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혼자서 악기치고 피리 불면서 노랠 해라.”
뒷머리를 벅벅 헤집는 론의 손이 다른 때보다 더욱 거칠어, 새둥지가 생겼지만 론은 제 머리를 개의치 않아하면서 바이안을 있는 대로 아작 와그작 씹어댔다.
“네가 그런다고 주군이 모를 거라 생각 하는 건 아니지?”
“...알겠지. 후... 나도 머리로는 헛소리라고 치부하면서도 혹시라도 세나가 정말 그런 거라면 생각하니 진정이 되질 않아.”
“주군의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다 그러겠냐? 솔직히 생각해봐라. 그렇다면 그 오랜 세월동안 대를 이었던 대현자들은 어떻고? 게다가 우리들 기사단은 왜 유지가 되는데? 장수한 분들의 성함들은 다 역사에 알아서 기록되어 있잖아. 그것들은?”
조목조목 따져주어도 역시나 바이안의 복잡한 심경은 좋아지지는 않는 듯 보였다.
“동안은 빨리 늙는 대잖냐.”
“터질래?”
론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면서 위로해주려 사실성을 추가한 농을 던진 것인데, 그 농을 잘못 던진 것 같아 뒷골이 오싹해졌다.
스산한 바이안의 노려봄에 론은 서둘러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아무튼, 주군도 무언가 숨기고 계시다는 것은 얼추 알고는 있고, 그럴수록 네가 더 옆에서 굳건히 잘 버텨야지.”
“그렇지. 그렇지만 그 능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냐?”
“자연의 섭리를 반하는 힘이라... 겪어보지 않아서 상상이 안 된다.”
한참을 둘이서 이것저것 논했고, 확실한 것이 없는 지금은 섣불리 판단해서 일을 그르치지 말자라고 바이안을 도닥이면서 납득시켰다.
“이게 뭔 개소리야?”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안한다니요.”
“아~ 심심해 심심해. 나는 피가 고프다아.”
홀 내부는 시장통처럼 난리가 났다.
그 중심에 태연히 앉아서 차만 홀짝이는 우루루만이 초연했다.
“아예 안 움직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루루의 대답은 모두에게 와 닿지 않았다.
“언니야~ 열심히 늘려놓은 내 펫들은? 언제 놀아아~”
포니테일로 일행 중에 제일 어린 소녀는 우루루를 꽈악 껴안고 온갖 어리광을 뿜어댔지만 우루루는 귀찮아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슬쩍 밀어냈다.
“저는 이제 와서 주인님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이 때에 새로운 녀석을 받아들일 셈이라니..”
“페르디난드씨. 저희들이 주인님의 뜻을 이해할 필요가 있나요?”
학자로 보이는 페르디난드의 말을 뚝 자르며 말을 덮으니, 다른 쪽에서 뒤집어 꺼냈다.
“나야 뭐, 이러든 저러든 상관은 딱히 없지만 이번에는 조금 마음에 안 들어.”
의자에 상체를 한껏 늘어뜨린 제임스는 카이덴황자에게 맞고 있었던 어린 황자를 떠올리며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흐음.. 마치 후계자 같은 구도로군.”
“잘 집으시네요. 역시 연륜에는 엘로이씨세요.”
엘로이라는 중년의 사내는 아직도 우루루의 옆에 데롱데롱 매달려 그녀를 귀찮게 하고 있는 아리아를 들어 올려 제 옆자리에 억지로 앉혔다.
“연륜은 무슨.. 300년 노처녀 보다는 못하지. 크크큭”
“제임스. 당신의 뇌 한번 뒤집어 줄까요? 당신은 어떻다고 그러시는지 한번 봐드릴 의향은 있습니다.”
우루루의 살기에도 제임스는 더 이죽여대서 보는 사람이 참 고까워지게 했다.
“어이고~ 무서워라. 나는 이래 뵈도 마누라랑 자식도 있었던 몸이시라 이 말이지. 노처녀의 연륜과는 달라. 달라.”
정말 생각 같아서는 제임스를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우루루는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전투력이 없기에 힘에서 밀렸다.
“다들 불만이 상당하구나.”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를 향해서 단체로 자리에 일어나 각자가 할 수 있는 예를 보였다.
상석에 위치한 가장 큰 의자에 앉으니, 모두 다시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 그에게 집중했다.
“나 혼자서 해도 되는 것을 일부러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지 않더냐?”
제로드리어스 즉, 제로드는 그들의 불만을 묵직하게 빼버렸다.
자신들끼리 있을 때에야 조금은 불만을 표출한다고는 하지만 제로드에게 진짜로 불만은 제기할 녀석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에게 받은 생명의 연장과 각자가 품고 있는 것들을 풀 수 있는 힘 또한 얻었다.
거기에다 자신들의 영혼 그 자체가 그에게 묶여있다고도 할 수 있고, 그의 심기에 거슬리고 배제가 된다는 것은 즉각적인 소멸을 야기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자신들에게 죽는 것은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 문제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은 사양이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바는 어련히 알아서 올 것이다.”
“일부러 전쟁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주시는 것만으로 낫지요.”
그의 말에 동의하는 우루루의 끄덕임 뒤에 제임스는 다른 부분을 꺼내 동의했다.
“흐음... 슬슬 반응이 올 것이라 예상 하였거늘, 생각보다 상당히 늦군.”
“받아들일 정보가 적기에 어려운 것은 아닌지 사료됩니다.”
페르디난드의 판단에 제로드는 피식 비소했다.
“정보라.. 정보보다는 보이는 결과가 아직 없어서이겠지.”
“그럼, 저희들은 어찌할깝쇼?”
비뚜름한 베인트를 잠깐 못마땅하게 보던 제로드는 시답지 않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큰 반응 없이 대답했다.
“평소대로 하거라.”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괸 상태로 오만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늦기는 하지만 그 아이가 나를 찾아 올 때가 되기는 했지.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꾸나.”
거만하게 꼰 다리가 까닥인다.
“베인트, 하밀, 제임스, 엘로이는 나에게 붙어 있어라.”
“저요! 나는요?”
아리아는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을 열심히 어필했다.
“후... 아리아. 너는 됐다.”
제로드에게도 아리아는 조금 골치가 아픈지,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자연스럽게 이마를 짚었다.
“아빠는 부르면서 나는요? 난 아빠랑 세트잖아요.”
“우루루. 한동안 아리아를 맡아 두거라.”
“아, 귀찮... 네. 알겠습니다.”
철딱서니, 사고뭉치, 말괄량이의 견본인 아리아가 끼어서는 골치만 썩히기에 우루루에게 떠넘겼고, 아리아는 쉽게 만족하면서 곧 바로 우루루에게 답싹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주변 환경에 늘 무미건조한 우루루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큰 반응도 없이 멍하니 앉아만 있는 우루루의 볼에 제 볼을 부비부비,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아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면서 쓰다듬을 기대하다가 그대로 도로롱 잠이 드는 마이웨이 아리아의 모습에 모두의 한숨이 동시에 뱉어졌다.
“호호호~ 그럼 저는 먼저 자리에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번에 아주 희귀한 독초가 발견되어서요. 그 아이는 조금이라도 늦으면 금방 시들어버린답니다.”
릴리움은 제 치맛자락을 정리하면서 제로드에게 짧게 고개를 숙인 뒤에 요요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반조도 릴리움을 따라나서려 엉덩이를 들었다가 혼자서 다녀오겠다는 말에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깔았다.
대현자 직속 호위기사단인 10사단에 소속이 되어 있는 기사들의 숫자는 다른 사단들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바이안과 론을 포함해서 14명이었다가 둘이 따로 빠지고 난 뒤에 그것이 또 어찌 되다보니 로이에가 들어와 늘었다 싶었지만, 하일이 단장이 되어버려서 12명인지라 교대하며 호위하는 일정이 무척 빡빡했다.
오늘도 교대를 위해 3명의 기사들이 숙소에서 나와 목적지로 향했다.
“하일 놈은 단장이 되더니 살 빠져버리더라.”
“인수인계도 없었고, 갑자기 단장이 된 거잖아. 그것뿐만이 아니라, 호위까지 병행하는데 몸이 남아나겠냐?”
“그렇겠지. 생전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전쟁준비까지 해야 하잖아. 솔직히 나는 실감이 안 난다.”
이름 없는 기다란 풀을 입에 물고 있는 레인트의 마지막 말에 둘은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얼마 전에 대륙에 내려갔다가 어제 올라왔는데, 바로 들어와도 괜찮냐? 주군께서 너 휴가 줬잖아.”
다임의 질문에 레인트는 어깨를 피며 가슴을 두드렸다.
“기사된 자, 주군의 곁에서 보필해야 빛나는 법이지.”
“입에 풀떼기는 빼고 말해라.”
“도착하면 뺄 거다.”
말을 하다 보니, 입에서 풀이 떨어질 것 같아서 치아 사이의 틈에 끼운 채로 씨익 치열을 보이면서 말을 하는데 동료들의 눈에는 보기가 썩 좋지 못했다.
“너는 어째, 대륙에 내려갔다 오더니 이상한 버릇을 들고 오냐.”
“멋있으라고 하는 거 아니다.”
“그럼 뭔데?”
레인트는 풀을 한번 우물거리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려 물었다.
“맛있나 해서 물어봤다.”
“미친놈.”
“어. 나 미친 거 맞아. 이것저것 씹어 봤는데, 맛 드럽게 없더라.”
맛이 없으면 버리면 되는데도 레인트는 물고 있는 풀잎을 놓아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대륙도 참 평화롭더라. 맛있게 먹던데 왜 난 맛이 없냐..”
갑자기 자기 혼자만 아는 말을 엉뚱하게 끄집어내면서 무의식적으로 풀을 우물우물 씹다가 이내, 우웩하고 뱉어내려다 짓이겨진 부분을 떼어내고 다시 입에 문다.
레인트의 이에 희생당하고 있던 풀은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 창밖으로 자유를 찾아 하강할 수 있었다.
“응? 레인트경? 안 피곤해?”
“괜찮습니다.”
교대하자마자 세이나에게 목례를 해 보이자마자 세이나의 걱정을 받게 되어, 괜찮다며 웃어 보이는 레인트의 치열에 낀 녹빛의 찌꺼기가 상당히 거슬려 세이나의 눈가가 가늘게 접혔다.
“이 부분은 수정하자. 확실히 효율성이 좋아지기는 하지만, 방어력이나 전투력이 깎일 수 있겠어. 이러다 뒈져.”
세이나는 하일과 한창 논의 중이었기에 바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본론으로 돌아갔고, 하일은 가지고 온 서류에 고칠 점들을 체크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일리가 있군요.”
“응.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 방식은 어때?”
세이나도 펜을 들고 끄적끄적 글자들을 적어 넣고 넘겨주니 하일은 곰곰이 고민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정리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응. 다녀와.”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하일을 보낸 후에 소파에 늘어지나 싶었던 세이나는 히데아가 쉬라면서 챙겨 들어온 간식에 허리를 바짝 세우고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와~ 역시 히데아야.”
향긋한 버터 향에 섞여 풍겨지는 사과의 단내에 오늘의 간식은 사과타르트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눈치 챘다.
“사과타르트~ 사과타르트~ 사과사과사과타르트~”
최애 간식의 등장에 흥이 돋아 절로 노래가 나왔다.
기사들은 사과타르트의 등장에 지금 잠시 어디 나가있는 바이안이 문득 떠올랐다.
사과타르트에 대한 고찰로 논문을 쓰라고 하면 상당히 두꺼운 내용을 써 내려갈 정도의 애착을 보이는 바이안의 코 박고 쳐묵신공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그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히데아가 앞에 놓아주는 타르트를 받아든 세이나의 눈은 그 어떤 때보다 촉촉함에 더해서 반짝반짝 빛났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타르트는 아기 사과라고 부르는 작은 사과를 반달 모양으로 얇게 썰어 꽃 모양으로 둥그렇게 만들어 만개하고 있었다.
“아앙~”
먹기가 아까워질 정도로 예쁜 모양이었지만 세이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러자, 안에 작은 블록으로 버터와 설탕으로 익힌 사과와 꽃모양을 위해 자리 잡은 사과들이 아삭 씹히면서 과즙이 입안에 가득 메워졌다.
“오~ 시나몬도 넣었구나.”
“네. 시나몬이 잘 어울리는 아이니까요. 아, 그리고 이번 사과가 상당히 달아서 반죽은 파트브리제로 해봤어요. 기본적으로 설탕이 적게 들어가고 담백함이 장점이거든요.”
타르트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히데아의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세이나는 다시 한입 베어 물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시나몬의 향긋함이 사과의 향에 이불을 덮어주고, 반죽으로 틀을 잡을 때, 피케를 해서인지 크게 두껍지도 않아, 입안에서 멋들어지게 섞였다.
“오늘따라 히데아한테 괜히 미안해지네.”
“네?”
세이나는 손가락으로 볼을 살살 긁적이면서 갸우뚱하는 히데아에게 예쁘게 웃었다.
“바쁘기만 한 시녀장이 아니라, 주방 메인인 요리장으로 넣어 줬어야 했나 싶거든. 나도 요리 할 줄은 알지만 히데아는 요리 엄청 잘하고 좋아하잖아.”
히데아는 자신을 칭찬하는 세이나 덕분에 두 볼이 발갛게 물들며 칭찬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지금도 매우 즐겁고 행복하다며 쭈뼛쭈뼛 손 사례를 치는 히데아에게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남은 조각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벌써 하나를 뚝딱 해치운 세이나는 자신과 입맛 취향이 비슷한 바이안도 참 좋아하는데 싶어져, 같이 먹게 조금 남겨두려고 개수를 셌다.
마침 막 개수확인이 끝나던 차에, 황궁에 들렸던 바이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이안이 들어오자, 주변에 있던 모두가 누가 먼저 말을 한 것도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문밖으로 나갔다.
눈치껏 둘만이 있을 수 있게 해주기 위한동료 나름의 배려였다.
레인트를 위시한 기사들은 문 밖에 서서 대기했고, 히데아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간식만 놓아 둔 채로 바로 자리를 이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