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황궁의 한쪽 정원의 뜰에 작은 빛 무리와 함께 한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천공의 땅으로 발을 들인 세이나는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으아아~~~ 어지러. 힘드러어~”
뱅글뱅글 돌아가는 하늘을 보며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 세이나는 진정이 될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었다.
아직 마력을 사용하는 것에 한참 미숙해서인지 분배해야할 마력의 양의 조절도 실패했기도 했지만, 이동할 때 오는 어지러움도 처음이라 크게 멀미를 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도착한 곳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황궁의 한쪽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을 느꼈지만, 기분 탓이라 무시했다.
지금 그에게는 그 것보다도 자신의 아내인 황후의 안위가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황후.. 황후”
황후의 손을 꼬옥 잡고 그녀를 불렀지만 고열에 시달리며 누워있는 황후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럴수록 황제의 시름은 깊어져갔다.
그때 황제의 심복이자 황제직속 기사단 단장인 노엘경이 그에게 부복하며 그를 불렀다.
“폐하.”
“왔는가?”
황제는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황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예. 모든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그래.. 수고했다.”
노엘경은 황제와 황후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심히 그에게 물었다.
“폐하.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
황제는 그의 걱정이 무엇인지 아는지 눈앞의 황후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노기를 누르며 대답했다.
“상대는 이미 도를 넘어섰다. 이대로 둔다는 것이 오히려 균형에 금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나서야겠지.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노엘경은 자신을 보지 않아도 고개를 숙여 보이며 둘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고, 그의 기척이 사라지자 황제는 현재 듣지 못하고 누워있는 황후에게 말을 걸었다.
“결행은 의식의 날에 할 것이오. 아직 의식을 치루지 않은 때가 균형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날 그대의 아이.. 우리 아들을 다시 데려옵시다. 세간에서는 나를 어리석다 할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황후... 그대의 말처럼 나 역시 한 아이의 아비이자, 가장이오.”
그의 말이 들렸던 것일까. 어느새 의식을 차린 듯 황후는 잡고 있는 황제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런 황후의 표정과는 달리 황후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황후의 기척이 느껴지자 황제는 자리에 일어나 그런 황후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마치 안심하라는 듯이.
멀미의 후유증이 가신 세이나는 처음 보는 주변 풍경에 이리저리 둘러봤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현궁으로 가는 길을 찾는 세이나는 사람들의 말을 유추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황궁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혀를 차며 헤매게 생겼다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전혀 헤매지 않고 금방 황궁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내가 여기를 와봤었나? 흐음.. 그랬나 보네.”
별 것도 아니라는 듯 쉽게 납득을 마친 세이나는 이제는 문제인 현궁으로 어떻게 들어갈지를 고민해야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타이밍이 참 좋았다.
현궁의 입구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기에 몰래 가까이가 들어보니, 이번에 시종들을 대거 뽑았다고 한다.
그들이 이번에 현궁으로 들어갈 시종들이었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표정을 가다듬은 세이나는 그들이 궁 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궁 입구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누구냐?”
“죄..죄송합니다. 저.. 이번에 시종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그만..”
시종들이 들어간 직후에 달려 나와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짓자 입구의 경비병은 웃으며 통과시켜줬다.
경비가 허술하다고 생각이 드는 모습이지만, 이번에 여기저기에서 많은 시종들이 들어와서인지 쉽게 납득했던 것이다.
이제 들어가면 스륵 하고 숨어드는 것이 세이나의 작전이었지만 사람 좋은 경비병 덕분에 그 것은 물거품으로 사라져버렸다.
“저런~ 궁 안은 커서 혼자서는 쉽게 찾지 못 할 텐데 잠깐만 기다려 봐라. 어이~”
“켁.”
마침 지나가고 있는 시녀를 불러 아주 상큼하게 세이나를 인계했다.
“아이참~ 바빠 죽겠는데. 알겠어요. 너 따라 오렴.”
성격이 참 지랄 맞을 것 같은 시녀의 뒤를 따르며 괜히 경비병을 원망해 봤다.
“그러게 왜 일행들이랑 떨어지니? 알아서 안내해주는 애가 있었을 텐데. 지금 얼마나 바쁜지 모르지?”
귀찮은 것을 떠맡았다며 싫은 티를 팍팍내는 시녀의 뒤에서 세이나는 속으로 혀를 한번 찬 뒤에 아주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 전 오히려 너무 좋아요. 그 덕분에 이렇게 예쁘시고 친절하신 선배님을 뵐 수 있었잖아요.”
입술에 침을 잔뜩 바른 말에 시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예쁘다는 말과 선배님의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묻지도 않은 말들을 가는 동안에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좋댄다.’
물론 세이나의 속생각은 달랐지만 시녀가 알아서 무엇 할까.
“지금 여기가 너무 바빠서 시종장님이랑 시녀장님은 아마 한동안 만나기 어려울 거야. 당장에는 아직 적응도 하지 못할 테니까, 일단 잦은 심부름뿐이겠지만. 따라다니면서 배우고.”
“선배님 왜 이렇게 바쁜 거예요?”
아직 말단이었던 시녀는 그 선배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절로 어깨가 으쓱인다.
“드디어 대현자님의 의식의 날이 다가오니까 그 준비에 바쁘단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요? 그 중요한 일에 제가 들어왔다니 저 너무 감격했어요. 거기다 선배님도 바쁘실 텐데 저한테 너무 잘해주시고, 예쁜 외모만큼 너무 착하세요.”
“그러니? 에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한껏 어깨를 피며 기분이 업 된 시녀는 세이나의 질문에 더 많은 대답을 해주었다.
대현자는 어떤 사람인지의 질문부터 일부러 기사단의 기사님들 중에 인기가 많은 사람은 누구라는 식으로 가볍게 물으며 은근슬쩍 바이안과 론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유도했고, 시녀는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었지만, 바이안과 론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만은 입에 달 수 없다며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지 말라고 세이나에게 당부했다.
지내다 보면 어련히 알게 된다는 말만 할 뿐이다.
시녀들이 기거하는 곳에 도착해 그녀가 주는 시녀복장으로 갈아입은 뒤에 다시 따라나섰고, 마지막에 안내 된 곳은 주방의 어느 한켠이었다.
“얘, 히데아.”
“응?”
이름일 불린 히데아는 앞치마에 물기를 슥 닦으며 대답하자 곧 바로 세이나를 인수인계했다.
“오늘 들어온 아이인데, 네가 맡아.”
세이나가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처음 가지고 있었던 귀찮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지라 제일 만만한 히데아에게 쉽게 떠넘겼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금방 사라진 그녀 덕분에 히데아와 세이나만 덩그러니 남겨진 상황이었고, 히데아는 갑자기 떠 맡겨진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귀찮아하지도 않고 오히려 사람 좋은 미소로 세이나를 반겨주었다.
“오늘 들어온 거니?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정신이 없었지? 이리 와서 어서 앉아.”
히데아는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챙겨와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곳 옆에 놓고 세이나를 앉혔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서..선배라니. 그렇게 불릴 정도는 아니야. 어차피 직분도 같은데..”
선배라는 단어에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무척 순수해 보인다.
“좀 전에 들었겠지만, 난 히데아야. 넌 뭐라고 부르면 될까?”
“아! 그렇네요. 내 정신 좀 봐. 세이나라고 불러주세요. 선배님.”
“서..선배...”
또 쑥스러워하며 웃는 것이 귀엽다.
“앞으로 힘들어 질 테니까. 오늘은 옆에서 쉬면서 눈으로 익혀.”
멀리서 와 분명 피곤할 것이라 생각하며 히데아는 나름의 배려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한 가득 쌓인 감자의 껍질을 깎았다.
“저도 할래요.”
“응? 그치만..”
“같이하면 좋잖아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세이나를 더는 말리지 않고 히데아는 다시 감자에 집중했다.
“선배님은 궁에 들어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감자를 깎는 것은 계속 하면서 물어 볼 때, 히데아는 누군가가 옆에서 같이 일하며 말을 걸어주는 것이 오랜만이라 조금 기분이 좋았다.
“난 좀 됐어. 어렸을 때 들어왔거든.”
“절 데려와 주신 선배님은 얼마 안됐다던데, 그런데 왜 선배님이 이런 일을 하세요?”
“으음.. 내가 좋아서?”
그녀가 하고 있는 감자 깎기는 누가 봐도 신입들이 하는 일이었다.
혹시나 시녀들 사이에서 왕따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생각해 봤지만 그녀의 대답에서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보통 신입들 몫이 아니 예요?”
“그건 그렇지.”
“왜요?”
적당히 친해져서 궁 안에 대한 것을 캐물으려던 것은 잠시 뒤로 물리고 문득 그녀가 궁금해져서 그녀에 대한 것을 물었다.
“이유는 별거 없는데, 다들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된 분야나, 있어 보이는 역할을 맡고 싶어 하고, 이런 일들은 대체로 싫어하잖아. 내가 굳이 이일을 하지 않아도 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내가 맡아서 하면 그만큼 모두가 원하는 일을 빨리 맡을 수 있잖니.”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며 활짝 웃는 그녀는 천사였다.
세이나의 앞에 천사가 강림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난 좋아.”
그녀의 그런 성격 때문에 후에 들어오는 이들이 좀 전의 그 시녀처럼 그녀를 쉽게 보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감자를 다 깎고 난 후에 이번에는 양파를 무더기로 가져와 껍질을 벗기며 세이나는 히데아의 면면을 관찰했다.
귀 밑까지 내려오는 구불거리는 적갈색의 머리카락에, 눈을 많이 가리는 듯 내려온 앞머리덕분에 외모를 잘 알 수는 없지만 군데군데 붙어있는 주근깨와 작은 입에 얼굴도 조그맣다.
처음부터 홍조끼가 있는 것인지 두 볼은 벚꽃처럼 연한 핑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히데아를 가만히 보던 세이나는 갈색의 옷을 벗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 양파를 들어 살짝 히데아의 얼굴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히데아. 넌 내꺼야.’
“응?”
문득 시선이 느껴져 세이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이나는 아무것도 아닌 척 베시시 웃으며 일에 집중했다.
밤 늦게가 되어서야 시녀들이 묵는 방으로 돌아온 세이나는 녹초가 되어서 그대로 침대에 뻗어버렸다.
“흐어어...”
성실하고 성실한 히데아와 함께 있다 보니 잠행이고 뭐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몸만 축나버린 세이나는 여기저기 쑤시는 삭신을 부여잡고 간신히 침대에서 떨어졌다.
“하루 만에 다 알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히데아는 입이 무겁지, 일은 많지, 몸은 쑤시고, 보는 눈도 많고 미치겠네.”
다들 노곤했는지 잠이 깊게 들어 세이나가 중얼거려도 조용했다.
그래도 조금은 알게 된 정보는 있었다.
지하 감옥에 론이 있다는 것, 3일 뒤에 신성한 의식인가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여신의 재단이 있는 홀은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는 장소고, 의식도 형식적인 것일 뿐이라 들어갈 수 있는 이들만 해서 소수로 간단히 치러지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플로아가 특별한 날이니 만큼이라며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 덕분에 궁 안의 사람들이 유례없이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