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완연한 봄이 찾아와 따뜻한 햇살이 궁 전체를 품었다.
움츠려 들었던 어깨를 피듯 현궁의 사람들은 봄을 맞이해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때, 그 궁의 주인은 침대에 누워서 한가함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으아아~~ 원래 이 자리가 이렇게 한가한 거냐아아~~”
두 팔과 두 다리를 위 아래로 쫙 피고 커다란 침대 위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뒹구르르 굴러댔다.
“세이나님이 업무 능력이 빠르다는 생각은 안 해요?”
황당해 하며 묻는 론의 말에 그런가 싶었다.
돌은년이 저질러서 많아진 뒤처리에 바빴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의 세이나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할일이 없어서 기뻐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보네.”
“그러게... 일하는 것이 당연해져서인가? 나도 이런 내가 신기해.”
움직임을 멈추고 손으로 이마의 돌을 만지작댔다.
“대현자가 되고 보니, 할 일이 없도다.”
“현자의 돌을 컨트롤 하고 제어하는 일을 하는데 그게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하고요?”
일리 있는 말에도 별 대답은 하지 않고 하얀 천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일도 할 필요가 없어.”
작은 목소리로 나직일 뿐이었고, 세이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론은 듣지 못했다.
히데아의 우쭈쭈 케어를 받기도 한참이 지났을 때, 이제야 떠올랐는지, 근처에 서있는 기사를 불렀다.
“다임경.”
“예. 주군.”
“할아범은?”
“황궁에 가셨습니다.”
할아범이 황궁에 있다는 당연스러운 대답에 세이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놈의 할아범은 아주 황궁에 가 살고 있는 것 같네. 손녀딸은 볼 생각 일도 없다니?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황궁에 드나드는 거야?”
천공의 땅으로 이사를 온 뒤로 할아범은 자신이 붙여준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다니며 거의 매일같이 황궁에 드나들고 있었다.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지만, 몇 달간 지속이 되다 보니 이제는 뭐하는지 궁금해졌다.
“바로 황궁으로 간다.”
세이나의 말과 함께 황궁에 알리겠다는 기사를 말리고 그냥 쳐들어갈 것이라고 하고 채비를 마치자마자 황궁으로 이동했다.
한편, 귀한 손님만 모시는 황궁의 제1응접실에 황제부부와 할아범이 마주 앉아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끌끌끌 고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원체 독특했어야지, 어떻게 크려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겁니다. 그려~”
“허허허 그렇습니까?”
할아범은 아주 즐겁게 자신의 손녀딸인 세이나의 뒷 담화를 줄줄 나열했다.
“호호호 하긴 저도 처음에 세이나를 봤을 때 깜짝 놀라는 일이 많았죠. 독뱀도 아무렇지 않게 잡고 놀기도 하고, 개미굴을 부수 길래 물어보니 게으르지 말고 일하라고 일을 늘려주고 있다지 뭐예요.”
“끌끌끌~”
“게다가 밥 준다며 귀한 꿀을 개미들에게 통째로 부어버려서, 꿀에 파묻혀 버둥거리는 개미들 보고 수영 못한다고 울기도 했죠.”
오늘 쉬는 날이라 할아범에게 끌려온 바이안이 황후의 추억담에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주억였다.
그 꿀은 자신이 황궁에서 가지고 와서 세이나에게 선물로 준 것이고,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봤기 때문에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어이쿠. 어르신 잔이 비었습니다.”
“어이쿠. 이런~”
죽이 척척 맞는 황제와 할아범은 오랜 친구사이 같았고 테이블에는 술이 담겨있었을 빈병들이 애처롭게 굴러다녔다.
어느 정도 물이 올라, 자신들이 모인 이유인 본론을 막 꺼내려 들었을 때, 문 건너편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폐하. 대현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손님의 정체를 알자마자 그 곳에 앉아있던 모두는 동시에 흠칫했다.
“허흠흠. 모시거라.”
문이 열리고 들어온 세이나는 황제부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눈에 쌍심지를 켰다.
“할아버어엄~!”
꿍꿍이가 있던 할아범은 괜히 뜨끔해서 눈을 떼구르르 굴렸고, 세이나는 그런 할아범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기가 집이야? 앙? 게다가 이 많은 술들은 뭐야? 뭐 주신의 교주라도 되? 아주 술을 여기저기 설파하고 다녀.”
황제와 황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세이나는 다다다 잔소리를 퍼부었다.
현제 응접실 안에는 자신들 외에는 없었기도 했고, 황제와 황후는 보는 이들이 없을 때라도 옛날처럼 지내자, 이야기를 해 놓은 상태라 그 모습이 무척 가족 같았다.
“호호 너무 그렇게 열 내지 마렴.”
“황후마...”
“황후우?”
세이나의 말을 자르며 황후는 자신이 보일 수 있는 무서움을 허리에 손을 얹어 표현하면서 말꼬리를 올렸다.
“엄마...”
세이나는 아직 호칭이 어색해 내뱉을 때마다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작아진다.
황후는 세이나를 만날 때마다 엄마라는 호칭을 들을 때까지 닦달했기 때문에 오늘도 매우 만족해하며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손바닥으로 비어있는 소파를 탕탕쳤다.
“온 김에 여쭤보고 싶은데요. 술 좋아하는 거... 집안 내력이에요?”
황후의 옆에 앉아서 작은 목소리로 묻자 황후는 시원하게 대답해줬다.
“그럼~ 당연하지.”
황후가 너무 당당하게 말하자 자신 빼고는 모두 뿌듯한 표정이다.
“끌끌끌 네늠도 좋아하면서 왜 난리냐?”
때는 이때다 싶어 사랑스러운 태클을 걸었다.
“할아범이랑 같아? 이런 백주대낮에 여기서 술판을 벌이니까 뭐라고 하지. 폐하께서 하시는 업무가 얼마나 많은데 방해야?”
자연스럽게 배틀을 시작하고 있을 때 구석에 쭈구리가 된 황제는 아무도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또....”
여전히 자신만은 편하게 불러주지 않는 세이나에게 몹시 서운해 괜히 들고 있는 잔을 혼자 비운다.
한참을 할아범과 티격태격하던 세이나의 화살은 울적해하는 황제에게 술을 따라주던 바이안에게 쏠렸다.
“반은 또 때는 이때다 하고 바로 술이야? 내가 쉬라고 할 때는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숨어서 스토커 짓만 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얌전히 쉰다 했다.”
떨어져 앉아 있는 바이안의 귀를 자신 쪽으로 잡아 당겼다.
힘없이 세이나에게 끌려가면서도 바이안은 상당히 매우 무척 억울했다.
“한 달 지났는데, 모처럼의 술이...”
바이안의 입장에서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한 달이 지나고도 세이나의 으름장에 술은 계속 입에 대지도 못하고 동료들이나 황제와 할아버님의 술 마시는 모습을 계속 부럽게 쳐다보기만 했어야 했었는데,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몇 달이 지나갔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할아버님의 초대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어쭈? 목숨 걸고 날 지켜주겠다고 하던 인간이 빨리 좋아질 생각은 안 해?”
“다 나았...”
더 말해보라고 으르릉 이를 세우니,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항복을 한 바이안의 모습에 주변 동료들은 아직도 적응을 하기 어렵다.
자신들과 있을 때는 여전한데 유독 세이나의 앞에서는 다양한 감정과 표정을 보이니 그 갭이 상당히 크게 다가왔고,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의 이미지와 도무지 매칭이 안 됐다.
“끌끌 저런 성격에 어찌 시집을 가노..”
“허허허 이미 임자가 있는데 뭐, 어떻습니까.”
흐뭇한 미소와 함께 둘은 서로 모종의 눈빛을 술과 같이 교환했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 밀실에 다수의 사람들이 거만하게 앉아 있는 한명의 사내를 중심으로 도열해 있다.
그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여인이 대표로 앞으로 나와 사내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로 다른 손으로 톡톡 팔걸이를 치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떻게 살아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그 꼬마가, 살아날 방도가 한 톨도 없는 그 상황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남았을까? 내가 몇 달을 생각해봐도 그 방법을 모르겠구나. 우루루 네 생각에는 어떻지?”
두껍고 쳐진 눈썹 때문인지 상당히 나른해 보이는 이미지에 하얗게 센 백발이 이질적이어서 대체적인 나이를 분간하기 힘든 외모를 가진 우루루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
“모릅니다.”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내는 다시 독백을 시작했다.
“살아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잘도 내 눈을 속이고 숨어 있었다니 상당히 불쾌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다고 해도, 그릇은 그릇이라는 건가... 흐음~”
“주인님. 어쩔까요.”
우루루는 사내의 독백을 과감히 잘랐다.
“위의 상황은 어떻지?”
“가드가 상당히 두터워, 여의치 않습니다.”
그럴 거라고 납득한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렇겠지.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우루루 거기에 있는 녀석들 움직이게 해. 성공하면 좋은 것이고, 실패하면 뭐, 아직 조금 부족하지만, 계획을 앞당기지.”
“예.”
우루루는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자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우루루가 사라지자마자 모두를 물린 뒤 혼자 남은 사내는 진득하고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역시 불쾌해. 상당히 걸리적거려. 아이야 그렇다고 해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궁의 연병장에서 오랜만에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한 바이안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마력도 거슬리지 않고 사용하게 되었고, 움직이는데 거리낌 없이 상태는 좋았다.
옷을 갈아입고, 호위를 교대할 동료들과 교대 시간이 되기 전까지 이야기를 하면서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다리가 휘청하고 몸이 무너질 뻔한 것을 서둘러 옆의 벽에 손을 짚고 버텼다.
“어이!”
“끄응... 괜찮아.”
멍해지는 머리를 짚고 인상을 쓰는 바이안을 부축하려던 동료들을 제지하고 벽에 등을 기댔다.
“얌마. 그럴 때는 쉬어라 좀.”
“잠깐만 이러고 있으면 괜찮아져.”
주기도 불규칙하게 한 번씩 찾아오는 후유증이라서 바이안 본인도 대비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럴 때마다 쉰다는 것은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 먼저 가있을 테니까, 좋아지면 그때 셋이 같이 와라.”
레인트는 세 명에게 그렇게 전하고 세이나가 있는 곳으로 먼저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