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립은 감옥 밖을 지키는 병사들을 보며 베키와 테크의 몸 상태를 살폈다.
베키의 시력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치료는 하지 않았지만 테크 역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이제 남은 것은 경비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방심하게 만드는 것 뿐이였다.
이 감옥을 탈출해서, 라티안스를 죽이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칼립은 베키와 테크를 바라봤고, 그들은 준비가 됐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물 한 잔만 주겠나? 이 아이가 목이 말라서 힘들어해.”
“물 좀 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범죄자들 주제에 요구하는 것도 많네.”
경비원은 혀를 차며 구시렁거렸으나 목말라하는 베키의 모습이 마음이 약해진 듯 물을 가지러 갔다.
이럴 때는 베키의 어린 나이가 도움이 된다 생각하며 그가 물을 내밀기 위해 철창 틈 사이로 손을 뻗을 때를 기다렸다.
병사가 물을 주기 위해 철창 틈 사이로 손을 뻗자 뒤에서 자는 척하고 있던 테크가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오며 그의 손을 꺾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옆에 있는 병사가 문을 열고 테크를 저지하려고 하자 이번엔 칼립이 그의 명치를 때렸다.
순식간에 지하감옥에서 탈출한 세 명은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병사들을 따돌리기 위해 뛰었다.
“베키, 그들이 어디서 오고 있지?”
“앞에서…. 지금 달리고 있는 복도 오른쪽에서 곧 나올 거야.”
“여기서 왼쪽으로 꺾는다. 베키, 라티안스의 위치는?”
“조금만 기다려줘. 여기 성이 너무 넓어. 로드, 내가 그래서 성 좀 줄이자고 이야기했잖아.”
“그건 나중에. 어서 찾아봐.”
“방에…. 블러드 로즈랑 함께 있어. 둘이 이상한 분위기인데.”
“이상한 분위기?”
“응, 둘이 서로를 보는 눈이 이상해. 끈적끈적 하다고 할까, 뭐랄까…….”
“하! 그런 거군. 그래, 둘이 무슨 사이인지 알겠어. 그 방이 어디지?”
“손님방으로 썼던 곳.”
“그곳으로 간다. 베크, 테크 품에서 떨어지지 마.”
“응.”
베키는 자신을 껴안은 테크의 팔을 꼭 잡았고, 세 명은 손님방을 향해 뛰었다.
지하감옥에서 탈출한 세 명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라티안스의 귀에 들어왔다.
라티안스는 그 소식에 경비를 늘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지키라고 명한 뒤, 지유를 바라봤다.
“방금 들었지? 그들이 탈출했다는 것.”
“네, 라티안스 씨에게 올까요?”
“확실해. 여기서 지금 나가면 그대가 위험해지니 여기 있어야겠어.”
라티안스의 말에 지유는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립을 본 것은 파티장과 법원 앞이 전부였다.
이런 식으로 직접 위협을 받게 되니 손발에 땀이 차고, 점점 차가워졌다.
그런 지유의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라티안스는 걱정 말라는 듯 지유의 손을 잡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유는 꽤 안정을 찾을 수 있어서 살짝 미소를 짓고 라티안스를 바라봤다.
그래. 겁내지 말자. 나도 이럴 때를 위해서 열심히 훈련해왔잖아?
‘이럴 때 겁을 먹어서 어쩌자는 거야. 괜찮아, 할 수 있어.’
비록 검술은 제대로 해낼 수 없지만, 벽을 쳐서 막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도망칠 수 있는 구멍을 만든다던가. 지유는 시끄러운 방 밖의 소리에 긴장하며 라티안스의 손을 꽉 잡았다.
밖에서 경비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지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맨손으로 탈출했을 텐데 어느새 칼까지 뺏은 모양이었다.
“지유, 지금 당장 칼 한 자루만 만들어줄 수 있겠어?”
“물론이죠. 어떤 칼을 만들면 되나요? 제가 아직 칼은 잘 몰라서.”
“적당히 길고 날카로운 칼이면 충분해. 다른 건 필요 없어.”
“알겠어요.”
지유는 눈을 감고 라티안스가 말했던 대로 적당히 길고 날카로운 검을 상상했다.
한번 휘두르면 뭐든지 벨 수 있고,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검을.
언제나처럼 신비한 힘이 느껴지며 손안에 검이 생겼다.
“여기요.”
“좋은 검이군, 고마워.”
라티안스는 지유가 만든 검을 쥐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했다.
라티안스는 눈을 감고 밖을 볼 수 있는 바람을 만들었다.
바람은 복도를 휩쓸었고, 감은 눈꺼풀 위로 복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기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군. 아무래도 훈련을 다시 시켜야겠어.”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겁먹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아무래도 곧 그들이 이 방으로 들어올 것 같아. 뒤로 물러서, 지유.”
라티안스는 눈을 뜨고 검을 들고 문을 쳐다봤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문이 부서지며 칼립과 테크, 베키가 들어왔다.
라티안스는 상처투성이인 그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저렇게까지 하면서 이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걸까.
“범죄자들이 이렇게 성에 설치다니, 배짱도 좋군.”
“이렇게 범죄자들이 궁에 설칠 수 있도록 경비를 허술하게 한 로드가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
한마디도 지지 않는 칼립의 모습에 라티안스는 혀를 찼다.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로드라고 생각하는 듯, 그 자태가 도도했다.
저 둘은 칼립이 어떤 뱀파이어인지 알면서도 따르고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지금은 저들을 이해할 때가 아녔다. 중죄를 지었음에도 감옥에서 탈출하고, 로드를 습격했다.
이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죄. 라티안스는 망설이지 않고 칼립에게 칼을 휘둘렀다.
칼립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칼을 들어 방어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저 인간 여자가 그대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 같던데…….”
“…….”
“여기서 죽으면 정말 재미있겠군.”
칼립이 테크를 바라보는 동시에 테크는 지유에게 향했고, 라티안스는 힘으로 칼립을 뒤로 밀치고 지유 앞으로 뛰어갔다.
지유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을 막으며 라티안스는 수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임을 알아차렸다.
빨리 누군가가 지원을 오지 않는 이상, 지유도 자신도 위험했다.
지유는 얼른 강한 돌풍을 만들어 라티안스에게서 테크를 떨어트렸다.
“고마워, 지유.”
“천만에요. 다른 분들은 언제 올까요?”
“곧 올거야. 그때까지 버텨야 해.”
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에 맞는 검을 만들었다.
분명 도움은 절대 안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다면….
칼립은 서로를 지키려는 둘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인간 여자 하나 지키려고 발버둥 치는 꼴이라니, 웃기는군.”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다가 다칠 텐데!”
라티안스는 칼립을 향해 달려갔으나, 테크가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이번엔 칼립이 지유를 향해 뛰었고 라티안스는 지유를 바라봤다.
지유는 급한 마음에 자신의 사방에 벽을 쳤다. 검은 그 벽에 막혔고, 칼립은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 주제에 잔기술을 쓰는군!”
“지유! 그대로 버텨!!”
“알겠어요!”
지유는 자신의 벽을 부숴버리려 하는 칼립에 맞서서 벽을 더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 라티안스는 테크를 베어버리는 압력을 만들었고, 그것을 피하는 틈을 타 라티안스는 칼립의 뒤를 쳤다.
하지만 칼립은 바로 뒤를 돌아 라티안스의 검을 막았고 두 명은 팽팽한 기 싸움을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리키나가 검기를 날리며 들어왔다.
“로드, 지유 양! 무사하십니까?!”
“너무 늦었잖아, 리키나!”
“죄송합니다.”
리키나가 방에 들어오자 칼립과 테크는 긴장한 얼굴로 변했다.
이걸로 전세는 역전됐다. 테크는 한쪽 팔이 없고, 칼립은 이미 병사들에게 당한지라 체력이 부족했다.
라티안스는 검을 고쳐 들며 자신들을 향해 여전히 살기를 뿜어내는 두 명을 바라봤다.
“여기서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헛소리하지 말아라. 내가 목숨을 구걸할 거로 생각하나?”
“그렇다면 여기서 그 목숨을 거둬주지.”
“할 수 있다면 해보시지!”
라티안스는 칼립에게, 리키나는 테크를 막아섰다.
칼립과 테크는 체력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라티안스와 리키나에게 호각으로 맞붙었다.
치열한 싸움 속에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키는 주변을 살폈다.
‘뭐라도…. 뭐라도 둘을 도울만한 게 없을까……?’
어리고 겨우 다른 곳을 훔쳐보는 능력을 갖춘 자신으로써는 이럴 때 늘 그들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나도 그들을 돕고 싶어. 내 은인인, 내 가족인 그들을 어떻게 서든…….
그런 베키의 눈에 누구 것인지 모를 단도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면…. 저거면 나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더 오래 가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도와야한다는 초조함만이 베키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베키는 단도로 손을 뻗었고, 그것을 꼭 쥐었다.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베키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 라티안스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등을 향해 팔을 뻗었고, 무엇인가 찔린 느낌이 들며 손등이 따뜻해졌다.
베키가 실눈을 뜨자, 그곳에는 피를 흘리고 있는 라티안스의 등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