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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혁명적소녀
작가 : an3375
작품등록일 : 2016.8.24

모종의 이유로 가문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리는 도피처로 바탈리온 제국의 기숙사제 아카데미, 아스테리아 학원에 입학한다. 오랜 세월, 인간과 이종족의 전쟁에 최전방에 선 바탈리온 제국은 아스테리아 학원에 극소수의 사람들 밖에 모르는 비밀을 심어 놓는데…….

 
Chapter 2. 그 소년, 진실(眞實) (2)
작성일 : 16-09-01 01:03     조회 : 778     추천 : 2     분량 : 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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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는 남자의 화가 자신에게 미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분노의 열기가 따끔따끔 자신의 피부를 찌르고 있다고 느꼈다. 옆에 있던 그녀도 숨이 막히는데 화를 받고 있는 당사자는 어떤 기분일까? 유리는 황자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것 같았다.

 

 

 

 “음…세디넬, 조금 진정하는 게…….”

 

 

 “보고 싶은 걸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요? 한참 잘못됐습니다! 본인 입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카릴 폰 리본첼’ 은 이 학원의 여왕님이라고요!! 숭배의 대상이자 많은 학생들의 우상이란 말입니다! 그런 당신이 ‘은빛 여우’를 보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그들은 리본첼 영애가 원하는 걸 바칠 겁니다! 이렇게요!”

 

 

 

 세디넬이라 불린 남자가 엘렌의 발밑에서 덜덜 떨고 있는 여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유리가 오기 전에 황자의 생각 없는 발언에 대해서 잔뜩 훈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하물며 성별도 숨기고 있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황자님은 제게 조심하시겠다고, 아니 이미 충분히 조심하고 있다고 말하셨죠. 하지만 결과는 어떤 가요? 입학한 지 채 석 달도 되지 않아 이렇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이게 황자님께서 약속하신 ‘조심한 결과’ 인 건 가요?”

 

 

 

 감히 황자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유리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하엘은 그의-하엘은 ‘그녀’라고 알고 있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에시단 황자 역시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겼는지 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침음만 삼켰다. 세디넬이 계속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황자님의 부주의함으로 숨겨야하는 정체도, 특별동의 비밀도 모두 들켜버리고 말았습니다. 30년 동안 이어져 온 비밀 협정을 외부인에게도 노출하셨으니 이 이상 비밀을 지키기 어렵겠지요.”

 

 

 “저기, 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 게요…….”

 

 

 “이건 다리엔 영애의 의지와는 관계없습니다.”

 

 

 

 초봄임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그와 눈을 마주하자 서늘한 한기가 돋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온기 없는 다갈색 눈이 차갑게, 그리고 냉정하게 그녀를 향해 딱 잘라 말했다.

 

 

 

 “관계자가 아닌 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그녀의 기억을 지우거나 목숨을 끊어 입을 막아야…….”

 

 

 

 그리고 그녀의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태연자약하게 저를 죽이겠다는 이야기에 이번엔 유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역시 하엘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여름 방학 때 지낼 수 있는 안식의 장소를 찾다가 여름 방학이 되기도 전에 죽어나게 생겼다. 유리는 괜히 자신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 원흉인 하엘을 원망하며 지금 여기서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다가 바로 옆에서 선명한 한 쌍이 황금색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입술만 꾹 깨물었다.

 

 

 지금 그녀의 실력으론 무슨 수를 써도 저 늑대 수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실력의 차이는 아까 몸소 확인한 바가 있었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이대로 죽어야 하는 건가? 유리는 검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검이 있었다면 적어도 반향은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 그거 말인데 유리시아도 특별동에 머물게 하는 게 어때?”

 

 

 

 황자를 인질로 잡아야 하나, 라는 상상까지 하고 있던 유리는 황자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남자, 세디넬 역시 놀란 눈으로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물론. 내가 언제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거 봤어?”

 

 

 “여장을 한 채로 입학하시겠다고 말씀하실 땐 두 말 하시길 간절하게 바라긴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디넬의 눈엔 어쩐지 피로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지쳐 보이는 그에게 황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세디넬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협정을 계속 지속해 나가기 위해 비밀을 유지해야 하긴 하지만 제국민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유지하고 싶진 않잖아?”

 

 

 “…하지만 그녀를 특별동에 머물게 하는 건 그녀 역시 관계자가 된다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녀가 관계자가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비밀을 지키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종족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황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그거야…….”

 

 

 “애초에 특별동의 출입조건을 까다롭게 만든 이유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선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놓는 편이 협정의 비밀을 확실히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세디넬, 그렇지만…….”

 

 

 

 유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사자의 눈앞에서 목숨을 끊어놓느니 마느니 이야기하는 게 그리고 그것이 황자의 손짓 한 번이면 바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게 정말이지 오싹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봬도 황가에 충성하는 귀족집 딸인데 기숙사 한 번 들어왔다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될 줄이야…….

 

 

 유리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기껏 해봐야 정학이나 퇴학정도로 그것도 뇌물을 바치면 경징계정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머릿속 한 구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곤 한다. 위험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던 온실 속 도련님, 하엘이 통금시간 이후에 고작 여우를 잡기 위해 그녀를 대리고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간 것처럼 말이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지경에 이르자 비밀 협정의 관계자가 대체 뭘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유리는 기꺼이 특별동에 머물며 비밀 협정의 관계자가 될 생각이 충만해졌다. 그녀는 제발 황자가 저를 위해 계속 변호를 해주길 바랐다.

 

 

 

 “저……!”

 

 

 

 하지만 황자는 세디넬의 말에 망설이며 곤란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곤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한 유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손이 절로 덜덜 떨리고 초조함에 가슴이 세차게 쿵쾅거렸다. 그녀는 도저히 제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이종족에 대해 혐오감 같은 거 없어요! 미워한다던가, 세간의 인식처럼 싫어하지도 않고……!”

 

 

 “하지만 겁은 먹고 있죠. 그래서는 관계자가 되긴 어렵습니다.”

 

 

 “…나는 저 여자로 만족한다.”

 

 

 

 유리와 세디넬은 그들 사이에 끼어든 낮은 저음의 목소리에 동시에 눈을 돌렸다. 깜짝 놀라 커진 두 사람의 눈이 말을 꺼낸 검은 늑대 수인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라보았지만 수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시선을 받았다.

 

 

 

 “역시 리오넬이야! 봐봐, 세디넬. 리오넬도 유리시아가 마음에 드는…으븝!”

 

 

 “제정신입니까? 방금 제가 한 말은 못 들었습니까? 비밀 협정은 양 제국간의 화해의 기틀로 조심스레 다뤄져야 하는 일이라 보안을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함부로 외부인을 들이다니……. 이건 자칫하다간 협정 자체가 무효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요!”

 

 

 “나는 보안을 경시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학교를 안내할 거면 너희보단 저 여자가 좋단 뜻이다…….”

 

 

 

 흥분했는지 예의범절은 어느새 저 멀리로 집어 던져 황자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은 세디넬이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쳤지만 과묵해 보이는 늑대 수인은 에시단 황자나 유리와는 달리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냄새가 좋거든.”

 

 

 “…….”

 

 

 

 유리는 슬쩍 팔을 들어 제 몸의 냄새를 맡다가 모두의 시선이 제게 몰려 있다는 것을 깨닫곤 그만두었다.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자와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세디넬을 지나 은빛 여우를 안고 있던 엘렌이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팔을 끌어당겼다.

 

 

 

 “아.”

 

 

 

 손목에 닿은 콧바람에 화들짝 놀란 유리가 엘렌에게 붙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었다. 냄새를 맡는 게 끝났는지 그는 순순히 유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정말이군.”

 

 

 

 엘렌에 품에 안겨 있던 여우가 그를 따라 유리를 향해 코를 킁킁거리더니 캥캥, 거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마치 여우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달여우가 이 인간의 곁에서 얌전했던 건 그 때문이었군. 어린 녀석이라 인간들 손에 잡히면 무척이나 사나워 질 텐데 말이야…….”

 

 

 “…….”

 

 

 “나도 이 인간이 마음에 든다.”

 

 

 

 엘렌의 말에 세디넬은 이제 금방이라도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반비례하듯이 황자의 얼굴은 웃음꽃이 피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유리는 하마터면 제가 처한 상황도 잊고 웃음을 터트릴 뻔하였다.

 

 

 

 “그럼 결정된 거네! 잘됐다! 자자, 얼굴 펴 세디넬. 저 둘이 마음에 든다하니 어쩔 수 없잖아? 마침 이종족의 학생 수도 늘어서 관계자가 더 필요하다고 했던 참이잖아.”

 

 

 “…필요하긴 했지만 철저한 서류검사와 심사를 통해 발탁하려고 했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나 뽑을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치 유리시아?”

 

 

 

 매서운 세디넬의 눈빛을 피해 황자가 잽싸게 유리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어느새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그는 그녀를 향해 자신의 희고 고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관계자로서 같이 일하겠네! 잘 부탁해!”

 

 

 “…잘,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련의 일들에 기분이 조금 얼떨떨했지만 일단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어라?’

 

 

 

 맞잡은 손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부드럽고 고왔다. 고작 손을 잡은 것뿐인데 유리는 마치 최고급 천을 만지는 것 같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검술 훈련으로 잔뜩 딱딱해진 자신의 손과는 몹시 달라서 어쩐지 만져선 안 되는 연약하고 신성한 것을 함부로 만진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어허, 존댓말 쓰지 말라니까. 여기서 나는 카릴 폰 리본첼이니까! 리본첼 영애라고 불러도 되고 카릴이라고 불러도 돼!”

 

 

 “…그럼, 리본첼 영애.”

 

 

 “너무해! 여기선 카릴이라고 친근하게 불러줘야지!”

 

 

 “…카릴.”

 

 

 “응, 그래, 아주 좋아!”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이 어쩐지 하엘을 떠올리게 했다. 유리는 왠지 모르게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하였다…….

 

 

 

 “특별동으로 기숙사를 옮기는 절차는 세디넬이 다 해 줄 거야!-세디넬은 이 대목에서 유리를 노려보았다.- 아, 그보다 내 정체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소개 안 했지? 여기, 지금 너를 열심히 노려보는 사람은 세디넬 폰 소리티엔…….”

 

 

 “소리티엔?”

 

 

 

 뜻밖에 낯익은 성에 유리는 아직도 저를 매섭게 째려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바탈리온 제국의 귀족이라면 자라면서 소리티엔이라는 성을 듣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제국의 개국공신 소리티엔 후작가. 현 황제의 오른팔이자 제국의 재무를 책임지는 재무대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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