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지 않아 차가운 겨울이 태양빛으로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지는 정오의 어느 도시.
대륙의 여기저기에서 여러 스타일을 가진 많은 이들이 각자의 목적을 위해 분주히 교류를 하고 있다.
크고 작은 상단들이 각 지역의 특산물들과 상품들을 나른다면, 여행객들은 이야기를 그 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풀어 귀를 즐겁게 하기를 꺼리지 않았으며, 모험가라는 조금은 거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여러 의뢰를 받아 상단의 호위나, 자잘한 분쟁에서 검을 들기도 하고, 위협이 되는 마수나 맹수들을 상대하며 그 전리품을 취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고대 유적들을 발견하기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대륙에서도 거의 중간에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그런 이들이 활발히 활동하기를 아끼지 않는 곳에 여행객이라고 보기에도 모험가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한 사내가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다들 바쁘게 다니고 있기에 그 사내에 집중을 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우연히 그 사내를 보게 되는 이들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살아 숨을 쉬는 사람이 맞는데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것 같고, 많은 이들 중 한명일 텐데도 그 사내만이 세상에서 동떨어져 현실적으로 없는 그런 느낌이라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더라도 바로 잊어버리고 관심을 버린다.
홀로 느긋한 사내는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들어 올린 시선이 하늘의 어딘가를 향한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흐른다 한들, 세상은 변함이 없구나.”
자세히 올려다보면 매우 작은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그 것이 고귀한 이들이 산다는 천공의 땅이라는 것을 대륙에 사는 이들 중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부조리하다 느낀다 하여도, 불공평하고 억울한 이가 있다 하여도, 모든 이들이 그 것을 알지 못하며, 이 뒤틀린 세상에 살기를 꺼려하지 않지.”
작은 소리도 아닌 혼잣말로 누구에게 가르쳐 주는 이처럼 떠들어도 역시 주변에선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고 바쁘게 그를 지나쳐갔다.
“이 세상이 잘못 되었다 그 누구도 알지를 못하고, 마치 당연하다 여기는 모든 이들이 어리석구나.”
가만히 서 있었던 그의 걸음이 한 발 떼어진다.
“보거라. 네가 지키려 했고, 희생을 했다 하여도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 너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다시 한 발짝 뗀 걸음에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변하며 그는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두 번 다시 딛고 싶지 않던 이 땅에 발을 디딘 지금도 내가 틀리다 생각지 않는다.”
그가 서있는 곳,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천공의 땅의 어딘가에 갑자기 나타난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오직 너만이 내가 틀리다 하였지.”
조용히 부는 작은 바람이 그의 잿빛 머리카락을 건든다.
천공의 땅에서도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그란시아 공작령의 거리에서 바이안은 빨갛게 익어 그냥 봐도 달달해 보이는 과일을 한입 베어 물으며 점심을 간단하게 때우고 있었다.
“허탕인가?”
대대로 학자 집안으로 유명한 그란시아 공작이고 세이나의 어머니인 세일리아의 스승이기도 했던 공작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낼 일이 있어, 바이안은 스스로 자신이 가기를 자처했다.
그리고 바이안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도 없이 혼자 공작령에 들렸다.
아주 오래전 공작가의 조상들 중에서 대현자가 나온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바이안은 그 이야기를 물어보기 위해 공작과 마주했고, 그의 서재 깊숙이 보관되어 있는 고서적들을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내리 일주일을 서재에서 살았지만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어 허탈했다.
자신이 소속 되어 있고 주인으로 모시는 대현자의 존재의의에 대해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이나의 옆에 딱 달라붙어 은연중에 느끼는 무언가의 불안함이 그를 괴롭혀 댔고, 평소와 다름이 없는 그녀의 미세한 변화가 그를 자극하고 움직이게 했다.
그 원인을 기필코 알아내야만 후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과연 자신의 이런 행동이 그녀에게 배신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닌지. 분명, 그녀를 믿지 못해서 이랬다 할 수도 있는 그런 걱정도 함께 안고는 있어도 바이안에게는 주군이기 전에 모든 마음을 바친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공작역시 바이안이 알고 있는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으며, 하나 알게 된 것이라고는 대현자 본인만이 현자의 돌을 취하면서 그들만이 내려오는 정보를 얻는다 정도였다.
즉, 대현자에 대한 것들은 그 대현자 본인만이 안다는 것이었다.
바이안이 감히 세이나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주인과 기사라는 엄연히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기에 그 답답함이 날이 갈수록 커졌다.
“음... 날아갈까?”
마차로 가는 것 보다는 마력을 사용해서 달려가는 것이 빠르고, 달려가는 것 보다는 장애물이 없는 하늘이 더 빠르기에 자연스럽게 하늘가로 고개가 올라간다.
마력이야 차고 넘쳐나니 고갈이 날 걱정은 없어서 쉽게 튀어나온다.
바이안은 세이나 금단현상이라도 있는지, 일주일동안 보지 못해서 서둘러 돌아가 자신을 향해서 활짝 웃음 짓는 세이나를 1분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러다 공작이 세이나에게 주라고 건네준 상자를 지긋이 노려보니 상자에 취급주의 문구가 눈에 띈다.
물론 달리든 하늘을 날아가든 물건이 깨질 염려는 없기도 하지만, 세이나의 어머니유품 같은 물건인지라 조심스러워 그냥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기운 빠진 걸음으로 공작령을 벗어났다.
수도와는 가까운 거리인 덕분에 빠르면 3일에서 여유롭게는 5일 안에는 도착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농경지를 지나 들판을 건너 작은 산을 오르고 내려 군데군데 크고 작은 마을들을 지나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한 번 생기기 시작하면, 때론 본인을 미치게 하기도 하지. 특히, 그 원인이 소중한 사람의 비밀일수록 말이야.”
수도와 연결되는 긴 길목에 드물게도 지나가는 행인들이 거의 없는 곳, 한 나무의 등치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있는 어느 사내의 말소리에 그를 지나치려던 바이안의 걸음이 멈췄다.
바이안과 정체 모를 사내 단 둘 뿐인 상황이라 그냥 지나가듯 꺼낸 혼잣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기에 멈추어진 발은 굳어져 움직일 줄을 몰랐다.
“본능이 너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더냐? 기사가 감히 주인의 비밀을 알려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 못인지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마치 자신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아는 말투에 이질감이 가득 심장을 옥죈다.
“네놈이 아무리 찾아보고 조사한다 하여도 대현자들만이 아는 내용을 알 길은 없을 것이다.”
“뭐하는 놈이냐?”
“놈이라...”
경계와 살기를 보이며 목소리를 낮게 까는 바이안의 경계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사내의 입가만이 비틀려 위로 올라간다.
“그 아이의 신체적인 변화가 왜 일어나는지, 혹, 그 변화가 그 아이를 잃어버리는 큰일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을 텐데. 내 추측이 틀리더냐?”
바이안은 자신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사내의 말에 오싹 소름이 돋았고, 건조한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퍼뜩하고 설마 싶은 존재가 심연을 타고 수면위로 올라왔다.
“나라면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려줄 수도 있단다.”
혼탁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텅빈 사내의 눈동자를 계속 주시하고 있으면 자신이 그 혼돈에 먹혀버릴 것 같은 착각이 밀려 올라왔고, 그와 동시에 카카리아 마을을 없앴던 장본인임을 깨닫자마자 바이안은 온 마력을 풀어 그 사내에게 짓쳐 들어갔다.
하지만 발을 뗌과 동시에 앞으로 가기는커녕 반대로 몸이 강한 힘에 붕하고 밀려나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무 등치에 부딪혔고, 충격에 우드득 나무가 우그러졌지만 그것에 멈추지 않더니, 몇 번을 더 반복해서 날아가 몇 그루의 나무를 더 부러뜨려서야 멈췄다.
“커헉!”
큰 충격에 앞으로 기울어지던 상체가 알 수 없는 힘에 그대로 나무기둥에 몸이 묶여버렸다.
“쿨럭. 큿”
선혈을 뱉어내는 바이안의 앞에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짝 다가왔다.
“한심하긴. 상대와의 실력차이를 가늠도 하지 못하고 덤비는 꼴이라니. 아이야. 참으로 어리석구나.”
“네 놈...”
손을 들어보려 안간힘을 써보아도 손가락 하나도 까딱이지 못해 이만 갈아붙인다.
게다가 마력이 무언가에 막혀 운용이 되지 않았다.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틀려먹었어.”
상대를 압박하고 있는 상태라기에는 태연하고 느긋한 사내는 바이안이 필사적으로 반항을 시도하려하고 있어도 상관없이 제 할 말만을 이었다.
“믿기지 않아하는 눈이로구나. 자연의 섭리를 반하는 능력이 놀라운 게냐? 어떠한 능력인지도 알기 어렵겠지. 한 가지 추가로 덧붙여 알려주자면 대현자 그 자체가 반하는 존재란다.”
“무슨..”
바이안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사내는 손으로 그의 턱을 올려 잡았다.
“한낱 인간이 가져서는 안 돼는 힘을 제 몸에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느냐?”
잘게 흔들리는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바이안의 표정에 사내는 피식 실소를 머금고 그의 혼란과 궁금함을 풀어주지 않고 더욱 가중시키며 그 모습을 즐겼다.
“애초에 황제가 가지는 능력 또한 궤를 달리하니 네 녀석도 어느 정도는 다르지 아니하지.”
한발 뒤로 물러나더니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이안의 신체가 공중에 들어 올려졌다.
“너는 참으로 나를 닮았어. 오늘 이리 마주하고 보니 더욱 닮았구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답답함에도 어떻게 해서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 바이안의 손이 까딱하고 간신히 움직였다.
그러자 핏하고 사내의 눈 밑에 아주 작은 실선이 그어지며 붉은 핏 방울이 하나 맺혔다.
“호~ 크크큭. 크하하하 제법이로구나. 이 몸이 힘을 크게 쓰지 않고 있었다지만 상처를 내다니. 아~ 역시 마음에 드는 아이야. 역시 나와 닮았어.”
고개를 재치고 크게 웃는 사내의 유쾌함과는 다르게 그는 주먹을 말아 쥐고 바이안의 복부를 강하게 올려쳤다.
“카학~”
허공에서 묶인 상태로 당한 충격이 내장을 두들겨 대니 속이 버티지 못하고 울컥 피를 쏟아내 바닥을 축축이 적셨다.
사내가 힘을 풀자 추욱 쳐진 바이안이 힘없이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고, 그런 그를 내려 보는 사내의 눈동자는 어느새 광기로 번들거렸다.
“...해... 말 해.”
볼품없이 바닥에 엎드린 채로 손으로 흙을 한 움큼 쥐면서 억지로 고개를 들며 토하듯 뱉어낸 괴성에 사내의 광기는 더 진해질 뿐이었다.
“네 놈들의 목적이.. 쿨럭... 왜 세나를..”
“흐음.. 역시나 내가 너를 찾아 온 이유보다는 그 아이를 왜 죽이려 했는지가 더 신경이 쓰이나 보구나.”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바이안의 머리채를 틀어잡고 자신의 얼굴 높이로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이야. 그 궁금증 보다는 다른 것이 더 신경이 쓰일 텐데, 아니더냐?”
“......”
실력 차이가 확연히 나는 데도 겁을 먹기는커녕 독기를 가득 담은 바이안이 썩 마음에 드는지, 사내는 자신의 자식을 보는 것처럼 인자하게 내려다 보다 눈을 맞추고 바이안의 눈동자를 통해서 내면을 긁어봤다.
비어있는 눈동자가 어둡게 번뜩이면서 뚫고 들어오는 통에 바이안은 영혼이 발가벗겨지는 기분과 거죽이 뜯겨나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아이에 대해 사랑을 넘어 신봉하는 수준이로구나. 대단해.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 전부를 바치는 모습이라.. 나를 무척 즐겁게 해주는 아이로다.”
혼자만의 감상을 뱉고 나서, 바이안의 귀에 제 입을 바짝 들이밀었다.
“현자의 돌의 힘을 몸에 받는 다는 것은 스스로 죽겠다는 것이야. 첫째로 신체의 변화를 들 수 있겠구나. 돌의 힘이 서서히 그 몸을 갉아 먹지. 먼저 머리카락의 색이 빠지는 것을 시작으로 몸의 기능을 하나하나 잃어간단다. 그리고 작든 크든 그 힘을 한 번 쓰게 되면 죽어. 아니, 단순히 죽으면 다행이려나. 그 영혼 자체가 구원을 받지 못해. 소멸, 영혼의 완전한 어둠이란다.”
“?!!”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해하는 바이안을 그대로 바닥에 버리듯 놓아두고 자리에 일어난 사내는 매우 만족해했다.
바이안은 어떻게 해서든 움직이려 했지만 역시 거대한 힘에 짓눌려 그것도 용이하지 못했다.
“대현자라는 것은 말이다. 이 불균형한 세상을 억지로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이지. 왜 모두에게 칭송을 받는 이면서도 그 어떠한 것에도 자유롭지 못한지 이해할 수 없지 않느냐? 즉, 단순한 산 재물일 뿐이란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 모두가 당연한 삶을 누린다. 대현자의 삶과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들은 내용을 부정하며 바이안은 바르작 몸을 떨어댔다.
“아니. 네 놈이 혼란을 주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내가 네 놈의 말을 들을 줄 아느냐?”
“쯔쯔~ 아이야. 이 몸의 힘을 그 몸으로 직접 체감했으면서도 일부러 이리 귀찮은 짓을 내가 할 것 같아 보이더냐? 손 한번 휘 젓는 것만으로도 다 없앨 수 있는 이 몸이 말이다.”
압박하는 힘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검을 쥐는 바이안을 안쓰럽게 보면서도 사내는 등을 돌려 몇 발자국 걸어갔다.
그러다 다시 몸을 돌려 후들거리는 다리로 애써 버티고 있는 바이안에게 나직히 말을 덧 붙였다.
“내 한 가지 예언을 하지. 네 스스로 나를 찾아 올 것이다. 이 불공평한 세상을 비관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욕하면서 말이야. 어디 실컷 진실을 찾아 발버둥 쳐 보거라. 끝내는 내가 가는 길을 네 녀석이 선택할 것이다.”
“내가..”
악 다문 입을 열어 반박하려는 바이안의 말을 자르면서 사내는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며 마지막 말을 꺼냈다.
“시간을 줄 터이니, 만족할 때까지 발버둥 치거라. 아! 한 가지 나에 대해 힌트를 준다면 엘라이어 제로드리어스 먼 과거에 버렸던 나의 이름이야.”
물론 그 때의 모든 자료는 직접 이 손으로 소거했지만 말이다라는 말이 멀리서 들리듯 작아지며 자신의 존재를 밝힌 사내는 온데간데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