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에 도착한 레인트들은 남아있는 이들을 독려하고 전력을 정비한 채로 경계를 하면서 심상치 않은 이들이 걸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잔뜩 경계하고 있는 기사들을 훑어보던 반조는 릴리움보다 조금 더 앞서 걸으며 그들에게서 그녀를 가렸다.
릴리움은 심드렁하니 작은 단검을 꺼내어 피가 겨우 멎은 자신의 팔뚝에 날을 가져다 대 그대로 주욱 그었다.
피가 몽글몽글 솟으며 흘러 땅으로 뚝뚝 떨어지자마자 기화하더니, 혼탁하고 어두운 보랏빛의 안개로 화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정의의 상징처럼 솟아있는 황궁 자체를 부식시키고 무너뜨릴 의도가 명백한 독한 독이 점점이 퍼져가며 부피를 키울 때,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시선의 주인을 확인한 릴리움은 그대로 하던 행동을 멈췄다.
레인트는 여기서 볼 것이라 생각도 하지 못한 여인에 무척 당황해 자신도 모르게 기사로서는 하지 않을 실수인 검을 떨어트릴 정도였다.
“어이!”
칼라임은 모두를 지휘하고 있는 레인트의 어이없는 실수에 그를 불렀고, 레인트는 화들짝 놀라면서 검을 다시 집어 들었지만, 이미 혼란함에 삼켜져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반조는 평이했던 릴리움이 몸을 경직시키면서 흔들리는 모습에 그녀의 앞에 서서 양손을 양 옆으로 벌려 방어태세로 바꿨다.
독안개가 어른 열 이상은 집어 삼킬 정도로 커졌을 때, 릴리움은 스스로 그 안개를 거두고 요염하지만 씁쓸하게 웃으면서 피가 배어있는 팔을 다른 손으로 덮었다.
“기사님이셨네요. 문양을 보니 대현자 쪽 이시구요.”
릴리움은 자신의 앞에서 경계하고 있는 반조를 억지로 뒤로 물리고 한발 앞서 나왔다.
“......”
레인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서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내 어리광 좀 받아주라.”
작은 목소리로 동료들을 부르자 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렸다.
“딴 놈은 맡길 테니까, 그녀만은 내가 상대하게 해줘.”
“간부들은 상상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
“켄.”
칼라임은 켄의 말을 막으면서 레인트와 여자간부를 번갈아 보더니 얼굴을 잔뜩 굳혔다.
“네가 기사라는 것을 잊지 마라. 우리의 대업이, 우선하는 것이 뭔지만 잊지 말아라.”
“..고맙다.”
칼라임의 지시 하에 병력들이 릴리움과 레인트만 두고 반조를 그 둘에게서 떨어트렸다.
반조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병력에 모두를 상대하면서도 릴리움을 반복적으로 확인했지만, 이미 자신과 멀리 떨어져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에 돌아가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직도 저를 좋아하신다고 말씀 하실 수 있으신가요?”
“변함없습니다.”
경멸하든, 배신감을 느끼든 할 것이라 짐작하면서 물었지만, 반대로 아무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확고한 대답이 들려왔다.
“저는 여기 오기 전부터 이미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답니다.”
“예. 그러신 것 같군요.”
당신이라고 다른 이들과 뭐가 다를 것이 있겠느냐와 함께 자신을 더욱 싫어하기를 바라며 떠들었지만, 오히려 자신이 상처받은 것에 아파하는 것처럼 검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가면서도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많이.. 아프십니까?”
“상냥하시네요.”
아직도 피가 멎지 않아 조금씩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팔을 보면서 걱정하며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강렬한 독을 품은 화려한 독화처럼 더욱 예쁘고 화사하게 웃음 지었다.
레인트는 그녀의 피가 기화하면서 주변의 땅이 검게 죽은 것이 독과 지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게 느꼈다.
지금은 그녀가 억지로 기화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떨어지는 핏방울 자체만으로도 땅에 자란 풀들이 힘을 잃고 검게 죽어 스러졌다.
일전에 손등이 살짝 다쳤을 때, 자신의 손을 쳐내면서 뒤로 뺀 이유가 이것이었는가 싶어졌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독 그 자체를 사용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전멸할 정도로 위협적이지만, 무력적인 부분에서 약할 것은 그녀의 옆에 함께 있던 사내의 행동만으로도 쉽게 예측 할 수 있었다.
타박타박 천천히 걸어오는 릴리움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레인트는 검 끝을 그녀에게 겨누기만 할 뿐, 그 이후의 행동은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재밌지 않으세요?”
“재미없습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던 릴리움은 그가 자신은 솔직하다고 한 말이 정말이라며 즐거워했다.
“당신이 저를 여전히 좋아하신다는 말을 이용해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어느새 검 끝이 제 가슴께에 닿을 정도로 다가온 릴리움에 오히려 레인트가 움찔했지만, 본분을 잃지 않기 위해 이를 그러 물고 그녀의 심장을 겨눴다.
“들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진보라색의 긴 생머리 사이에 작은 흰백합의 귀걸이가 함께 흔들렸다.
릴리움은 손을 뻗어 적과 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도 눈동자에 온전히 자신을 담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낯설면서 익숙한 표정의 저 얼굴을 만져보면 따뜻할까 생각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다가 치익하며 피부가 타들어가는 소리에 손을 거두고 피가 묻어있는 손바닥을 확인했다.
릴리움이 빨리 손을 거둔 덕분에 피부가 녹아 눌러 붙지는 않았다.
검은 자국이 눈 밑으로 작게 생겨났지만 레인트는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그 자세 그대로를 유지했다.
오히려 그런 그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릴리움이었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경황없이 구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지만, 이 감정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저주스럽게 잘 알고 있어 그녀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제가 여기서 멈춰주시기를 부탁드리면 들어주실 겁니까?”
자신이 한 질문을 반대로 돌려서 물어오는 그의 질문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200년 가까이 온갖 독들을 섭취하면서 축척하여 그 어떤 것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독을 신체에 만들어 담아왔다.
그의 검이 한번 휘둘러진다면 자신은 바로 죽을 수도 있지만, 독을 다시 사용한다면 그의 검을 녹이고 모든 것을 집어 삼킬 수 있다.
한번이면 되었다.
단 한번만 움직인다면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자신 앞에서 무력하게 죽을 것이라 자신한다.
이제와 무엇을 기대하려고 하는 것인지 릴리움은 겉으로 평정을 유지하면서도 쉽게 하지 못했다.
릴리움과 레인트 쪽이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 고요해 보인다면 그 옆에서는 시끄럽게 사람들이 서로 얽이고 섞였다.
아무리 간부들의 능력이 상상보다 더하다 하더라도 1대 다수임에도 반조에게 스크래치도 나지 않았다.
“으아! 무기도 들지 않은 새끼를 왜 못 죽이는데?”
성질을 참지 못해 소리치는 기사는 우그러져 쓸모를 잃은 검을 집어 던졌다.
반조가 입은 옷들은 검 날에 바로 베였지만, 그의 피부에 닿기만 하면 종이처럼 변하기도 하고, 우그러져 추욱 쳐지기도 했다.
많은 수의 검들이 이미 피해를 봐서 체술로 공격을 해도, 자신들 보다 더 대단한 체술의 고수인지, 역으로 당해 쓰러지기 일쑤였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길게 내쉬면서 체력의 안배를 하는 반조는 쉬지 않고 들어오는 기사들을 막고 우겨 박으면서도 릴리움을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니 마력이든 체력이든 한계는 올 거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전에 때려 잡히면 말짱 황이지.”
켄이 어깨를 풀면서 떠들자, 칼라임이 거들려다 다른 말을 꺼냈다.
“말짱 황인 것 같은데?”
반조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안에 털어 넣더니, 온 몸에 핏줄이 도드라진 모습에 혀를 찼다.
각성제를 대량으로 섭취한 반조를 한껏 경계하면서 전보다 쉽게 다가가지 않고 주변을 에워싸기만 했다.
둘은 그 어떤 무기나 도구도 반조에게 닿기만 하면 소용없는 것에 갑옷과 상의를 탈의했다.
갑옷이 그의 손에 우그러져 몸을 지키는 도구가 반대로 숨통을 조이는 도구가 되어 쓰러진 기사들이 나오고 있었기도 했다.
동료들의 분투를 잠시 확인하는 레인트의 잠깐의 틈에도 릴리움은 얌전히 기다렸다.
“죽이실래요?”
“죽이실 겁니까?”
같은 질문이 동시에 나오자 릴리움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단어는 조금 그렇지만 이런 것도 통한다면 통한 거라 생각해야할지 그저 웃겼다.
“당신에게라면 죽는 것도 좋을 지도요.”
“죽어드릴 수는 없어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서로 다른 결론이 동시에 나왔지만 릴리움은 이해하고 납득했다.
“나쁘지 않네요.”
신념과 정의를 관철하며, 사랑에 눈이 멀어 봐야할 것을 보지 않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레인트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은 하지 못했던 올곧은 그라 좋은 걸지도 모른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진즉에 미련이 없었던 몸인지라 오히려 이게 더 잘 된 것 같네요.”
릴리움은 그의 검을 가만히 쓸었다.
“착한 사람. 당신에게 무거운 것을 떠넘겨 미안하지만, 정말 저를 사랑한다 하신다면 죽여주실래요?”
레인트는 자신이 해야 하는 바를 잊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죽여 달라는 부탁을 듣자, 몸도 마음도 흔들렸다.
어째서 무슨 연유로 그녀는 저기에 있으며, 자신은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성립되는 위치에 서서 검을 겨누어야만 하는가.
이를 악 물고 검을 틀어쥔 레인트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한번에... 아프지... 않..”
그녀에게 꺼내는 목소리가 떨리고 그녀를 노리는 검도 함께 떨렸다.
“큿.”
악 다문 잇새에 그의 턱 언저리에 두터운 힘줄이 터질 듯 올라왔고, 각오를 하고 다짐을 하여 흔들리는 검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데이트했을 때 보여주었던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레인트!!”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틀자 자신을 향해서 빠르게 뻗는 손을 봤지만, 방비하기엔 늦었다.
반조는 다 내려놓은 듯이 보이는 릴리움을 확인하자마자, 자신에게 집중한 나머지 그 쪽 방향으로 틈이 생긴 기사들을 쉽게 뚫고 그대로 마력을 발에 집중해서 빠르게 달려 그대로 레인트의 복부를 뚫었다.
“커헉! 쿨럭~”
구멍이 난 자신의 배를 움켜잡으면서 무릎을 꿇자, 째지는 소리와 동시에 다시 한 번 뻗어오는 공격을 흐려지는 눈동자로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자신의 앞을 막는 그녀가 자신 대신 그 공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쿨럭~ 비...”
릴리움은 심장 위쪽의 왼쪽을 박아 넣은 팔을 움켜쥐고 반조를 노려봤다.
“릴리?”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해칠 줄을 몰라 놀라는 그에게 손을 뻗어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어깨에 박혀있는 팔과 얼굴부터 녹아내리는 고통이 덮쳐왔지만, 반조는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