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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언더독
작가 : 김예담
작품등록일 : 2016.9.7

밤낮을 안 가리고 축구공을 차던 아이였다. 꿈을 품고 15살에 영국으로 떠나지만 4년 뒤 경기 중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꿈을 접어야만 했다. 좌절에 젖은 그는 거친 세상에 내던져졌다. 그에게 남겨진 건 고졸이라는 학력 뿐. 그러나 전혀 새로운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분
작성일 : 16-09-07 13:05     조회 : 327     추천 : 2     분량 : 3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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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고아였고 가난했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나는 건 없지만 한국을 강타한 IMF는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집이 기울었고, 외삼촌과 외숙모의 허리 또한 기울었다. 그럴수록 나에게 내뱉어지는 말 또한 거칠어졌다. 외삼촌은 월급쟁이에서 노래하는 베짱이가 되었고, 외숙모는 가정주부에서 근면 성실한 일개미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외숙모의 허리는 굽이굽이 휘었고 종아리는 퉁퉁 부어갔다. 나를 포함한 새끼 넷을 키우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심지어 막내는 젖을 갓 뗀 아기였다. 무릇 개미의 세상에선 일개미가 알을 낳으면 안 되는 법이다.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나. 외숙모는 다행히도 일개미가 아니었지만 안타깝게도 일개미 취급을 받았다. 어떻게 소도 키우고, 우리도 키웠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외숙모는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는 톰 크루즈였으리라.

 

 아쉽게도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없다. 외삼촌께서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긴 했지만 내겐 그저 외삼촌과 닮은 낯선 여자였다. 그랬다. 어머니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어머니는 남자친구였던 최아무개(인간만도 못한 짐승이므로 이렇게 부르겠다)와 동거를 했었다.

 

 그러다 나를 가졌고 이 사실을 안 외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지만 곧 결혼을 허락하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최 아무개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꿈을 꿨을 테고, 서로를 닮은 내가 태어나길 만을 기다렸을 거다.

 

 그러나 시커먼 비구름만이 어머니를 기다렸다. 최아무개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었고, 아이 둘은 둔 남자였다. 그는 소리 없이 사라졌고, 그 남자의 아이를 품은 어머니는 그렇게 버려졌다. 아이를 지울까말까 고민하셨지만 결국엔 낳았고 난 태어났다. 그리고 이년 뒤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게 어머니에 대해 아는 전부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리라.

 

 이런 비참한 과거를 가진 게 슬프냐고? 아니. 무덤덤하다. 부모가 없다는 거에 별다른 감정은 없다. 딱히 슬프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것보다는 소외되어 자라온 게 더욱 슬펐다. 근본적으로 모든 식물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물을 마시며 햇빛을 받고 자란다. 이처럼 모든 아이는 부모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러지 못하면 갈수록 시드는 식물이 돼 간다. 아이들도 같다. 어린 시절을 기억해보자면 늘 사랑을 갈구했고 부족한 관심에 우울했다. 부모님을 모두 잃은 나를 거둔 건 외삼촌이었다. 외숙모에겐 피붙이도 아닌 내가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던 건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걸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렸다.

 

 산타기를 좋아한다면 겸손해야 한다. 대자연에 머리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고 산을 경시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산행은 산을 오르는 것이지 산 위에 서는 게 아니다. 자신의 작음을 알기 위해서이지 정복자가 되기 위해 산을 타서는 안 된다.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5월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의 수도 역할을 하던 카르타헤나를 떠났다. 이윽고 갈리아와의 경계인 피레네 산맥에 이르렀는데 보병 5만에 기병 9천, 코끼리 37마리의 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을 땐 5만이 넘던 병력이 2만 6천으로 줄어든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한니발은 경시했던 것이다. 대자연을.

 

 아마도 우리나라는 경시했던 것 같다. 치욕스런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겪고, 광복한 후 맞은 6·25전쟁의 아픔. 분단의 슬픔. 그런 뒤 꿈처럼 찾아온 경제 성장의 황금기. 축구로 치자면 하부리그에 있던 팀이 단숨에 1부 리그로 승격하자마자 상위권에서 시즌을 마친 돌풍 정도로 비유하면 될 것 같다. 너무나도 자신감이 넘쳤던 거다. 너무 넘쳐 자만심이 생겼던 거다.

 

 IMF로 인해 금모이기 운동, 아나바다 운동이 일어났을 때, 사촌 여동생 유정이가 태어났다. 안 그래도 부족했던 사랑은 모두 유정이에게로 돌아갔다. 지붕이 허물어지는 것만큼은 막기 위해 외숙모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그럴수록 난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많아졌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내가 유정이를 때리고, 외숙모에게 떼를 쓰고, 세상 모든 사람의 단잠을 깨울 만큼 울 때면 외숙모가 하던 말이 있다.

 

 “부모한테 버려진 새끼 거둬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외삼촌과 외숙모는 딸 둘을 더 낳았고, 그렇게 난 결핍투성이인 아이로 자랐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시작한 게. 시간이 흐를수록 관심을 위한 별난 행동은 더욱 심해져 갔다. 그럴수록 나를 경멸하는 눈초리도 더욱 심해졌다.

 

 김시우!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김시우! 그런 행동 하지 말랬지! 김시우!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김시우! 남김없이 싹싹 먹으랬지! 김시우! 누가 동생 괴롭히래! 김시우! 김시우! 김시우! 끊임없이 이름이 불렸고 가슴엔 상처만 쌓여갔다. 始. 雨. 비로소 시. 비 우. ‘가뭄에 단비’라는 뜻의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주셨다. 단비는커녕 내 마음은 가뭄을 못 이겨 사막이 되어갔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토끼 한 마리조차 없는 죽은 땅처럼.

 

 너무 슬픈 얘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라고 해서 안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확실히 기억하는 좋은 기억이 있다. 일곱 살 때였다. 생일을 맞은 나를 위해 외숙모는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그때 먹은 미역국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케이크 맛은 너무도 기억난다! 어찌나 달콤하던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심 선물을 기대했으나 역시나 없었다. 그렇게 밤이 되고 약간 실망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단잠을 청하다 누군가 나를 깨웠다.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는 외삼촌이었다. 볼이 발그레하신 게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불쌍한 새끼. 이날만 되면 네 엄마가 생각나서 삼촌이 너무 슬프단다. 너를 낳고 나서 어찌나 행복한 눈물을 흘리던지. 아직도 기억이 나구나.”

 

 난 너무 졸려 신음을 내며 자는 척을 했다.

 

 “어제 네 엄마가 꿈에 나와서는 우리 아들 미역국이라도 끓여 주라고 하더라. 늘 네 외숙모가 미역국은 끓여줬었으니 작은 생일선물이라도 줄까 싶어서 사 왔다.”

  생일선물? 선물이라고? 금세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생일선물이라니!

 “선물? 진짜? 진짜지?”

 

 이불을 패대기치고는 산타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삼촌을 바라봤다. 너무나 설렜다.

 

 “옜다.”

 

 축구공이었다. 포장지에도 쌓이지 않은 축구공.

 

 그때부터 축구공이 닳아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품에 끼고 살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볼을 차러 다녔다. 어른들은 볼을 잘 차는 날 보며 영재라 손뼉 쳤다. 집에서 항상 소외되어 받은 외로움을 축구로 채웠다. 어릴 땐 축구가 재밌어서 했다기보다는 칭찬을 받기 위해, 관심을 받기 위해 했던 것 같다. 내 또래 아이들을 허물 벗기듯 재치거나 농락할 때면 쏟아지는 관심과 칭찬. 그게 좋았다.

 

 의자에 단 십 분도 앉아있지 못했던 나는 축구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초등학교를 등교하자마자 축구. 쉬는 시간에도 축구. 학교 마치고 축구. 잠 잘 때 까지 축구. 축구. 축구. 그렇게 내 일상을 축구로 채웠다.

 

 한일 월드컵 이후 축구에 대한 관심은 전폭적으로 증가했다. 박지성, 이영표 등 유수의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했고 한국축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아직 집의 가세는 휘어져 있었고 삶이 넉넉지 않은 와중에 달콤한 사탕발림처럼 들려오는 영재, 신동이라는 소리는 외삼촌과 외숙모를 기대케 했다.

 

 “우리 시우가 그렇게 축구를 잘한다던데 국가대표라도 될 생각이냐?”

 

 역대 한일전 경기를 편집해 모은 영상을 보는 내게 외삼촌이 말했다.

 

 “언젠간 국가대표가 돼서 일본을 부술 거야.”

 

 “그럼 리프팅 백개를 한다면 축구선수 시켜주마.”

 

 “진짜? 진짜지?”

 

 바로 공을 가져와서는 깔끔하게 성공했다.

 

 “요놈 정말로 물건이네.”

 

 아홉 살, 축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렇게 축구는 내 인생이 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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