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들을 도륙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로 바이안은 주변을 돌아보며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죽어나가는 적의 병사들은 수가 많을 뿐이지 위협이 될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나 빠르게 피해를 입은 이유를 알아야 했지만, 혼란스러운 아수라장 속에서는 아무리 바이안이라 할지라도 쉽지는 않았다.
뒤 늦게 자신들이 합류 하고나서 밀리던 형국이 반대가 되어 가속도를 붙여가면서 밀고 나아가자, 멀리 시야에 기분 나쁜 탁한 보라색의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바람을 타고 퍼지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전하! 저 곳에 가까이 가시면 안 되십니다.”
속절없이 전멸한 이유가 저것이라 확신을 가지고 막 날아가려 했을 때, 피칠갑을 하고 나타난 기사가 바이안을 확인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와 그런 그를 막았다.
처음 적들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전멸을 하기 전에 추가로 투입이 된 기사 중 한명인지, 자신이 파악한 것을 서둘러 보고했다.
“안개에 조금이라도 닿을 시에 온 몸에 피를 흘려 죽습니다. 안개가 짙어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정통으로 맞은 이들은 육신이 온전히 남지 않고 순식간에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의 보고를 곁에서 듣던 기사들 모두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안개를 심각하게 노려봤다.
“독하군.”
독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간부의 소행일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지만, 그 능력으로 받은 피해의 여파는 자연재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아무리 마력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저 독 안개에서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현자의 돌과 가까이에 있을수록,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비대해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일 줄은 보지 않았으면 모를 뻔 했다.
“궤를 달리하게 된 능력은 이렇게까지 최악을 찍는 구나.”
현재 안개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모두 피해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능력을 다룰 터인 다른 간부들이 여기저기에서 날 뛰고 있었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만큼의 피해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때마침 바이안의 눈에 낮이 익은 간부 한명을 발견했고, 그 역시 바이안과 기사들을 막 발견했다.
“이야~~ 내가 운이 가장 좋아~”
베인트는 그렇지 않아도 바이안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의감의 기본이 되는 것처럼 바르게 서 있으며 상대의 위에 있는 것 같은 바이안이 그에게 마음이 들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주인님과 다르면서도 닮은 구석들도 싫었고, 처음부터 많은 것을 다 가진 녀석들만 보면 배알이 뒤틀리고 내장이 꼬였다.
비꼬는 베인트의 말투에도 그에게 일체의 관심도 두지 않은 바이안의 시선은 오히려 그의 발밑을 향했다.
사지가 뜯기고 내장이 파헤쳐져 심장이 난도질당한 시체부터 온갖 잔인한 고문들에 괴롭게 죽은 것처럼 기괴하게 틀어져 죽은 시체들의 표정들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는 모습을 연출했다.
“내가 늘 하고 싶었던 것이 대단하다는 귀족들을 찢어발기는 것이었거든? 크으~ 확실히 다르긴 하더라. 도륙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 감각과 쾌감!”
긴 쇠사슬을 늘어트려 공중에 띄우고 양 손을 들어 혼자 감격에 취해 있는 정신 나간 모습에 분로를 주체하지 못한 몇 명의 기사들이 그를 상대하기 위해 튀어나갔다.
하지만 베인트는 비틀어 올려 웃는 모양으로 대비하는 행동도 없이 비스듬히 서서 그들을 비웃기 바빴다.
손에 잡지도 않은 베인트의 낫과 사슬이 그의 주변을 보호하면서 정해진 방향 없이 그들을 치고 썰어갔다.
“인간이기를 버리고 얻은 힘이 고작 이것 뿐 인가?”
무심한 바이안의 말투에 베인트는 미친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능력의 발휘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기본은 같았다.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손에서 떨어지면 평범한 무기에 지나지 않지만, 베인트는 손에 떨어트려 놓아도 상관없이 자유롭게 다뤘다.
바이안은 베인트를 비꼬고 시비를 걸 셈은 없었지만, 독으로 인한 피해로 본 능력과는 대조적으로 한없이 약해보였다.
“주인님의 명령 때문에 참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상관없지.”
분노에 점칠 된 베인트가 다시금 바이안을 틀어 웃어 보이면서 기사들이 떨군 무기들을 한 번 씩 터치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검들이 허공에 둥둥 뜨며 위협적으로 바이안을 겨냥했다.
“황족의 심장은 무슨 색일까? 응?”
한명을 상대하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바이안은 더는 들어주기 싫어져, 추가로 나서려 하는 기사들을 물리고 앞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촤라락 소용돌이처럼 바이안을 휘감은 쇠사슬에 몸이 묶이자마자 검들을 쏘아 보내 꼬챙이처럼 꿰뚫을 생각이 만면했던 베인트는 그가 갑자기 시야에 사라져 순간 당황했다.
“궤를 달리하는 능력이란 말이다. 그리 형편없는 능력이 아니야.”
등 뒤에서 바짝 들리는 귓속말에 휙 몸을 틀어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날카로운 날이 제 몸을 뚫고 들어간 화끈한 통증에 바람이 피식 빠져 가나는 것처럼 웃었다.
“쿨럭~ 크흐흐. 누가 괴물 아니랄 까봐, 겁나 아프네.”
가슴이 뚫렸는데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했다.
죽는 것에 애초에 미련이 없던 지라, 피를 토하고 가슴에서 구멍 나, 둑처럼 피를 뿜어도 오히려 지금 상황에 즐거워하는 것처럼 뒤틀려있었다.
“아~ 마지막으로 쿨럭... 황족 하나라도 가지고 놀려고 했는데, 너무 빠르잖아.”
아쉬움에 번들거리는 죽지 않은 눈으로 바이안을 노려보다가 황후와 에바가 도망가고 있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모든 무기들을 휘둘러 바이안에게 한꺼번에 쏘아 보냈다.
마력으로 주변을 감싸 무기들을 전부 쳐낸 바이안은 베인트가 도망치려는 것인 줄 알았지만 뛰어가는 방향이 어디인지 알자마자 살기를 폭발시켰다.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한 발 뗀 바이안이 순식간에 베인트의 지척에 다다라 그의 목을 몸에서 분리했다.
“나도 아직 부족하구나.”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한 번에 처리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은 자신의 안일함을 깨우치며 무심하게 검을 횡으로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사방으로 퍼져 적들을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가 바이안은 보다 더 확실하게 죽여 갔다.
바이안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남은 베인트의 시신은 고정되어 멈춰있던 시간이 몰아치는 것인지, 빠르게 말라갔다.
미이라처럼 말라 비틀어져 굴러다니는 머리통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런 베인트의 머리통을 발로 툭 걷어찬 하밀은 그대로 발을 들어서 강하게 내려 밟아 우적 부숴버렸다.
“역시 넌 재미없어.”
여러번 밟혀서 형태도 남지 않고 가루가 되었지만, 하밀은 하고 있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스치고 슉 공기를 가르는 하나의 화살이 발 앞으로 꽂혔다.
“우씨.”
방해받아 짜증을 내다가 화살 깃에 작게 쓰여 있는 문구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몰렌 최고. 수도에서 놀아야지~~”
화살의 주인인 몰렌이 수도가 더 재밌는 것이 많다고 알려준 덕분에 신이나 통통 뛰어다니면서 즐거워했다.
“뭐가 있을까? 뭐가 다를까? 재밌는 녀석들은 얼마나 많을까? 아니지, 뭐하고 놀까?”
조그마한 두 팔을 좌우로 쫙 피고 이리저리 뛰다가 달려오는 기사들을 멀리서 발견하고 양 손으로 딱딱 마찰소리를 내면서 리듬을 탔다.
그러자 우드득 꾸드득 뼈가 꺾이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가 멎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되어 그들과 자연스럽게 지나쳐갔다.
“히히히~~ 수도에서 논다고 정했어. 그러니까 너희들이랑 안 놀아. 다음에 시간 되면 놀아줄게. 빠빠~”
고목나무처럼 뻣뻣해진 노인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이처럼 그들이 사라진 쪽으로 손을 붕붕 흔들어 주고 빨리 놀고 싶은 마음에 폴짝폴짝 서둘러 뛰어갔다.
“하아아~~”
조금 상기된 두 뺨을 쓸어내리면서 안개 속을 걸어가는 릴리움은 짙은 안개에 시야가 많이 확보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발치에 걸리는 육신이었던 녹아내린 시신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처음의 나를 죽이면서 맹세했던 소망이 무엇인지 너는 아니?”
어디에 입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형체를 잃은 시신을 향해 질문을 하다가 혼자 대답했다.
“천공의 땅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이들이 죽는 거란다. 그것 하나만을 보며 수명을 연장시켰거든.”
“릴리...”
릴리움의 뒤에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반조는 릴리움의 도움으로 독에서 자유로웠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당신은 지상인 이었던가? 하긴, 귀족이었던 사람은 나와 페르디난드 뿐이긴 하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과묵하게만 있자, 미간을 모았다.
반조는 릴리움에게 다가와 두터운 손으로 아직도 뚝뚝 피를 흘리고 있는 그녀의 오른 팔을 꾸욱 쥐어 지혈을 했다.
“피를 많이 흘렸다.”
“죽고 싶은가보네?”
지혈을 해주고 있는 반조가 이상한지, 살짝 옆으로 기울여 의문스럽게 물었다.
“별로.”
“내 피가 어떤 피인지 알면서도 이리 만지고 있잖아.”
반조는 요염하게 휘며 웃는 그녀의 눈매를 가만히 보면서 다시 팔 쪽으로 눈을 돌려 지혈하는데 집중했다.
“이미 네 도움으로 지금 나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 그렇긴 하구나.”
별걸 다 깜빡하네. 싶은 릴리움은 그에게 관심을 바로 접고 혼탁한 안개 속을 거닐며 주변을 감상했다.
“이리도 쉽고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에 무엇이 그리 미련이 남아 살려고 발버둥을 칠까? 그렇다면 타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가족을 지키려고 필사적이었는지, 부둥켜 안고 있는 두 어른의 품속에 작은 덩어리를 보아, 그건 분명 어린 아이다.
“모두가 죽는 것을 끝까지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소멸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라는 곳으로 갈래.”
“......”
과묵해도 정도가 심할 정도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반조를 돌아보다 풋하고 웃었다.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열의가 그의 얼굴에 드러나서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러다 다시 목적하는 장소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자신들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소멸하기 전에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에 맞춰 모두는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기에 조금이라도 만족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죽이는 것만을 좋아하는 베인트와 하밀에게 감사해야겠어.”
둘이 신나서 이리저리 날뛰어주고 있는 덕분에 병력들이 이곳에 집중이 되었고, 이동하기 편해졌다.
“아직 현궁에는 많은 수의 기사들이 남아있다.”
반조의 염려하는 말을 정정했다.
“현궁은 상관없어. 황궁 그 자체를 없애고 싶달까? 아무 죄도 없던 우리 가문이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 가는 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 평화나 균형, 정의나 정당을 논하면 뭐하겠니?”
요요히 걸어가는 릴리움과 뒤따르는 반조는 독 안개 속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이미 짙게 퍼진 안개는 가시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