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을 내리겠다.”
세이나와 바이안을 한번 바라본 뒤에 황제는 근엄하고 단호하게 카이덴을 향해서 이번 사건의 판결을 내렸다.
“황태자 엘라이어 진 카이덴의 모든 작위와 권위를 박탈하고 마력을 봉한 뒤, 대륙으로의 영구한 추방을 명한다.”
“충.”
기사들은 황제의 명에 복명하며 카이덴을 데리고 황궁 감옥으로 끌고 갔고, 카이덴은 조금 전 발작하던 것과는 다르게 얌전히 끌려갔다.
“폐하.”
세이나는 그가 걱정이 되어 조심히 불렀고, 황제는 근엄했던 표정을 풀고 제 자식에 상처 받아 아픈 아버지의 얼굴로 힘겹게 입을 달싹였다.
“남은 이야기는 내일 하자꾸나. 나는 황후가 걱정이 되어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구나.”
“네. 내일 제가 찾아뵐게요.”
비척이며 돌아가는 황제의 옆으로 그의 친우이자 단장인 노엘경이 조심히 그를 부축해 홀을 떠났고, 세이나도 모두를 데리고 현궁으로 복귀했다.
현궁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세이나는 창틀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며 홀로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시작해야지.”
홀에 있었던 일의 소식은 하루가 되지도 않고 일파만파 퍼져가더니 황태자 폐위와 함께 모두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 후의 일로 다음 날 보기로 한 일도 황후의 심적과 건강 문제로 미뤄졌고, 일주일 후로 연기되었다.
장정 다섯이 누워도 자리가 남아도는 커다란 침대를 중심으로 세이나를 시작해서 할아버지들과 기사들이 둘러싸고, 그 가운데에 있는 의원이 조심히 세이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상적인 생활은 더는 어려우실 듯합니다.”
자신의 실력 부족을 탓하며 죄송스러워 하는 의원의 대답에 기사들의 침통한 표정이 펴질 줄 몰랐다.
“그러네. 그대가 말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덤덤히 꺼내는 세이나의 시선에는 눈을 말똥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둘러보며 엄지를 입에 가져가 쪽쪽 빨고 있는 알바트론단장이 침대에 걸터 앉아있었다.
“치매 같은 거라고 보면 쉽나?”
“예.”
“몇 살 정도로 추정돼?”
“작게는 세 살에서 많게는 다섯 살 정도로 보심이 좋으실 듯싶습니다. 게다가 말은 잊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아이가 빙의라도 했는지, 모두가 심각해하는 가운데 알바트론단장만은 순진무구했다.
“그 셈이라는 시종을 찾아보니 완전히 폐인 그 자체였으니까, 오히려 단장이라서 이정도로 끝난 것일지도 모르겠어. 보통 정신력이 아니었을 테니까. 하일경.”
“예. 주군.”
“가족들에게 연락은 했어?”
단장의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는지 묻자 하일은 더 안타까워하며 무겁게 대답했다.
“단장님께는 가족이 없으십니다. 어리셨을 때 모두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후우...”
그를 돌보고 케어해 줄 가족이 한명도 없다는 말에 들이마신 공기가 무거운지 길게 뱉는 숨이 탁하다.
“아이고 다친 다리로 그리 동동 대면 다리 아파요. 에비~ 손가락지지.”
“끌끌끌 까까 주까?”
외할아버지가 알바트론의 손을 잡아 빼자 할아범은 제 바지춤에서 주섬주섬 뒤지더니 언제 챙겨 놓았었는지 과자 하나를 꺼내어 알바트론의 손에 쥐어 주었다.
“헤~”
“오야~ 까까.”
“까까 묵자.”
과자를 선물 받아 기분이 좋은지 꺄륵 웃으며 이가 있음에도 깨물어 먹지 않고 쪽쪽 단물만 빼 먹듯 빨아 먹는 모습을 두 노인은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남작이 세이나를 돌아봤다.
“아가. 이 아이에게 아무런 연고도 없다면 우리한테 맡겨주려무나.”
“끌끌끌 느즈막하게 아들 하나 생겼다 하믄 되지. 노친네들이 여기서 할 일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냐. 아이 재롱 보면서 시간 보내기 딱 좋겠구먼.”
단순한 동정이 아닌, 두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알바트론이 귀엽다며 돌보기를 자처해 세이나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고, 그렇게 알바트론단장의 거취가 정해졌다.
“세나야.”
모두를 대표해서 자신을 부른 바이안에게 희미한 미소로 허락하자, 기사들은 자세를 바로하고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착검!”
무겁지만 강한 바이안의 구령에 맞춰 검을 뽑아 들고 동시에 검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
“정검!”
칼끝을 하늘로 두고 검을 세워 심장 쪽으로 손을 가져가 상체의 반을 나누듯 바로 세웠다.
“폐검!”
허리에 있는 검 집에 착하고 들어가는 검의 마찰 소리가 흐트러짐 없이 동시에 들리니 웅장하다.
길게 숨을 들이마셔 바이안이 더 크고 우렁차게 외쳤다.
“그동안!”
한 단어가 힘주어 나오자마자 뒤에 도열해 있는 모든 기사들의 입에서 같은 소리를 단체로 토해냈다.
““감사했습니다!””
힘이 들고 마음이 아플 때, 함께 술을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인생의 선배처럼, 부모가 없는 이들에게 질책을 해주면서 등을 밀어주며 아버지의 대신이 되어주었으며, 때론 넘을 수 없는 산이 되어 그들의 목표로 삼아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변함없는 굳건함을 보여주던 인물.
이제는 그 모습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알바트론 리암을 떠나보내는 기사들은 저마다의 추억과 기억들과 함께 흐르는 눈물을 고스란히 두기도 했고, 이를 악 물면서도 감사함을 담아 그의 은퇴를 받아들였다.
허리를 구십도로 꺾으며 숙이는 기사들을 향해서 알바트론은 짝짝 박수치면서 천진난만하게 좋아했다.
기분 탓일 지도 모르겠지만 세이나의 눈에 비치는 알바트론이 마치 자신의 수하들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는 느낌이었다.
조명이 없어 어두운 홀 안, 우루루는 제 주인에게 보고를 올렸다.
“내 생각보다 그 아이가 상당히 영민하구나.”
“저와 한 번도 대면하지 않았음에도 제 능력까지 간파하더군요. 그때는 저도 주인님 외에 처음으로 소름이 돋았습니다.”
“역시 그때 죽었어야 했어. 앞으로의 일에 변하는 것은 없겠지만, 상당히 불편해질 수 있겠지.”
마을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공포에 절어 벌벌 떨던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하게 비소를 머금는 그의 미소에는 짜증이 섞여있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더냐.”
“당장이라도 제거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머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에게 오는 살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냉정히 지휘하고 상황을 판단, 앞의 수를 몇 개나 읽고 있는 듯한 그녀는 앞으로 있을 저희들의 일에 분명 큰 변수가 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차분하면서도 냉정하게 느낀 그대로를 설명을 하고 있자, 함께 있는 간부들의 코웃음 소리가 우루루의 귀에 닿았다.
“어~이 할망구. 너무 쫄은 거 아니냐?”
“맞는 말이다.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녀석들에게 이제 와서 크게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어머나~ 우루루님이 이리 겁쟁이실 줄은 몰랐네요.”
주인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우루루를 때는 이때다 하는 것처럼 깎아 내리는 그들의 시비에도 우루루는 꿈쩍도 하지 않고 제 할 말만하고 주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때 우루루의 옆에 함께 서있는 조금 마른 체구의 사내가 그녀의 편을 들었다.
“그럼 이번 임무에 네들이 가지 그랬나? 나 역시 우루루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게다가 그 여인을 지키는 기사들 역시 경계해야한다.”
사내는 홀에서 자신과 마주했었던 하일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명령이 우선이라 크게 나서지는 않았지만 제 눈앞에 버젓이 있는 데도 기척이 사라지면서 그를 놓쳤다.
분명 눈에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그런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고, 처음으로 등을 내 주는 꼴이 되어 속으론 얼마나 놀랐었는지,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검이 닿았던 제 어깨가 괜스레 시큰했다.
흉흉히 살기를 뿜으며 간부들에게 더는 시비를 걸지 말라는 사내의 으름장에 모두 입맛을 다시면서 놀리는 것을 멈췄다.
여기서 자신들끼리 더 다투다가는 상당히 불쾌해 보이는 제 주인의 분노를 받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죽지 않으려면 이정도 에서 멈춰야 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떠드는 것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그들의 주인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수확도 있었으니 나쁘지는 않구나.”
이번 보고에 수확이라고 할 것이 있는지 아리송하지만 그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뒤에 나오는 그의 말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아이의 이름이 바이안이라고 했던가? 심심해서 마지막으로 장난을 친다고 했던 것이 그런 결과를 낳았을 줄이야, 큭큭큭”
“어찌 할까요?”
우루루의 질문에 그는 대충 손을 휘저었다.
“아~ 알아서 헤엄치라고 놓아둬. 그래봤자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나는 오히려 그 바이안이라는 아이를 개인적으로 한번 만나보고 싶구나.”
“......”
“우루루 네가 생각하기에도 재미있지 않느냐? 정말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로구나. 어찌 이리 비슷할 수 있을까. 크크큭”
간부들은 주인이 무엇을 말 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루루만이 유일하게 그의 말 속에 숨어있는 내용을 알아듣고는 그가 배를 잡고 고개를 숙이며 공허함이 녹아든 장난기 가득한 웃음소리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겠어. 예상은 했지만 설마 현자의 돌을 제 몸에 새기다니 그러고 보면 그것도 비슷하구나. 어리석긴.”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수하들을 나가게 하자 우루루가 아차 하며 그를 불렀다.
“주인님 그러고 보니 대현자가 주인님께 하나 전해 달라 한 것이 있었습니다.”
“응?”
생각도 못한 말에 호기심가득 지켜보니 우루루는 어찌 했더라? 기억을 곰곰이 떠올리면서 주먹을 쥔 오른손을 일자로 세워 손등이 주인에게 보이게 한 뒤 왼손으로 그 팔꿈치를 받쳤다.
그 후에 오른손을 앞으로 살짝 숙이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빳빳하게 세워보였다.
“음?”
“선물이라며 한 동작인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리 전하기만 하라고 하더군요.”
“흐음... 무슨 뜻이지?”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잠시 고민을 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뜻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바로 넘어갔다.
세이나가 전한 것의 진짜 뜻은 감자 머겅. 엿도 머겅. 이지만 아마 그 뜻은 세이나 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모두가 나간 홀에 우루루만이 나가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그는 자신의 명을 거부했다 뭐라 하는 것이 아닌 우루루는 남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신경 쓰지 않았고, 홀에 연결되어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녀를 불렀다.
“오늘은 오랜만에 잠들고 싶구나.”
말이 나옴과 동시에 그가 있는 방으로 따라 들어간 우루루는 침대에 올라가 머리맡 벽에 가만히 등을 기댔고 그는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인님. 꿈이 없는 단잠을..”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