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력 3년.
찌르찌르 풀벌레의 노래 소리가 가을의 깊은 밤을 알린다.
새로 보수하고 증축한지 얼마 되지 않은 궁이라서인지, 새것의 냄새가 전부 빠지지 못한 복도를 거칠게 걸어가 커다랗고 화려한 문 앞에 당도하자, 시종이 당황하여 그를 말렸다.
“공작님.”
“폐하는?”
무섭게 치켜뜬 눈매에 겁을 먹은 시종이 쉬이 입을 못 떼는 통에 손을 저어, 되었다며 본인이 직접 문을 벌컥 열었다.
황제가 쉬는 방에 멋대로 침입해 들어가 문을 닫고 둘러보는 방안의 풍경에 한숨과 짜증, 답답함에 정리된 머리를 벅벅 흩트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 받은 장본인은 침략자를 노려보려했지만, 방안에 굴러다니는 술병들이 대신 이야기를 하듯이 이미 상당히 술이 되어 시선이 작게 흔들렸다.
“푸후... 집에 안 돌아가고 왜 왔냐?”
숨을 깊게 내쉬며 알콜을 밖으로 보낸 바이안은 소파에 깊게 등을 묻었다.
“내가 왜 왔겠냐? 아주 잘하는 짓이다.”
네 놈 때문에 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당당히 보여주려는 론은 그의 맞은편에 소리날 정도로 털썩 앉아 막 빈 잔에 술을 따르려는 병을 낚아채갔다.
“아무리 잘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거의 매일 이정도로 쳐마시면 너라고 훅 안 가겠냐? 그만 쳐마셔라.”
“일은 완벽하게 잘하잖아.”
확실히 일에 지장이 생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계속 하려 했던 잔소리가 애매해졌다.
“애초에 술을 좋아한다고 해도, 과하잖아. 조금 줄이기라도 해.”
“그러고 싶지만, 이녀석이 없으면 잠이 안와. 잠도 푹 잘 자야 다음날 일도 잘하지. 내 나름대로 컨디션 조절용이다.”
조금 술이 깨었는지, 대화가 많이 매끄러워졌다.
바이안의 속을 모르는 것이 아닌지라, 론은 처음에 단단히 혼내려 온 것을 철회하고 그 대신 방에 따로 진열되어 있는 찬장에서 잔을 챙겨와 술 상대를 자처했다.
“술로 의존할 생각 말고 이겨낼 생각이나 해. 대신에 술친구는 계속 해줄 테니까.”
론은 바이안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고 쭈욱 들이켰다.
찰랑이는 잔을 말끄럼히 내려다보던 바이안은 그의 배려에 피식 웃었다.
“매일 나 상대하다가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힌다. 게다가 네 놈 집에 빨리 가야지.”
론은 멋쩍게 웃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술을 연거푸 입안에 털었다.
“오늘은 많이 늦는다고 허락 받았어.”
“칠개월이라며.”
바이안의 앞에서 아내나 아이에 관계된 자랑질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그동안 열심히 회피하고 돌려 피했더니, 오늘 본인이 먼저 화제를 던져버린다.
“그렇지. 첫째는 아들이니 둘째는 딸이었으면 하고 있는 중이다.”
바이안 본인이 그 화제를 꺼냈으니 자신의 가장 행복한 소망을 조금 풀었다.
“늘 바빠서 집에 일찍 못 간다고 안달복달 하더니..”
“그건 다 네 놈 때문이잖아!”
바이안의 말을 확 자르며 억울함을 담아 윽악악 소리 질렀다.
“누가 멋대로 공작으로 올리래? 앙? 그냥 백작 하겠다잖아. 계속 기사나 해 먹던 내가 정치가 가당키나 하냐고!”
“그 덕은 봤잖아.”
“...끄응..”
확실히 공작이 되면서 생기는 덕은 봤지만, 등가교환처럼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 그런 상황인지라 절로 신음만 터졌다.
“그나저나 저번처럼 아기 낳고 일 년쯤 휴식한 뒤에 또 출근하겠다고 하는 거나 알아서 막아.”
“히데아가 고집이 좀 쎄냐? 남 돌보는 일을 좋아하는데, 내가 어찌 막겠냐. 나한테는 결혼 한 것도 기적이다. 하고 싶다는 거 막고 싶진 않아.”
모두가 부러워하는 공작부인이 되었어도, 궁의 일에 쉬이 손을 놓지 못하는 히데아의 미련이 뚝뚝 넘치는 눈동자가 떠오른다.
행복한데 씁쓸해 하는 론의 표정에 잔을 기울이면서도 그 상황이 짐작이 되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 문득, 일중독 히데아를 막기 위해 빠르게 결혼하고 그 즉시 임신시킨 것은 아닌지, 론의 행동력과 잔머리를 의심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에 한해서 잔머리를 버린 놈이니 그 생각은 곧바로 지웠다.
“오늘은 이 병만 비우면 일찍 자라. 내일 국경일 행사잖아.”
“그래야지.”
내일은 모든 것이 평화로워지면서 두개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제국이 새롭게 시작한 날, 새로운 시대를 선포한 날이었다.
큰 재앙을 함께 해쳐온 백성들은 이날의 행사를 무척 좋아했고, 가장 들뜨는 날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규모와 수도에 몰리는 인구들은 엄청났다.
“이러다 나도 신격화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백성들의 기준에서는 국경일 행사의 주인공이 본인임을 모를 수가 없는 바이안은 가벼운 농담처럼 흘렸고, 론은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받아 주었다.
“이미 반은 그렇게 된 거나 다름없지. 여신의 유일한 남편이잖냐.”
친구끼리 오랜만에 가지는 시간이기도 한지라 둘의 대화는 조금 더 길었다.
국경일 당일.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중심부터 외곽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
일주일 전부터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여러 타 지역에서 올라와 여관방은 진즉에 꽉꽉 들이찼으며, 방을 잡지 못한 객들을 상대로 일반 가정집에서 일정 금액을 받고 빈방을 내주기도 할 정도로 북새통이다.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지켜낸 영웅들이 모인 중심지 이며, 당일 날에는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인 황제가 직접 말을 타고 영웅들과 함께 수도 곳곳을 지나간다.
영웅중의 영웅이라 불리는 황제의 존안을 멀리서라도 보고 싶은 이들은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벌써부터 뛰어 다니면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그만큼 사람들이 품는 영웅들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으며, 그 여파는 가히 하늘을 뚫고 달에 닿을 정도였다.
“아 글쎄! 나는 새벽부터 여기에 자리 잡았다니까.”
“누가 할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잠시 볼일 보러 갔다 오니까 내 가족들 밀치고 억지로 차지했잖아.”
수도 광장에 두 중년인의 자리싸움이 점차 커지면서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릴 때, 소동을 빠르게 접수받은 경사단들이 둘에게 달려와 뜯어 말렸다.
둘을 말리고 중재를 한 뒤, 한 숨 돌린다 싶은 경사단들은 그럴 틈도 없이 또 다른 곳에서 잇따라 일어나는 다툼들에 시달리고, 미아가 된 아이들 달래가며 부모님 찾아주랴 치이고, 빽빽한 유동 인구수에 빈혈을 일으키고 쓰러지는 사람들을 일일이 의원에게 업어다 주는 극한 노동에 국경일이고 뭐고 그들에겐 이날이 가장 피하고 싶은 날이다.
크고 작은 트러블들이 있다고 해도 한편에서는 들뜨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객에게 잠시 방을 빌려준 이층집의 부부는 식탁에 객의 아이들을 앉히고 아침밥을 준비해줬다.
“꼭꼭 씹어 먹으렴.”
후덕한 아줌마의 보살핌에 아이들은 입안 가득 음식을 물고 방싯 웃어 부부의 심장을 비틀었다.
따뜻한 아침식사가 끝나고 거실의 창가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이제 시작할까 저제 시작할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흐뭇함도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온 중년인이 신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작년 보다 조금 빨리 지나 가려나 본데?”
“왜?”
중년인을 향해서 반짝반짝 빔을 쏟아내는 아이들의 눈빛 공격에 투박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내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건 나야 모르지. 윗사람들의 사정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대략 십분 뒤에 지나가겠어.”
중년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거실에서 얌전히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벌써 지나가려한다는 말에 불안해져 발만 동동 굴렀다.
엄마 손잡고 멀리서 왔는데, 못 보는 것은 아닐까 걱정됨이 틀림이 없어, 부인은 중년인을 불렀다.
“여보. 아이들 손잡고 먼저 가서 구경 시켜줘. 아이들 엄마한테는 내가 말해놓을 테니까, 잡은 손 절대로 놓지 말고.”
어른들의 허락에 폴짝폴짝 뛰면서 로브의 모자를 둘러쓰고 중년인의 양손을 각각 잡고 어서 나가자 재촉한다.
아이들의 기대를 뿌리치지 못한 중년인은 아이들이 인파에 다치지 않게 조심시켜주면서 이웃들에게 미리 부탁해 마련한 명당으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는지, 웅장한 나팔소리와 함께 행렬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년인은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춰 주면서 가까워진 행렬의 중심에서 누구보다도 찬란히 빛나는 이를 가리켰다.
“저분이 황제폐하시란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향한 곳엔 햇빛을 받아 눈부신 금발을 휘날리는 이가 화려한 갑옷을 걸친 흑마에 올라타 있었고, 아이들은 황제를 보다 서로를 번갈아 보며 고르게 웃었다.
“햐~”
“히~”
서로의 얼굴을 콕콕 찌르더니 꼭 잡고 있던 중년인의 손을 뿌리치고 작은 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사이사이로 비집고 나가 그대로 행렬이 이동하는 곳으로 튀어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중년인은 아이들을 잡지 못했고, 행렬의 중심은 아이들의 난입에 의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놀란 말들을 서둘러 달래어 진정 시켰지만 투레질은 거칠었다.
바이안은 말에서 내려 아이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을 하려 했지만, 그의 앞에 있는 기사들이 먼저 나서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오는 기사들을 무시하고, 바이안을 빤히 보면서 양팔을 앞으로 나란히 한 채로 토타타 달려갔다.
무의식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어 키 높이를 최대한 맞추자, 자신에게 똑바로 달려온다.
“아바.”
“아쁘아.”
왼팔과 오른팔에 답싹 매달린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에 당황스럽게 보고 있자니, 주변에서 자신들을 보는 시선도 그 못지않다.
“어이. 너 언제 바람 폈었냐?”
론이 스리슬쩍 다가와 조용히 속삭이는 의심이 가득 담긴 질문에 악다문 잇세로 부정했다.
“할리가 없잖아.”
황제직속 호위기사들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아이들을 황제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커다란 손을 뻗었다.
아이들이 최대한 다치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아이에게는 그것 또한 위협적이었는지, 기겁하며 소리치면서 팔을 크게 휘둘렀다.
“시져!”
분명 잡은 것은 기사이고 아이는 힘없이 떼어질 것이라 의심치 않았던 작은 아이의 휘두름에 기사는 후웅하고 허공을 날아 바닥을 쓸었다.
한 순간에 일어난 상황에 단체로 입을 떠억 벌리고 그대로 돌이 되어 굳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론이 남들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바이안을 범인 취급했다.
“야.. 솔직하게 불어라. 누구냐? 저 능력 빼도 박도 못 할 증거다.”
버젓이 나타난 증거는 알겠지만, 세이나 외에는 여자를 가까이 한 적도 없으며, 모르는 여인을 안은 적도 없는 바이안은 억울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큰 행사에 일어난 소동을 빨리 수습해야 할 판이지만, 그러기에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엄청난 폭풍을 일으켜버린 뒤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바이안과 똑같은 능력을 선보인 아이에 시선이 집중된 상태다.
“그러니까 나는 세나 외에는 다른 사람한테 눈을 돌린 적이 없다니까. 게다가 대략 세 네살로 보이는데... 키가... 세 살... 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쓰면서 소곤거리던 바이안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중간에 무언가 걸리는 부분에 말끝이 저절로 흐려지며 고개가 삐그덕 움직여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그 설마가 맞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뇌 안 가득 들어찬 상태로 마른 침이 절로 삼켜진다.
그동안 홀로 얼마나 외로웠는가, 그동안 이겨내려 무척 고생했었기에, 그 설마를 믿어도 되는 것인지, 아이들의 이목구비를 가리는 로브의 모자를 천천히 벗겼다.
“하...”
자신과 똑같은 금발이 바람에 반짝반짝 흩날린다.
왼편에 서서 커다란 눈망울 안에 자리 잡은 노을을 가득 담은 오른쪽 눈동자와 푸르른 하늘을 담은 왼쪽 눈동자에 짙은 눈썹과 통통한 볼 살에 고집 있어 보이는 것이 머리에 커다란 리본이 없었으면 남자아이로 오인할 뻔한 꼬마 숙녀가.
오른편에 서서 왕방울만한 눈망울 안에 자리 잡은 눈동자가 꼬마 숙녀와는 정반대로 노을이 왼쪽, 푸른 하늘을 오른쪽에 담고, 통통한 볼 살에도 불구하고 곱고 예쁘게 눈웃음 짓는 것을 보니, 여러 남자들의 심장을 움켜쥐게 할 정도의 살인적인 깜찍함을 가진 여자아이로 오인할 뻔 했지만, 짧게 친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올려 남자아이임을 강조한 꼬마신사가 방싯 웃는다.
왼손을 들어 노을을 담은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쓸었다.
“리나?”
“웅.”
오른손을 들어 노을을 담은 눈가를 살살 쓸었다.
“에이든?”
“웅.”
자신들의 이름에 머리를 꾸닥이며 대답하자, 바이안의 눈가는 어느새 습막이 쳐져 비록 아이들이 흐리게 보였지만, 입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올라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