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한 낮이로다. 잠이 덜 깨어 멍했던 것을 털어내니 오후가 다 되더라. 세이나는 그럼에도 침대에 벗어나지 않은 상태로 제 몸 상태를 체크했다.
“무리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무리 한 것 같네.”
한 손을 들어 이마에 만져지는 딱딱하고 부드러운 돌을 만지작대다가 뻑뻑한 왼쪽 눈을 부비적 문질렀다.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서인지 방안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던 지라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 일을 하기 쉬웠다.
“내 예상대로는 이제 이년? 으로 보고는 있는데, 어찌 되려나.. 조용하니까 괜히 찝찝하네. 후우~”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는 그 사이에 할 일을 해야 했기에 세이나는 바쁘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한 없이 한가하게 보일 것이지만 정작 세이나 본인은 바쁘게 열심히 잠을 잤다.
“좀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이러다 금세 들키겠네. 킥킥”
웃을 일이 아닌데도 장난스럽게 웃었다.
수시로 올라오는 보고서들 중 어제 다 읽지 못한 것들을 따로 챙겨왔었는지 방안에서 적당히 자리 잡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이런다고 나오지도 않을 텐데, 그 미친놈이 나 여기 있어요. 라고 하겠냐고.”
아무리 세이나라 하더라고 일의 원인인 그가 이 후에 어떻게 움직일지 까지는 알 수 없는지라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고 상상을 해보지만 아직은 딱히 내 놓을 답이 없어 애꿎은 한 숨만 내 쉴 뿐이다.
“이럴 경우에는 최악의 수를 가정하고 움직여야겠지.”
아무래도 너무 오래 방안에서 나오지를 않는 것이 걱정이 되었는지, 히데아가 조심히 방문을 노크하며 들어와 세이나를 케어 해줬다.
늦은 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 자신의 집무실로 가니, 이제는 익숙하고 친근한 자신의 수족이 된 기사들이 세이나를 반기고 맞이해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꺼풀 껍질을 벗고 개운해 보이는 바이안이 가까이에서 반겨주었고, 세이나는 그의 목소리와 미소에 활짝 웃어보였다.
“단장의 자리를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는 없겠지?”
오늘 하고 싶은 주제를 꺼내며 주변에 있는 기사들의 면면을 훑어보니 다들 그 자리에 서야 할 사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던지 사뭇 진지하다.
그런 일만 아니었으면 자연스럽게 후대에 누구를 세울지는 단장이 알아서 잡아 줄 수 있었겠지만, 그 자체가 없이 비어진 상태인지라 기사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난제로 떠올랐다.
게다가 알바트론단장의 다음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바이안이나 론은 같으면서도 다른 쪽으로 이미 둥지를 틀고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기에, 더 어려워하고 있어서 쉽지가 않다는 것을 세이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 오늘 이렇게 그 화재를 꺼냈다.
“다들 이 사람이다. 하는 사람 없어?”
자신의 호위 기사들에게 질문을 넘기지만 쉽게 꺼내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세이나 본인도 아직은 기사들의 모든 면면들을 알지 못하기에 누가 리더쉽이 있고, 누가 능력이나 실력이 뛰어난지를 확실하게 정리할 수가 없어 퍽 난감했다.
“뭐, 토너먼트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투표라도 해봐?”
이렇게까지 말을 거는데도 다들 묵묵부답이니 어쩔 수 없다며 입 꼬리를 진하게 끌어올렸다.
“내 맘대로 한다? 후후후후”
“응? 무슨 좋은 수라도 있어요?”
론의 물음에 아주 좋은 수라며 그들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줬다.
“다들 모이는 저녁식사시간에 쳐들어가려고.”
“??”
“이름하야, 상사와의 숨 막히는 회식이지.”
모름지기 윗사람과 함께하는 자리는 사적인 자리면 자리일수록 눈치가 겁나게 보이는 법이다.
상사가 아무리 사람이 좋고 편하게 해준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오는 부담감이나 압박감이 없을 리가 없기에, 배려를 해주기 위해서라도 피해주는 것이 윗사람의 도리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일체 빼기로 작정을 한 그녀의 말에 허리를 세우고 온 몸을 경직시킬 동료기사들의 면면이 상상이 되는지 모두 어색하게 웃었다.
론을 비롯한 호위기사단인 그들이야 어느 정도는 익숙해 괜찮다고 해도 다른 녀석들은 그렇지 않을 테니 분명 체하는 녀석들도 나올 것이다.
“허~ 오랜만에 나오네. 단순무대포로 밀고나가기.”
심드렁하게 뱉는 론의 감탄에 바로 옆에 있는 로이에나 하일들은 살짝 갸우뚱 했지만, 론과 바이안은 세이나의 질질 끄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에 그 자리에서 한 번에 결정을 내릴 것을 예감했다.
“히데아. 주방에 내려가서 내 몫의 식사도 그 쪽으로 챙겨달라고 전해줘.”
“네. 다녀오겠습니다.”
히데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나고 얼마지 않아 식사 시간은 금방 찾아왔다.
기사들이 모이는 큰 식당의 여기저기에 이미 모두 모여 식판에 각자의 음식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오늘 무슨 날이냐?”
“그러게 오늘따라 진수성찬인데?”
“크으~ 이 두툼하고 튼실한 고기 좀 봐라. 고급진 놈이 나왔다.”
부디 나를 맛있게 먹어달라는 듯 반짝이며 푸짐한 음식들이 영롱하게 빛을 내니, 한명의 기사는 식기 전에 자신의 배에 기름칠을 해 주기 위해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입에 가져갈 준비를 했지만, 몇몇의 선배들이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부동자세를 풀지 않자, 무언가 쎄 함이 전염이 되어서 한명씩 눈치를 보며 차마 입에 대지를 못했다.
“저... 선배님?”
경직되어있는 선배를 그 옆의 기사가 조심히 불러보자, 선배기사는 자세를 풀지 않은 상태로 눈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자연히 시선이 따라간 곳에 따로 준비가 되어 있는 상석이 있었고, 자신들과 비슷한 음식이 세팅되어 그 자리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자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의문을 가득 담기 시작했을 때쯤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오는 일행들에 잠시 멈칫했다가 화들짝 놀라며 단체로 자리에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로 그 주인을 맞이했다.
“다들 앉아.”
당당하게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꺼낸 세이나의 목소리에 맞춰 착석한 기사들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눈만 떼룩떼룩 굴려댔다.
예상을 했지만 역시나 눈치를 보며 자세를 풀지 못하는 기사들의 면면을 훑다가 윗사람이 먼저라고 한 술 떠 입에 가져간 뒤에도 다들 차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고 있어서 속으로 조금 미안해했지만 환하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챙겼다.
“다들 안 먹어? 음식 식어.”
세이나의 말과 함께 주변 호위기사들이 고기를 한점 입에 가져가는 것으로 모두 입에 넣지만, 이 음식이 입에 들어간 것이 맞는지 맛이 어딘가로 달아나버려서 잘 느껴지지 못했고, 평소에 떠들면서 먹었던 즐거운 저녁식사시간에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 찼다.
“음.. 모르는 것은 아닌데.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아니, 전혀.”
“너한테는 당연히 그렇겠지.”
세이나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대답해주는 바이안의 말을 옆에 있는 켄이 강조하며 접시에 코 박고 억지로 입에 넣고 있는 동료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톡 토도독 식탁을 두드리는 세이나의 작은 손가락의 리듬에 다시 한 번 움칫, 몸을 굳히는 기사들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주인의 시선이 날카롭게 자신들을 훑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찌어찌 식사가 끝나가는 무렵, 시종과 시녀들이 우르르 나와 다른 음식들을 세팅하기 시작했고, 시원하게 식혀진 술들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적엔 모름지기 편하고 즐겁게 즐겨야 하는 법인데, 다들 너무 굳어 있는 거 아니야?”
모두에게 나무라듯 꺼낸 세이나의 핀잔에도 쉬이 편히 있지를 못하는 그들에게 세이나는 이죽이더니 술잔을 들어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 맛좋다. 나는 투명인간이다 생각하고 즐겨. 뭐해들?”
즐기고 싶지 않은 이들이 누가 있을까, 단지 쉬이 손이 가지 못한 채 침만 꿀떡 넘길 뿐이다.
세이나는 속으로 나는 투명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짱 쎄다. 내가 크앙하고 소리치자 다들 쓰러졌다. 라는 부가적인 설명을 넣어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는 얼어서 풀어지지 못하니 조금 멋쩍어졌다.
각 테이블마다 하나의 사단끼리 모여앉아 있는 이들의 대장들에게 은근히 눈치를 주니, 힘겹게 잔을 들고 바싹 마른입을 간신히 축였고, 그런 후에야 마시기 시작하는 것을 본 뒤 자리에 일어나 한 테이블씩 껴 앉아 친한 친구처럼 떠들고 놀기 시작했다.
처음에가 어렵지, 역시 술의 힘도 섞여 들어가니 조금씩이지만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주군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장난 아니네. 저렇게 쉽게 녹아드는 것도 능력인데.”
기사가 된지 얼마 안 된 로이에의 감탄에 적당히 긍정해주며 메드가 한껏 거들었다.
“카리스마와는 또 다른 매력 아니겠냐. 크크 우리 주군만한 분은 아마 없을 거다.”
와하하 떠드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바쁘게 빈 술잔을 나르고 채우는 시종들과 시녀들의 분주함에 바이안만 홀로 안절부절 걱정이 태산처럼 불어난다.
“너무 빨리 마시는 거 아닌가? 취할 텐데.”
“저 모습의 어딜 봐서 취하는 사람으로 보이냐?”
턱을 괴고 홀짝이며 그를 말리는 론의 말에도 바이안은 세이나의 손에 들려진 잔을 뺏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거듭했고, 모두는 론에게 동의했다.
그것도 그런 것이 눈을 반짝이며 은근슬쩍 교묘하게 그들의 속내나 생각하고 있는 바들을 끄집어내며 웃는데 어디를 어떻게 봐도 세이나의 손바닥에서 심장을 꺼내는 동료들의 모습일진데 걱정 따위는 들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쏜다. 마셔!”
“오오오~”
의자에 올라서서 잔을 치켜든 세이나의 시원한 외침에 모두 화답하듯 잔을 들어 올려 우렁차게 소리쳤다.
목구멍에 들이 붓고 술이 비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잔을 뒤집어 머리에 탈탈 털자, 또 그것을 단체로 따라하는 모습에 절로 실소가 터진다.
“응?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저희들이 오래 했다고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제 자신은 제가 제일 안다지 않습니까.”
“그렇죠. 저희 보다는 젊고 두각을 나타내는 놈이 이끌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생각들이 다들 비슷하네.”
각 사단의 대장들과 오래 기사생활을 한 이들에게서 나오는 말에 의미심장에게 웃었다.
서로가 몰랐을 뿐이지 이미 한명을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듯 이구동성이다.
“처음 저희들이 판단이 막혀 눈이 어두웠을 때에 다름을 알고 과감하게 움직여 제 팀을 이끌고 주군을 지켰을 때부터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어떤 의미로는 그 녀석을 이겨 본적이 한 번도 없겠다, 딱 입니다.”
5사단 대장의 대답에 눈이 촉촉이 젖어 들어가는 것이 전염이 되어 주변에 자신들의 안쓰러움을 뿜어댔다.
대장들의 모두가 대 괴도라 적힌 카드와 제 보물들을 교환 당했던 전적들이 있기에 눈물을 술로 삼켰다.
“크으~ 아직도 내 누이가 챙겨준 집 반찬을 눈 뜨고 뺏긴 것만 생각하면.. 크흑”
3사단 대장의 눈물 젖은 소리가 통곡으로 들리는 착각이 일어났고, 주변 이들에게는 남 일이 아닌지라 모두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매우 안타깝게 들리는 그의 말에 새삼 궁금증이 일었지만 깊게는 들어가지 말자며 세이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주었고, 분위기는 다시 무르익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