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안스는 모임이 있던 다음 날, 헤레이스를 비밀리에 불러냈다.
헤레이스는 자신이 불려온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저 차만 마실뿐이었다.
여유롭기 그지없는 헤레이스의 모습에 라티안스는 기가 찼다.
지유의 검술 선생으로 불렀는데 당당히 배신이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무엇이 말입니까?”
“어제 새로운 로드를 추천하는 자리에 참여한 것 같던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곳은 홈 파티였습니다.”
“홈 파티라…….”
“홈 파티까지 간섭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헤레이스의 태연자약한 거짓말에 라티안스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건 어딜 보나 새로운 로드를 추천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이미 알 뱀파이어들은 전부 다 아는 그 모임을, 파티라고 속이다니.
어이가 없고 배신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런 라티안스의 표정을 보던 헤레이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네가 나를 배신할 수 있어? 하는 표정이네요.”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그런 기분이 안 들겠나?”
“전 로드에게 단 한 번도 맹세의 말을 꺼낸 적도 없습니다. 혼자 저를 믿으신 건 로드뿐이죠.”
“…….”
“애초에 저는 블러드 로즈의 검술 선생님으로 온 것뿐이고, 당신의 기사로 온 기억은 없습니다.”
“하….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거군.”
“제 말이 틀립니까?”
헤레이스의 말은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라티안스는 속만 부글부글 끓었다.
지유를 가르친다는 뜻은 거의 자신의 편이 되겠다는 말과 똑같았다.
라티안스에게 지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고, 중요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헤레이스가 우리 편이라고. 우리 쪽의 뱀파이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는 맹세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다며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
“난 그대가 잘못 간 거라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군.”
“진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가 같을 거로 생각하신 겁니까?”
“…….”
“전 로드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블러드 로즈가 사라진다면, 뱀파이어 로드인 당신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소리 아닙니까.”
“…….”
“그런 로드에 어디를 믿고 당신을 따르겠습니까? 뱀파이어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하죠.”
헤레이스가 웃으며 말한 말들은 전부 사실이었고, 자신이 걱정하고 있던 것들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약한 부분만 파고 들어오는지. 라티안스는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존중해주자고 생각한 것도 라티안스였다.
그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알면서 한 선택이었건만…. 남의 앞에서 진실을 듣는 것은 꽤 가혹한 일이었다.
“…나를 죽일 생각인가?”
“설마요. 저희는 그런 야만스러운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너희들이 바라는 건 뭐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애초에 그걸 물을 상대는 제가 아니지 않나요?”
“발뺌은 그만해! 그 모임이 일반적인 홈 파티가 아니라는 건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렇다면 제가 사실대로 순순히 전부 말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말하지 않겠다는 건가.”
“말할 이유가 없죠.”
“…그래. 앞으로 지유의 검술 선생은 그만두는 거로 알겠어. 가봐.”
가보라는 라티안스의 말에 헤레이스는 아무런 반박 없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헤레이스가 나가자 라티안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절대로 지유만큼은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유만큼은 지킬 것이다.
헤레이스가 방 밖으로 나오자 방 밖에서 기다리던 렌도크가 그에게 다가왔다.
“적당히 도발했어.”
“…정말 적당히 도발하신 거 맞으십니까? 문 안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요.”
“착각이겠지. 그래서 다음 모임은 정해졌어?”
“오늘 저녁으로 정해졌습니다.”
“너무 급한 거 아니야?”
“이미 들킨 거, 철판을 깔고 나갈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것 하나 마음에 드네. 숨어서 깔짝거리고 싶진 않았는데.”
“헤레이스 님에 대한 지지가 괜찮은 편입니다. 이대로 밀고 가면 로드의 자리는 헤레이스 님의 차지 일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만큼 더 로드에 어울리는 뱀파이어가 있겠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낯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귀족들이 딱 질색할 근본도 모르는 천한 자들의 사이에서 살아온 헤레이스였다.
그런 자신이 모든 뱀파이어를 발밑에 거느릴 수 있다니. 얼마나 짜릿한가.
“뱀파이어 세계가 내 손에 들어올 날이 정말 멀지 않았군.”
“그러니까 제발, 부디 자중해주시길 바랍니다.”
“알았어. 하여간 렌도크는 잔소리쟁이라니까.”
렌도크는 헤레이스가 투덜거리는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성 밖으로 나갔다.
한편, 헤레이스를 만나고 온 라티안스는 지유에게 가 훈련은 더 없다고 말해줬다.
모든 일을 전해 들은 지유는 어쩐지 입 안이 씁쓸해졌다.
“정말 헤레이스 씨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래. 자신은 널 가르치러 온 것뿐이지 맹세를 한 적은 없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더군.”
“그럼…. 헤레이스 씨는 정말 로드가 되려는 생각인 걸까요?”
“그렇겠지. 그러지 않고서 그 모임에 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 모임은 새로운 뱀파이어 로드를 추천하는 자리였다. 그런 곳에 갔으니 말을 다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진실을 알아도 라티안스의 편일 거라는 헤레이스의 말은 그저 거짓말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었지.
아니, 애초에 진실이라는 게 존재는 했던가? 그와 한 번 더 칼날을 부딪쳐보고 싶었다.
‘칼은 마음을 비치는 거울…. 이라고 그가 그랬으니까.’
지금이라면 헤레이스의 검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헤레이스의 진위를 알고 싶어 한들 이제 더 그와 만날 수 있는 일은 없다.
앞으로는 적으로 만나는 걸까. 그래도 많이 친해졌고, 믿고 있었는데.
“…헤레이스 씨는 라티안스 씨를 죽일 거라고 이야기했나요?”
“아니, 그건 아니라고 했어. 그래서 그들의 꿍꿍이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야.”
절대자가 정해준 로드와 뱀파이어들이 선택한 로드.
그 소리를 듣자 지유는 자신의 세계에서 비슷한 직위가 떠올랐다.
영국은 따로 왕이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나라를 움직이는 건 총리였다.
“저…. 라티안스 씨.”
“왜 그래?”
“왠지 그들은 라티안스 씨를 살려두고 새로운 로드를 로드의 자리에 앉힐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라티안스 씨는 로드지만 로드가 아닌, 그저 상징적인 의미가 된다는 거예요.”
알 듯 모를 듯 뜬구름 잡는 듯한 지유의 설명에 라티안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지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게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생겼다.
그들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라티안스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그저 로드의 자리에 앉아 있게 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뱀파이어를 로드로 삼을 생각일 거다.
“제 세계에서 이런 형식의 정치 형태를 본 적 있어요. 뱀파이어 로드 대신 왕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요.”
“그대의 세계에서?”
“네. 입헌군주제라고…. 가장 높은 사람은 있지만, 그 사람이 정치하는 게 아닌 국민들이 뽑은 사람이 정치하는 형태에요.”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나는 가장 높은 뱀파이어겠지만 뱀파이어들이 선택한 뱀파이어가 로드가 된다는 뜻인가?”
“맞아요.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그런 형태로 뱀파이어들이 바꾸려고 하는 것 같아요.”
뱀파이어들이, 스스로 뱀파이어 로드를 선택한다. 그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대상이 되자 기분이 묘해졌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저 혼란스러웠고, 이해하기 힘들었으며, 마치 전혀 모르는 어떤 사물을 보는 느낌.
“그대의 이야기는 전부 이해했어. 그런데…. 조금 어렵군.”
“그렇죠…?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고 해도, 자신에게 적용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나 말고도 나를 믿고 따라와 준 뱀파이어들도 이해하기 힘들 거야. 어쩌면 받아드리기 힘들어하는 이가 있을지도 몰라.”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당분간은 잠시 비밀로 해두자고.”
“네, 그럴게요.”
“그러면 난 가볼게. 혼자…. 좀 생각해봐야겠어.”
지유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라티안스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런 그를 보며 지유는 그의 심정을 추측해보려 했으나 어려웠다.
지배자로 태어나 지배자로 교육받으며 지배자가 되기 위해 부단 애를 썼으나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르는 그의 심정을 누가 알까.
그녀는 지배자로 태어나보지도 못했고, 그런 교육을 받아보지도 못했다.
라티안스는 평생을 로드가 되기 위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한순간에 그 자리마저 빼앗길 상황이 닥쳐왔다. 물론 모두에게는 좋은 방향이었다.
절대자가 정해준 로드가 아닌 뱀파이어들이 모여 선택한 뱀파이어가 로드가 되는 것이니까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라티안스에게는 이야기가 다를 것이었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