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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눈이 쏟아지듯 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 내 손목에 머문 온기는 아직 멀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현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하고 싶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해요.”
그때와 다른 말을 내뱉는 나를 안아주는 품에서 나는 그만 왈칵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다독이는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런에도 온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따뜻한 온기는 눈가를 쓸어내리고 두 볼을 감싸 안았다.
언젠가 꿈처럼 느껴졌던 그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좋아해. 나도.”
달콤한 입술은 그런 꿈같은 말만 내뱉었다.
그런 사범님을 보고는 나는 또 울어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언제나 이 순간은 현실이 아닐까.
그리고, 또다시 나는 꿈에서 깬다.
아직 가시지 않은 꿈속 감정이 현실을 사는 내 가슴을 쥐어뜯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이불을 걷고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에 멍하니 침대 위에 내려앉은 시리도록 푸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와 같았다.
정말 꿈같이 달콤하게 입을 맞췄던 그 날.
이제는 기억에서 희미해 정말 한 여름날 꿈같이 느껴지던 그 날.
언제나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 전화를 받지 말걸.
아침까지 사범님과 함께 있을걸.
고백이나 한 번 해볼걸.
늘 궁금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을 하면 그때의 사범님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좋아해, 나도.
꿈속, 사범님의 말에 가슴 끝이 콕콕 쑤셨다.
어이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지나버린 일이었다.
후회해도 이미 붙잡을 수 없었다.
그 시절 나는 무척 어렸다. 그래, 어렸지, 많이 약했고.
갓 세상에 나와 이리저리 치이고 상처 입고 나를 지키기 벅찼다.
그러니 몰랐겠지. 그게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붙들고 있을 거란 걸 알지 못했다.
결국 또다시 맺힌 눈물은 입술 끝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와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참 서툴렀었다.
치열했었고.
좁은 시야 속에서 아등바등하던 어렸던 내게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이렇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라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달팠던 그날의 나를 생각하니 눈물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알고 있다.
이런 가정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얼마나 부질없는지.
그래도 이런 푸른 빛이 감도는 아침이면 눈을 감고 싶다.
아무런 의욕이 나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하면 그때 그 시절을 꿈꿀 수 있을까?
하지만 꿈에서도 보지 않았으면 했다.
이제는 정말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되었으니.
깨고 나면 너무 아프니까...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봄이라고 했던가? 그때의 나는 그 순간들이 영원할 줄 알았다.
내가 몰랐던 그 봄은 찬란하게 빛나고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어 내 정신을 빼앗아 내 모든 걸 태웠다. 내 모든 것을 바쳤다.
지독히도 짧은 봄이었다.
너무 쉽사리 놓아버린 봄이었다.
봄은 모질게 나를 외면하고는 활활 태워버린 재를 결국 바람 곁에 모두 흩뜨렸다.
뒤늦게 잡아보려 허우적거리는 손을 스쳐 사라지는 재를 망연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깨달은 다음은 이미 늦어버렸다.
짧았던 봄은 내게 재의 잔상만을 남기고 떠났다.
하루하루 희미해져 사라져가는 기억이라도 억지로 움켜잡으며 나는 다시 오지 못할 봄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그 서러운 꿈속 끝에는 언제나 차가운 현실과는 반대로 따뜻하게 웃어주는 당신이 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한 번 지나버린 봄은 쉬이 다시 올 줄을 몰랐다.
30살. 여전히, 아침의 푸른 빛은 잔인하기만 하고. 세상은 내게 늘 그랬듯 가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