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 레인트입니다.”
“들어와.”
집무실 밖에서 세이나의 음성을 확인한 레인트는 안으로 들어와 세이나에게 인사했다.
“아직 교대 시간도 아닌데 일찍 왔네?”
“예.”
보고 있던 책을 덮은 세이나는 레인트를 올려다봤다.
“어때?”
“주기는 정해진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방금 오는 중간에도 한번 있어서 먼저 도착했습니다.”
레인트의 보고 내용은 바이안의 후유증에 관한 것이다.
바이안이라면 분명히 숨기고 모른 척 할 것을 예상하고 있던 세이나는 처음부터 레인트에게 따로 경과를 보고하라고 명령해 두었다.
“그런 것 같네. 한 달에 한번이라고 생각이 들자마자 일주일도 안 되서 오기도 하고, 오늘이면 이주만인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오는 건지, 피곤하면 오는 건지...”
“오늘 쉬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일이 의견을 제시했지만 고개를 젓는 것으로 아님을 밝혔다.
“말을 들을 인간이 아니야. 자신이 짐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리고 내가 쉬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퍽이나 말도 잘 듣겠다. 그냥 존중해 주려고. 모른 척 하고 한동안은 지켜보기만 해야지.”
서로 할 이야기가 끝나자 세이나는 덮었던 책을 다시 피고 읽는 척을 하면서 바이안에 대해서 고민했다.
‘증상은 공황장애랑 비슷할지도. 재활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려나.. 진짜 그냥 좀 쉬지. 어렸을 때부터 그 고집 알아줘야 한다니까.’
저녁이 되고 해가 지기 시작할 때까지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던 세이나는 집무실에 바이안과 론, 하일만이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서야 책을 덮고 그들이 앉아 있는 소파에 자신도 마주 앉았다.
정기적으로 한 번씩 넷만 모여서 모종의 회의를 하기 위한 의례였다.
“특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물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진짜로 있기는 있는 것인지, 이제는 반대로 의심이 드네요.”
하일을 선두로 회의의 주제를 꺼냈다.
“확실히 숨어 있어. 폐하께서도 따로 조사하시고 계실 텐데, 아무런 말씀 없으시지?”
바이안에게 시선을 두자 고개를 젓는다.
“하긴. 한 번도 들키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조사한다고 나오겠어? 방식을 바꿔야하나...”
이런 날에는 늘 저녁을 집무실에서 간단히 하기 때문에 마침 히데아가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식사를 모두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묘안이라도 있어요?”
론이 히데아에게서 자신의 몫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딱히 묘안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이렇게 머리 싸매지 않아도, 슬슬 움직일걸? 알아서 대가리 들이 밀겠지.”
“그런데 무슨 방식을 바꿔?”
입안에 샌드위치를 우겨 넣으며 묻는 론의 질문에 세이나는 피식 웃었다.
“그거 맛있지? 히데아가 요리 하나는 잘한다니까.”
“더 있어?”
맛있다는 대답 대신에 접시를 순식간에 비우고 빈 접시를 히데아에게 건네 묻고, 히데아는 빙긋 웃으며 론의 접시에 더 덜어 주자, 다시 우겨 넣는다.
“넌 먹으러 온 거냐. 회의하러 온 거냐?”
“둘 다.”
추가로 가져온 양까지 다 해치울 기세다.
“생각하는 방법을 달리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야.”
그리고는 세이나가 생각을 정리할 때나, 진지하게 무언가를 궁리할 때 나오는 손가락 톡톡을 시전 했다.
“엉뚱한 발상일 수도 있는데, 적이 궁에 숨어 있으면서도 숨어 있지는 않다. 라는 건?”
입 주변에 빵가루와 소스를 잔뜩 묻힌, 론이 어이없게 세이나를 봤다.
“지금 수수께끼 하자는 거야?”
“...입 주변 좀 닦고 말해라.”
평소의 론은 음식에 크게 욕심도 없고, 저렇게 묻히고 먹지도 않는데, 유독 회의하는 날만 되면 아이 같이 누군가에게 뺏길세라 묻은 것도 모를 정도로 먹어댄다.
“더 줘.”
신경도 쓰지 않고 어느새 또 비운 접시를 히데아에게 미는 것으로 대신했다.
“네가 그러니까. 회의 할 때마다 히데아가 만들어서 가져오는 양이 점점 늘잖아.”
음식 준비를 하는 시녀들이 따로 있지만, 이런 회의하는 날에만은 히데아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가져와 주었다.
그래서 히데아 고생시키지 말라는 은연중의 말을 했지만, 역시나 론은 들어먹지를 않았다.
론에게 신경을 접으라는 듯 바이안이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라도 있어?”
“응.”
하일은 작게 인상을 쓰며 물었다.
“단서라도 찾으셨습니까?”
“단서는 아닌데?”
“범인 같은 놈이라도 발견 한 거야? 요?”
아직도 세이나에게 반말과 존댓말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론의 질문에 이제는 익숙해져서 위화감도 없는 세이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단답으로 대답하자 태연한 세이나와는 다르게 셋은 세이나에게 바짝 상체를 기울였다.
“누구야?”
“누군데요?”
“누굽니까?”
“저..저기? 여러분? 얼굴... 얼굴들이 너무 가까... 운데..”
셋의 콧김이나 입김이 얼굴을 적실 듯 가까워서 너무 부담스런 세이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가여운 두 팔로 셋을 밀었다.
셋 다 흥분한 것이 틀림이 없는 행동에 그들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자 아차 한, 셋은 간신히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천하의 하일도 찾지 못한 범인이 누군데요?”
하일의 가문의 능력이 기척을 완벽히 숨기는 능력이기 때문에 은밀에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만 그의 가문의 능력은 떳떳하지 못한 능력, 당당하지 못하는 능력이라며 기사로서도 하나의 귀족가문으로서도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좋지 못한 인식이 강했다.
때문에 그는 그 인식을 깨기 위해, 기사가 되기 위해서 과할 정도로 노력을 해가며 지금 이 자리에 올라 올 수 있었고, 아직도 그 인식에 대한 것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 곳 기사단에서만은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지금은 세이나의 신임을 받는 호위기사단의 대장이기 때문에서라도 전체적으로 빠르게 인정을 받아가는 추세다.
그런 하일이기에 그가 단서를 잡지 못한다는 것은 적이 너무 완벽히 숨어 있다는 결론이 나는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라고 말 할 정도는 아니야. 그러니까. 적이면서 적이 아니다?”
“...진짜로 수수께끼 하자는 거지?”
다섯 접시 째의 음식을 해치운 론은 부른 배를 만지면서도 세이나를 흘겨봤다.
“내가 장난칠 상황이겠어? 아직은 확정한 것이 아니라서 말을 안 할 뿐이었지.”
“그래도 누군지는 말씀 해 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세이나를 지키는 입장으로서 하일의 말이 일리는 있지만 세이나는 말을 떼기가 조심스럽다.
“못해 줄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다들 몰랐으면 하는데.. 알아서 들이밀 거라니까?”
“그럴 수는 없어.”
바이안 마저도 세이나가 대답해주길 바랬다.
“하아... 정확한 것이 없어서 나도 모른다고. 그런데 굳이 내가 누구라고 말을 하게 되면 셋 다 충격이 클 거야. 나중에 알면 안 될까?”
하지만 셋은 무조건 오늘 들어야겠다는 심산이이라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적이 아닌데.... 적은 맞지만...”
“우리가 무식해서 모르겠거든? 그런 수수께끼 말고 말해요. 좀.”
이제는 론이 발광하기 직전이라 답답함을 호소하기 시작하니, 괜히 말을 꺼낸 듯싶었다.
들을 때까지 버틸 것이 자명한 셋에게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밝혔고, 역시 예상 한 대로 세 명은 충격을 받고 한참동안 말을 잃었다.
“휴우....”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침묵의 중간에 세이나의 한숨만이 방안을 메웠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세이나의 침실이 있는 방안은 그날따라 부산했다.
대륙의 지상인들이 입을 법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세이나와 바이안을 중심으로 론과 히데아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이나님. 배고프실 때 꼭 드세요.”
“응 고마워.”
히데아는 정성들여 싼 도시락을 세이나의 품에 안겨줬다.
“바이안. 너 혼자 괜찮겠냐?”
“물론. 궁은 알아서 잘해 줄 거라 믿는다.”
“내가 뭐 할 일이 있겠냐? 둘이 대륙에 내려갔다가 오는 것만 아무도 모르게 하면 되는 건데,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잖아.”
잠깐의 시간만 숨기면 되는 일을 너무 진지하게 부탁하니 머쓱하다.
“금방 다녀올게 론. 더 늦기 전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이제 가네.”
“바빴잖아.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고 싶어도 못가죠. 그 전에 다녀와야지. 걱정 말고, 내가 있는 척은 대신 잘 해줄 테니까.”
듬직하게 하는 말인데, 어째 론의 표정에는 다른 의도가 보이는 것은 착각이라고 둘은 애써 무시했다.
시간이 아까운 바이안은 황족만이 쓰는 통행구를 꺼내들고 다른 손으로 세이나의 허리를 감싸 품에 안았다.
이동하기 쉽게 하기 위한 행동이지만 그의 손길은 소중한 것이 다칠까 조심스러웠다.
더 할 말은 없는지 바이안은 바로 통행구에 마력을 사용해서 활성화 시키고, 그 자리에서 빛과 함께 사라졌다.
작은 숲 입구, 하얀 빛 무리가 생겼다가 사라진 장소에 바이안과 세이나가 나타났다.
세이나는 바이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몸무게를 완전히 그에게 실어 기댔다.
“흐아아아~~”
“괜찮아?”
걱정스럽게 묻는 바이안에게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도리질로 대신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괜찮아 졌는지, 그제 서야 의문을 제기했다.
“다들. 어떻게 이동하는 거야? 난 이동할 때마다 멀미 때문에 완전히 뻗겠는데.”
아직 멀미가 다 가시지 않았는지, 움직이기도 전에 벌써 지친 듯 보이는 세이나의 기색에 바이안은 세이나의 종아리와 허벅지에 한 손을 끼우고, 등을 받혀 세이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으햑!”
갑자기 들려진 세이나는 도시락을 끌어안고 바이안을 올려다봤다.
“바람 좀 쐬면 금방 좋아 질 거야.”
바람을 쐬는데 왜 안아 드는 건가요? 라고 물어보려다가 그 뜻을 금방 알고 가만히 몸을 맡겼다.
마력을 다리에 집중한 바이안은 다짜고짜 내달리더니, 이제는 위로 점프해서 하늘을 날았다.
공중에서 발을 한 번 구를 때마다 앞으로 쭉쭉 이동하며 몸에 부딪히는 바람이 상쾌하게 전신을 스치고, 눈에 담기는 풍경에 빠져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시원하다.”
“봄이니까.”
“그러네.”
이름 없는 작은 숲이라서인지, 푸르게 우거진 숲은 시야에서 금방 멀어진다.
그리고 멀리서 보였던 황폐한 사막이 이제는 가까워져서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