읽어내려갔다. 병법서인만큼 전략이나, 싸우는 방법이 좋았다. 특히 예시를 드는 부분이 재미났다.
"그게 그리도 재미있느냐?"
"예, 참으로 재미납니다"
"이곳은 마음에 드느냐?"
"예, 참으로 좋습니다"
"다행이구나"
오기까지 속으로 마음 졸였는지 고종의 표정이 그제서야 풀어졌다. 또 다시 해맑게 웃는 모습에 화연의 심장 또한 다시 흐물흐물해졌다.
"저는 이곳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궐로 돌아가서도 계속 생각날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는 화연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예쁘게 피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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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사세요! 빛깔과 결이 아주 고운 비단입니다!"
자영은 오늘도 여전히 비단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요 며칠간 손님들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손님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휴...오늘은 왠지 일찍 접어야 할 것 같구나"
"아뇨, 분명히 사람이 많이 몰려들 시간대가 있을 겁니다"
"손님이 아니라 너 때문에라도 오늘은 접어야 겠다"
"제가 왜요?"
"밤에는 손님과의 약조 때문에 바느질 하고, 낮에는 장사 때문에 가게에 나와 일하니 몸이 남아나겠느냐?"
"조금 졸리긴 하지만, 참을 만합니다"
"내가 불편하다. 그러니, 오늘은 그만 접고 들어가 잠을 자거라"
자영은 그런 어미를 보고 극성스럽다 했지만, 실은 누가봐도 자영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피부는 어느새 거칠어졌고, 졸린 눈을 비비며 바느질을 했기에 손이 바늘에 찔리고 베여 엉망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먹지도 않고 쉴새 없이 일하니 점점 말라가기까지 해 어미는 그녀가 걱정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여기가 고운 비단을 파는 곳입니까?"
그러나, 장사를 접으려 하는 자영의 귀를 이끄는 소리가 들렸다. 물건을 사겠노라 속삭이는 것만 같은 음성에 자영은 피곤함도 잊고 밝은 목소리로 가게에 찾아온 손님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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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단을 원하십니까?"
"...이 나라의 국본께서 입으실 혼례복에 쓰일 비단을 찾소이다"
"이 나라의...국본께서요?"
이 자도 궁의 사람인지 옷에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자는 일전에 자신을 도와줬던 사내와는 일절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무언가 일국의 폐하마저도 가벼이 눌러버릴 만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없습니까? 그러면 저는 이만..."
"혼례복에 쓰일 만한 다채로운 비단들은 여기 있으니 골라 보시지요"
자영의 말대로 한 쪽에 쌓인 비단들은 유난히도 고와 보였다. 더 푸르렀고, 더 선명한 빛깔에 더 곱고 섬세한 결이었다.
"이 비단밖에 없소이까?"
"저희가 만든 최상급의 비단입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일국의 국본께서 입으시는 비단치고는 급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오?"
"그렇게 따지면 일국의 국본께서는 도대체 어떠한 비단을 입으셔야 한단 말입니까?"
"뭐요?"
"백성들이 한 땀 한 땀 흘려 지은 옷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떠한 옷을 입으셔야 일국의 국본이란 말입니까? 때 묻지 않은 곱디고운 선녀옷을 입어야 일국의 국본입니까?"
"...."
"일국의 국본은 백성들의 어버이라 들었습니다. 허나, 백성의 어버이가 자식이 지은 옷이 싫다 하여 다른 세상의 옷을 입으시려 한다면 그 어찌 어버이와 자식 관계라 하겠습니까?"
"......"
"일국의 국본께서 백성의 어버이가 되는 것이 싫으시다면 다른 곳에 가서 비단을 찾아보십시오. 저한테는 손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천상의 비단은 없습니다"
참으로 당차고 올바른 말에 손님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린 소녀라고 깔보았는데 풍겨 나오는 기개나 신념 같은 것은 어느 건장한 사내보다 더 굳세고 강건했다.
"하하하하하하"
"....?"
"미안하오. 내 생각이 짧았소. 개처럼 비굴했던 과거를 잊고 지금 현재에만 매여서 살았나 보오"
"아셨다면 다행입니다"
"실은...내 제안할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당신의 생각을 궁에 들어가 높은 분들께 말하는 것이 어떻소?"
"예?"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궁의 사람이 되라니...이게 지금 가난한 비단 장수의 여식이 들을 수 있는 말인가? 가당키나 한 소리야?
"그대가 궐에 들어온다면 나라가 참으로 좋아질 것 같소이만..."
"송구하오나, 소녀 그런 일은..."
순간, 자영의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실마냥 툭 끊어졌다.
탐난다...
궁의 사람이라니...
그럼 어머니는 적어도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부족한 제가 괜찮으시다면 입궐, 하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내가 파멸하게 되다 해도 상관 없어...
궁의 사람으로 살아본 인생이 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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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이럴 줄 알았으면 그 아이를 궁에서 잘 감시할 것을"
순지는 막연한 일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도대체 이 아이의 정체는 어떻게 조사해야 나오는 것이냐...정보 없는 호위무사에 너무나도 막막하기만 했다.
"그 서책이 그리도 좋으냐?
'응?'
저잣거리를 거니는 순지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감겨왔다. 분명히 낯익은 목소리에 돌아보니 궐에 계셔야 할 분이 계시는 것이 아닌가
"폐...폐ㅎ...?"
"그리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토록 찾아 헤메던 화연이 있었다. 순간, 순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찾던 호위무사가 이리도 떡 하니 나타날 줄이야...
참 하늘이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