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범 아직 이른 시간인데 벌써 술? 너무 빠른 거 아냐?”
계단 턱에 앉아서 턱을 괸 채로 할아범을 나무라는 세이나의 등장에 신나서 바이안을 괴롭히던 기사들은 일제히 자리에 일어나려했지만 신경 끄고 놀아 라는 말에 5명만 서둘러 세이나의 주변에 경계근무를 하는 것만 빼고 정말 신경 끄고 웃고 떠들며 놀았다.
세이나가 편히 있으라는 말에 어정쩡하니 눈치만 보고 움직이지 않았을 때 몇 번 혼이 나고 나서 생긴 자연스러움이다.
“크으~ 아마 기사직에서 제일 편한 곳은 우리 뿐 일거다.”
“하아~ 기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오늘 다시 든다.”
“아니지. 주인을 잘 만난거지.”
“흐흐 단장님도 뭐라고 하지 못할걸?”
나갈 준비를 끝낸 세이나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새삼 기사들에게 당부했다.
“조금만 마셔. 저녁에 못 논다.”
““넵.””
참 말도 잘 듣는 아이들 같은 기사들을 뒤로 하고 늘 익숙하게 생활했던 대로 집을 나와 도시어귀를 돌아다니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언니~~”
7명 정도 되는 꼬꼬마들이 세이나를 발견하자마자 어른들의 틈에 끼어들었고, 세이나는 그중 제일 어린 꼬마숙녀를 안아들었다.
“미리아도 이제 꽤 무거워졌네.”
“아냐. 나 안 무거워.”
두 볼을 퉁퉁 부풀리며 부정하는 미리아라는 소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붙이고 부비부비를 시전했다.
“아이고 그랬쪄요? 언니가 하는 말은 많이 컸다고 한 말 이예요~”
“히히”
그제야 베시시 웃어보이던 미리아는 세이나의 이마를 빤히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쿡 하고 찔렀다.
“이거 아파?”
“응? 이거?”
미리아가 현자의 돌에 손가락을 가져가자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바르작거렸다.
아무리 어리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지라도 감히 그 누구도 현자의 돌을 함부로 만질 수 없거니와, 그녀 외에는 만질 수도 없는 보석이다.
하지만 기사들이 잔뜩 긴장한 것과는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세이나는 오히려 마음껏 만지게 해주었다.
“하나도 안 아파. 이건 언니의 몸의 일부나 다름이 없거든. 신기하지?”
“응 신기해. 예뻐.”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예쁘다 라면서 좋아라 하는 미리아를 흐뭇하게 보며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들을 안심시켜주었다.
“이미 내 몸과 하나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긴장 풀어.”
고개를 조아리는 기사와 가볍게 말을 하는 세이나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여태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눈치가 보여서 물어 보지도 못했는데, 세이나 진짜 정체가 뭐야?”
“그래. 이제 좀 알려줘라.”
그들의 호기심 어린 모습에 세이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다.
“으음~ 알고 봤더니, 좀 높은 사람?”
자신의 진짜 입장이나 지위를 설명해주기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기도 어렵고, 말이 길어지기도 해서 대충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그것만으로도 납득을 한 도시주민들은 적당히 끄덕였다.
이미 세이나가 평소처럼 대해달라는 말도 했고, 자신들이 알아봐야 얼마나 이해하겠냐는 생각도 있어서 그것으로 간단히 일단락되었다.
오후가 되고 시간이 지나감에 점점 사람들도 늘어갔고, 술과 음식들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그리고 너도나도 오늘의 주인공인 세이나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잔을 기울였다.
덕분에 세이나는 여기저기 불려 다녀서 세이나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주민들과 섞여 함께 술을 기울이고 있는 기사들도 보였다.
신분에 상관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기도 하면서, 그동안 천공의 땅에 궁금증이 많았던 주민들의 호기심도 채워주었다.
“아 글쎄 위에 산다고 다른 건 없다니까 그러네.”
“그렇지~ 귀족이라고 다 마력이나 능력이 있지도 않아. 그대들 같은 주민들도 많이 살고 있고.”
“그런다고 우리가 어찌 아오? 어디 그대들 같은 사람들을 보기가 쉬운 줄 알어?”
어느 한쪽에서는 이미 호형호제하는 사이처럼 친근했다.
이렇게까지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세이나와 주민들의 친근한 관계도 한몫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었다.
“마주치면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나? 얼마나 무서운데.”
“우하하 뭐, 당연할 수도 있겠네. 만약 다른 귀족들이 이 곳을 찾는다고 해도, 우리들의 주인이 원체 특별하셔서 이곳에서는 아무도 거드름 못 피울 걸세.”
“그건 좋구만~”
서로 각자 나름대로 즐기고 있을 때 다른 쪽에서도 다른 분위기로 즐기고 있었다.
역시 사람들이 모여서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음악과 춤이 어울려지게 된다.
특히나, 젊은 남녀들이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어울려 추기도 했고, 어르신들도 덩실덩실 음악에 몸을 맡겼다.
그 곳 근처에서 앉아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케리프와 그의 소매를 꼬집듯 살짝 잡고 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을 에바는 열심히 지켜봤다.
에바는 처음으로 틀이 없이 자유롭게 즐기는 지상인들의 문화와 분위기에 폭 빠져서 눈에 담았다.
자신도 함께 놀아보고 싶지만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고, 특히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커플들이 왠지 부러웠다.
그때 그런 그녀를 유심히 보고 있던 케리프가 조심히 에바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시면 어울리시겠습니까?”
“..네? 네 네...”
얼굴을 발갛게 물들여 못이기는 척 케리프의 손을 잡고 그 자유로운 세상에 섞여 들어갔다.
“후아~ 지친다.”
주민들과 같이 먹고 마시다 구석으로 피신해서 쉬고 있는 세이나는 부른 배를 어루만졌다.
“분위기가 저번 축제랑 다름이 없네.”
“노는 것이 다 그렇지.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세이나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은 바이안은 몇 달 전에 있었던 로트론의 축제를 떠올렸다.
그때, 세이나를 찾으려 부단히 돌아다녔었기 때문에 기억이 더 많이 났다.
“반 오빠.”
바이안을 쳐다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로 무언가를 건네주자 자연스럽게 받아든 바이안은 손위에 올려 진 물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쁜 오렌지 색감의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천 뭉치가 바느질로 주변을 밀봉했다.
그 뭉치를 손으로 만지작거리자 그 안에 고실거리는 촉감이 느껴진다.
“이런 건 본인이 직접 건네주는 거잖아. 스토커처럼 몰래 챙기지 말고, 그리고 그... 다신 잃어버리지 마.”
얼굴이 붉다 못해 새빨개진 세이나와 뭉치를 번갈아 보던 바이안은 그녀가 준 물건의 정체를 바로 알았다.
가족이나 연인의 무사안녕을 위해 부적으로 주는 풍습으로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천에 담아 밀봉한 주머니였다.
얼마 전에 감옥에서 잃어버려 속이 매우 쓰렸었던 바이안 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잃어버려서 잘 되었다싶다.
“응. 안 잃어버릴게”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잘 보지 않던 세이나는 눈동자만 굴려 슬쩍 바이안을 보니 환하게 웃으며 오렌지색 주머니를 보물 다루듯 만지작거리고 있는 바이안의 행복한 표정에 절로 발이 동동 댄다.
“그... 그리고 오빠만 챙기지 말고, 나도 만들어 줘.”
어렸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오빠하고 쉽게 불렀는데, 기억이 돌아온 뒤로는 그 단어를 입에 뱉기가 이리 어려울지는 몰랐다.
오빠라는 단어가 이렇게 부끄러운 것일 줄이야, 바이안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 세이나다.
“응.”
천공의 땅으로 돌아갈 날이 되자, 외곽의 작은 집 앞에서 할아범은 짐들을 이리저리 나르는 기사들을 지휘하느라 바빴다.
“끌끌끌 그것들은 조심히 옮겨주게나.”
챙겨 가야할 짐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유독 한 종류의 짐이 제일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할아범의 장기이자, 취미로 매년 꾸준히 만들어온 술들이 그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양도 무게도 상당히 나왔다.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나네.”
이삿짐들이 전부 밖으로 나오자, 정이 든 이 곳을 떠나는 것을 체감했다.
놓고 가는 것이 있는지 짐들을 다시 한 번 체크하던 세이나는 큰 상자 하나가 따로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응? 이거 우리 짐 아니지 않아?”
“끌끌끌. 손주사위거여.”
할아범의 시원한 대답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반, 론. 둘이 가져갈 짐이 있었어? 몸만 왔었잖아. 그동안의 생활에 옷가지나 짐이 조금은 늘 거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한다고 쳐도 상자가 상당히 큰데?”
무슨 내용물이 들어있나 호기심이 동한 세이나가 그 짐에 가까이 다가가자 바이안은 서둘러서 짐과 세이나의 사이에 껴들었다.
“반?”
찔리는 것이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앞을 막고 세이나의 시선을 피해버려서, 더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만든 바이안은 뭇 곤란했다.
만일, 세이나가 안의 내용물을 본다면, 몰수가 확실하기 때문에 이 순간 미움을 사더라도 사수해야했다.
역시나 눈이 가늘어지며 올려다보는 세이나의 시선이 무섭게 따끔거렸다.
바이안이 저러할 때는 고집이 상당해서 분명히 보여주지 않을 것이 뻔한 것을 너무 잘 아는 세이나는 구석에서 큭큭대는 론에게 자연스럽게 의심의 시선을 넘겼지만, 론은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하~ 알았어. 안 봐.”
그래도 상자를 소중히 지키며 방심하지 못하겠는지, 눈치를 보는 바이안을 도와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세분을 뵐 일이 거의 없겠군요.”
마중 나온 케리프의 아쉬운 음성에 세이나는 의미심장함을 넣어 대답했다.
“그건 또 아닐걸요?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은 볼 지도요.”
그렇게 대답을 해주면서 괜히 에바를 힐끔거렸다.
떠나기 싫은 표정을 감추지 못 하고 있던 에바는 세이나의 알고 있다는 시선에 고개를 팩 숙였다.
“조심히 올라가십시오. 황녀전하.”
부드러운 케리프의 목소리에 자신의 치마를 꼬옥 쥐면서 작게 끄덕였다.
작별인사가 끝이 나면서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빛 무리와 함께 떠났고, 이제는 빈집이 된 그 근처에는 케리프와 함께 배웅 나온 주민들만이 남아 아쉬운 헤어짐에 오랜 시간 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