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단장님. 다들 너무하다 생각지 않습니까?”
땅이 파이다 못해 지하를 뚫고 지하 암반수를 발굴할 것 같은 한숨이 방안에 가득 내려앉아 푸욱 꺼졌다.
그 한 숨의 주인공인 하일은 모형 장난감을 쥐고 누워 있는 알바트론에게 자신의 신세한탄을 침을 튀겨가며 토로했다.
“모두 이 생고생을 하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저한테 떠넘긴 것이 확실합니다. 예. 확실해요.”
자신의 판단이 옳다 강하게 어필을 하다 다시금 길게 한 숨을 뿜어댔다.
“후~ 도와주는 것도 하나 없는 놈들이 사고란 사고는 치고 다니고, 예산 안을 올리자마자 무기고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지를 않나, 물론, 부서진 무기고에 있는 것은 훈련용이라 날이 없는 싸구려긴 합니다. 그렇다고 무기고를 통째로.. 큿. 더해서 훈련장이 역할에 맞게 다 나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곳에서 때려 부수잖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신입들이 아직 자리 잡지도 않아서 훈련일정을 짜기에도 벅차건만, 로트론 그 새.. 크흠~ 그 자식이 신입들에게 뭐라고 했는지, 밤마다 선배들을 골탕 먹이는 일로 난리입니다.”
그동안 쌓인 것이 많다 보니 주먹을 말아 쥐고 분노하다가 마지막에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제가 할 말은 아니군요.”
신입시절에 대 괴도로서 활동했었던 그때가 떠올라 설득력이 없는 한탄임을 바로 인정했다.
“그렇죠. 증거만 없으면 된다며 뒤에서 뜯어 먹었던 놈들 중 한명인 제가 할 말은 아니군요.”
고개를 숙였다가 분노했다가 땅을 파는 하일을 빤히 보는 알바트론의 시선에 하일은 공감어린 표정을 보였다.
“단장님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동안 이런 일들을 홀로 다 처리 하셨다니, 그.. 솔선수범해서 사고 쳐 왔었던 것들 정말 죄송합니다.”
일반적으로 철이 없는 자식에게 부모는 네가 애를 키워보면 그 고생을 이해한다고 하는 말들이 있다.
지금 하일은 딱 그 느낌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새로이 느끼며 사고의 주범 중 한명인 자신이 동료들을 대표해서 그때의 일을 사과했다.
“부~”
알바트론은 손바닥을 쫘악 펴서 앉아 있는 하일의 허벅지를 팡팡 쳤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로해주고 독려해주고 계시다고 멋대로 생각하며 힘겹게 입매를 위로 끌어 올렸다.
“단장이란 자리를 선배들이 떠넘긴 것이 확실하지만, 맡게 된 자리 최선을 다해야죠. 단장님 못지않게 훌륭한 단장이 되도록 임하겠습니다.”
결의를 다짐하는 것을 그에게 보고하듯 말한 하일을 방안 구석에서 술을 담구고 있던 할아범이 끌끌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가는겨?”
“예.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할아범에게 고개를 숙인 뒤 알바트론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단장님 또 보고하러 찾아뵙겠습니다.”
기사단내에서의 일상이나 일들을 보고하러 왔다는 것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지만 하일에게는 보고였다.
물론 보고라 쓰고 신세한탄이라 읽는다는 것은 오늘의 하일을 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지금은 할아범만 알았다.
이제는 자신의 집무실이 된 단장전용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무척 무겁다.
그래서인지 걷는 그의 걸음 속도는 평소보다 상당히 느렸고, 복도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나 감상하며 가자며 시선을 밖으로 두고 천천히 둘러봤다.
하일은 주군의 직속 기사단이 된 것도 꿈만 같은 일이었는데, 어느새 단장이라는 자리에 있는 자신이 새삼 신기했고, 어느 정도 적응은 했지만, 아직 조금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집안이 집안인지라 편견, 차별과 싸우며 간신히 공백의 기사단에 입단했고, 자신을 차별 없이 대우해주는 알바트론 단장의 밑에서 같은 팀원인 10사단의 동료들과 부대끼며 하나씩 인정을 받아왔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위로 껑충 올라올 거라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 없던 일이었다.
그 덕분에 기사단 내에서 분명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선배기사들도 많았지만, 상당히 젊은 나이에 단장이라는 이례적인 출세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받아 내야했다.
물론, 모두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고 무겁다.
게다가 평화로움 속에서 잠정적인 적들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그에겐 아직 경험과 노련함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에 다른 그 어떤 기사들보다도 알바트론 단장의 빈자리를 몸과 마음으로 느꼈다.
간간이 복도에서 그를 지나쳐 가는 기사들의 인사와 시종이나 시녀들이 고개를 숙여 보인다.
하나하나 인사를 받아주며 지나갈 때, 특히나 시녀들이 멀어지는 하일의 뒷모습을 보면서 수줍은 소녀처럼 꺅꺅 서로 말을 주고받는 모습에 쑥스럽기도 했지만, 복도의 한 쪽 끝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로 보이는 광경에 순식간에 가슴속이 허전해졌다.
지금 시간이면 시녀장인 히데아는 주군의 곁에 있어야 하는데 왜인지 주군의 방과 한참 떨어진 곳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왼손으로 벽에 손을 짚은 채로 내려다보고 있는 말썽의 근원인 론이 누가 봐도 그윽한 눈으로 시녀장의 앞머리를 만지작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시녀장의 앞 머리카락을 옆으로 살짝 걷어 옆머리에 고정시켰다.
“역시. 이게 제일 낫군.”
“카 카시어스님.”
히데아는 자신의 앞 머리카락이 커튼을 걷어 환해지는 것처럼 시야가 환해지며 보이는 론의 얼굴에 핑크한 두 볼이 바짝 달아올랐다.
“전에도 내가 말하지 않았나? 예쁜 눈 가리지 말라고. 말을 듣지 않아서 내가 직접 해주는 거다.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고 다녀.”
히데아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옆머리에 꽂아진 작은 머리핀을 조심히 쓸었다.
“심부름으로 잠깐 나온 것 같은데 내가 너무 붙잡았구나. 그만 가봐.”
“네.”
눈동자를 살짝 내려 론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싫지 않은지 작게 입매를 올리며 론에게 고개를 살풋 숙여 보인다.
론은 창틀에 잠시 걸쳐놓았던 서류를 들고 걸어가다 휙 하고 바로 다시 고개를 히데아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아. 그 핀 절대 빼지 마라.”
그러더니 처음부터 자신은 쿨한 사람인 양, 세이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론이 보이지 않아서야 히데아는 양 손으로 열기를 식히려고 두 볼을 감싸더니 서둘러 복도를 걸어갔다.
하일은 자신을 빠르게 지나쳐가는 히데아를 힐끔 보다가 그녀가 사라져서야 은신을 풀고 쓸쓸히 걸음을 옮겼다.
“하아~ 내가 범인처럼 왜 숨어 있는 거냐. 저 자식은 하필이면 복도에서 연애질이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지만, 오히려 하일에게 외로움을 가중시킬 뿐이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어찌 마친 뒤에 저녁을 먹을 세도 없이 곧 바로 주군이 있는 곳으로 새로 짠 예산안과 기사단의 업무 보고서를 챙겨 찾아갔다.
“주군. 하일입니다.”
자신이 찾아 왔다는 보고를 하고 들어온 대현자 전용 집무실에 언제나 그랬듯 세이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골골대며 손만 흔들어 하일을 맞이해주었다.
힘없는 세이나의 반응에 자신이 챙겨온 보고서를 차마 건네기가 무척 미안해져 조용히 책상의 모퉁이에 내려놓았다.
“끄응... 알현신청을 받아 준 것이 잘못한 거야. 한 번 받아 주니 다시 안 받는 다고 할 수도 없잖아. 아 귀찮아. 아 머리아파아~”
다른 이들에게는 고고하게 대하는 그녀가 자신들에게는 편한 모습을 보여주는 세이나의 한탄 같은 투덜거림에 엷게 미소가 번진다.
대현자를 찾아오는 이들의 알현을 받아주기 시작하니 소문이 쫘악 퍼져, 온갖 고민들을 안고 세이나를 찾아와 거의 매일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그런 이들에게 기가 빨리기라도 했는지 힘 하나리가 없어 뵌다.
“내가 왜 그랬을까...”
박은 고개를 들지 않고 징징대다 간신히 손을 꿈틀거리면서 하일이 가져온 서류를 끌어가서야 허리를 폈고, 때는 이때다 한 바이안이 히데아가 챙겨놓았던 음료 잔을 냉큼 들어 빨대를 세이나의 입에 넣어준다.
‘맞다. 여기도 커플이지...’
쭙쭙 맛있게 마시면서 서류의 내용들을 훑어 내린 세이나는 다 보고는 책상에 내려놓고 오늘따라 그늘이 잔뜩 진 하일의 얼굴에 갸웃 하다가 그의 고생을 치하했다.
“생각보다 신입들의 자리 배치가 빨리 됐네. 이쪽 예산이야 바로 해결 할 수 있고, 하일경 수고했어.”
인사하듯 꾸벅 숙여 보인 하일은 세이나가 자리에 일어나 소파로 가 앉자 자연스럽게 근처에 함께 앉았다.
물론 론과 바이안도 같이 앉아 늘 해왔던 소수정예 회의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로이에가 상당히 늦네?”
기사단에 새롭게 들어와 홍일점을 찍은 것도 잠시, 유일한 여기사라 로이에는 의외로 무척이나 바빴다.
“아마, 오늘은 무리이지 싶습니다.”
“신입들의 훈련용으로 데려온 마수들을 싹 몰살시켜버렸으니, 그 땜빵으로 뛰고 있을 테니까 무리겠지.”
자기 친 동생이면서도 거침없이 꺼내는 론의 말에 모두 마수코스프레를 하면서 신입들의 몸빵을 자처하고 있을 로이에가 상상이 되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혼자라는 특성으로 직속호위기사가 되어 거의 매일을 세이나의 곁에서 호위하는 일정에서 잠시 빠져나가 있는 로이에가 뭇 걱정스러운 하일은 홀로 작게 신음을 흘렸다.
누가 론의 동생 아니랄까봐 다른 의미로 하일의 업무를 가중시키는 신흥 문제아라 자신이 일부러 그 땜빵을 시켰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을 들을 로이에가 아닐 것이라서 바로 전력으로 쓸 수 있게 해야 할 신입들을 못 쓰게 만들까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를 괴롭혔다.
‘끄응.. 나도 아직 단장으로서 부족하구나. 그때 욱해서 보내 논 것이 잘 못일지도 모르겠어. 하아.. 야근할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하는구나.’
세상만사 걱정거리를 혼자 다 떠안은 듯 생각에 잠겨있던 하일은 한참 대화가 진행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던 자신을 질책했다.
앞으로 다가올 적들을 언제라도 상대할 수 있도록 내실을 다지기 위한 회의에 자신이 놓친 부분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바쁘게 듣던 중 히데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유독 모두가 바빴고, 세이나도 응접실에서 사람들의 푸닥거리를 해주니라 히데아를 자세히 마주 보지 못했던 세이나는 눈이 왕방울처럼 커진 채로 히데아의 얼굴을 뚫을 기세로 쳐다봤다.
시녀장이라는 높은 직책과는 상관없이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잘 못 보면 푸석거려 보이는 적갈색의 곱슬머리로 눈가를 가려왔던 앞머리가 깔끔하게 옆으로 넘겨져 있었다.
작게 반짝이는 보랏빛의 꽃핀이 고정을 시켜 늘 가려져있던 연두 빛 녹안이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촉촉하게 반짝였다.
세이나의 시선에 홍조가 물든 볼로 침착하게 제 할 일을 하는 히데아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태연했다.
바이안은 애초에 세이나 외에는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으니 큰 감흥이 생기지 않아 태연하다면, 론은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이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하듯 뿌듯해 했고, 하일은 처음부터 그 상황을 지켜봤었고, 이미 가까이에서 봤던지라 놀랍지도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진작 그렇게 하지. 완전 예뻐.”
히데아의 작은 변신에 호들갑스럽게 띄워주며 칭찬하는 세이나 덕분에 히데아의 고개가 들릴 세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다 한 번씩 뒤를 돌아 쳐다 보게 되는 그런 미인은 아니지만, 엷게 핀 주근깨와 큰 눈의 녹안이 충분히 시선을 잡아끌며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미형으로 보였다.
“히데아한테 반해서 고백하는 남자들이 상당히 나오겠는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태생적으로 쑥스러움이 많은지라 히데아는 세이나의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잠시 여자들만의 화기애애한 꽃밭의 분위기 속에서 하일은 세이나의 말과 함께 꿈틀하는 론을 볼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았던 론이 갑자기 바뀐 심기 불편함을 주군의 앞이라고 열심히 감내하는 모습에 실소가 터진다.
짧게 끝난 회의에 해산하고 나오니 먼저 나간 론이 히데아를 잡고 있는 것이 하일의 눈에 띄었다.
낮에 봤던 장면이 재현되고 있는 상황에서 행동 하나만 바뀌었다.
론은 곰곰이 고민을 하다 히데아에게 꽂아준 핀을 빼서 그녀의 제복의 카라에 꽂아주었고, 자연히 다시 그녀의 눈에 적갈색의 커튼이 쳐졌다.
방향이 반대 방향이라 대화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왜 자신은 론이 뭐라 하고 있는지 예상이 될까, 이상한 방향으로 촉이 발전한 착각에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벗어났다.
“순진한 여인하나 잡아서 하는 짓 하고는.. 차라리 그냥 사귀어라. 뭐하는 염장인지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