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생각시의 살인교사 (1) - ③
건물 밖은 12월 마지막 날의 한강변 날씨답지 않게 그다지 춥지가 않았다. 조금 전 저녁때까지만 해도 매섭게 몰아치던 강바람이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잠잠했다.
국회 앞 전경도 이상했다. 원래는 국회 앞뜰 너머로 빌딩과 가로등 불빛이 가득한 여의도 밤거리가 보여야 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국회의사당 건물이 새까만 크리스털로 된 상자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아까 전경대 경감이 말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워낙 안에서 이상한 일들을 연달아 겪었던 터라 동원도, 승희도, 그리고 밖에 나와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 정도 가지곤 크게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밖으로 연결돼 있다는 통로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쯤은 별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저 앞 왼편 구석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서로 뒤엉켜 먼저 나가겠다며 실랑이하고 있는 것이, 그쪽에 통로가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데 거기서 좀 빗겨난 곳에서 한 임신부 커플이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 동원의 눈에 들어왔다. 배가 불룩이 나온 푸른 스웨터 차림의 임신부는 멀리서 봐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동원은 승희를 데리고 그 커플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아니 임신부가 이 시간에 국회에 왜 있어요? 직원이세요?”
그러자 남편인 듯한 남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대답했다.
“제 와이프가 사무처 직원인데요. 임신 8개월째라 내일부터 출산 휴가라서 데리러 온 건데, 하필이면 …….”
승희는 두 사람이 안 돼 보였다.
“오빠, 이 분 많이 힘들어 보여. 어떡하지? 먼저 나가시게 할 순 없을까?”
동원은 다시 통로 쪽을 살폈다. 입구 주변은 이미 수백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서 아수라장이었다. 임신부를 저 안으로 그냥 데리고 들어가는 건 위험천만한 일인 듯 보였다.
그러다 문득 의사당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전경대가 눈에 들어왔다. 중간 간부로 보이는 자들의 어깨에는 무전기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동원은 그들 중 대화가 통할 것같이 생긴 사람을 한 명 골라 달려가 말을 걸었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무슨 일이시죠?”
경찰 치고는 목소리가 부드러운 것이 꽤 융통성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원은 임신부가 서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만삭의 임신부 보이시죠? 저기 통로 쪽에 사람들이 뒤엉켜 있어서 저분이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어요. 좀 도와줄 수 없을까요? 질서 유지하는 게 그쪽 일이잖아요.”
하지만 그는 난색을 표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저흰 명령 없이는 함부로 못 움직입니다.”
그러나 동원은 포기하지 않고 거듭 부탁했다.
“그럼 혹시 어깨에 차고 있는 무전기 가지고 사이렌만 잠깐 작동시켜 줄 순 없을까요? 사람들 시선만 끌어주시면 되는데.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부탁해요.”
그러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동원과 임산부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결국엔 마지못해 승낙을 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딱 한 번만 해드리는 겁니다.”
동원은 얼굴이 환해졌다.
“고맙습니다. 그럼 제가 저리로 가면 사이렌을 울려주세요. 가능하다면 다른 분의 무전기도 함께 사용해주시면 좋고요. 부탁합니다!”
동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괜스레 벌써부터 일이 다 해결된 것처럼 마음이 뿌듯하고 신이 났다.
동원은 적당한 지점에 멈춰 서서 조금 전 그 전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곧이어 여러 개의 무전기에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안에서 이상한 일들을 연달아 겪은 터라 예민해져 있던 사람들은 또 무슨 난린가 싶어 일제히 하던 행동을 멈추고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동원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그만 해도 좋다는 뜻으로 전경들 쪽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시 후 사이렌이 꺼졌다. 동원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며 차분히 호흡을 고른 뒤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지금처럼 계속 싸우면 분명 앞의 몇 명은 더 빨리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요? 분명 질서를 지켰을 때보다 더 늦게 나가게 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에 동원은 내심 으쓱해져서 마저 이야기를 했다.
“저쪽에 만삭이 된 임신부가 있습니다. 저 분은 뱃속의 아이 때문에 여러분들처럼 먼저 나가겠다 싸움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저 분이야말로 누구보다 먼저 나가야 할 사람이 아닐까요?”
동원은 그러면서 사람들을 죽 휘둘러봤다. 사람들은 동원과 눈이 마주치는 족족 머쓱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무리 안에서 동원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 나타났다.
“저 사람 말이 맞습니다! 일단 저 임신부부터 먼저 보내주고, 우리도 지금부터 차례를 지켜서 나가죠!”
그의 말은 분위기를 단번에 반전시켰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알아서 한 줄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그 중 몇몇은 임신부에게 다가와 먼저 나갈 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던 임신부의 남편은 그제야 안도하며 동원에게로 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밖에 나가면 꼭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동원은 괜히 쑥스러워졌다.
“인사는요, 무슨. 자, 어서 가보세요. 두 분께서 나가셔야 다른 사람들도 나가죠.”
이에 남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인사를 하고는 부인을 부축해 서둘러 통로 입구로 향했다. 그때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승희가 슬그머니 동원의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좀 멋진데?”
불쑥 멋쩍은 기분이 든 동원은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응? 나 원래 멋있잖아?”
승희는 입을 삐죽였다.
“칫, 무슨 칭찬을 못해준다니까.”
동원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복잡하기만 했던 머리와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나니 손이 저절로 승희의 어깨로 올라갔다. 마치 이미 이세계(異世界) 밖으로 나온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그때 뒤에서 승호의 핀잔 소리가 들렸다.
“야, 너희 커플은 그림 좋다?”
승호는 민철을 부축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동원과 승희는 얼른 달려가 거들었다.
“형, 지인 씨는?”
“지혜랑 있길래 별 수 없이 그냥 왔지. 상황이 이런데 내가 무슨 수로 지혜한테서 지인이를 뺏어올 수 있겠냐?”
“하긴. 지혜 씨의 시스터 콤플렉스는 우주 최강이니까.”
“우주 최강? 야 그거 맘에 든다, 하하.”
그때 통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본 민철이 별안간 그쪽으로 고함을 지르며 난리를 피웠다.
“안돼요! 거기로 나가면 안 돼요! 다 죽어요!”
승호와 동원은 화들짝 놀라며 민철을 뜯어 말렸다.
“야, 너 또 왜 그래? 진정해!”
“민철 씨! 왜 그래요?”
그러나 민철은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이 둘에게 따져 물었다.
“두 사람은 저거 안 보여요? 아까 그 유령들이 저 사람들하고 같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잖아요?”
“뭐라고요?”
“뭐?”
승희를 비롯한 세 사람은 통로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민철이 말한 유령들은 보이지 않았다. 셋은 다시 민철을 쳐다봤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셋 다 모두 ‘자꾸 왜 이러느냐?’라는 표정이었다. 민철은 답답했다. 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도 억울했고, 또 그 만큼 마음도 다급해졌다. 결국 민철은 혼자라도 사람들을 말리러 갈 심산으로, 자신을 붙들고 있던 승호와 동원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런데 그 바람에 민철의 재킷이 뿌지직 소리를 내며 찢겨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주머니에 있던 타로 카드 뭉치가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넷의 시선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한번은 찢어진 재킷으로, 또 한 번은 바닥에 쏟아져 버린 타로 카드 더미로 향했다. 그런데 그 카드 더미 바로 앞에서 그들의 시선을 대번에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고무신을 신은 심상치 않은 느낌의 여자 아이의 발끝이었다. 네 사람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설마……?’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넷은 눈을 천천히 앞으로 치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이내 식겁하며 흠칫 뒤로 물러났다. 꽃님이었다. 꽃님이 네 사람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꽃님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타로 카드들 중에서 한 장을 집어 동원 앞에 내밀었다. 받으라는 뜻이 분명해 보였지만 동원은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꽃님은 얼핏 무표정한 얼굴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원에게는 어서 이 카드를 받으라 다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마지못한 동원은 머뭇머뭇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뒤집어 앞면의 그림을 확인했다.
그림 속에는 한 면 가득 커다란 탑이 하나 있었고, 그 탑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탑의 잔해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탑 아래로는 피범벅이 된 시체들이 즐비하게 쌓여있었다. 기분 나쁜 그림이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동원이 어리둥절해 하며 가만히 있자, 조바심이 난 민철은 그 카드를 덥석 뺏어 들었다. 그런데 카드의 패를 확인한 민철은 돌연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무너지는 …… 탑 ……?”
동원은 그런 민철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왜요? 그게 무슨 뜻인데요?”
그러자 민철은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꽃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멸…….”
“에?”
동원, 승희, 승호는 온 몸에 소름이 좍 돋았다. 그런데 그 소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꺅!”하고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네 사람과 꽃님의 사이로 웬 사람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비명소리가 끊어짐과 동시에 그 사람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핏줄기가 그들 넷과 꽃님을 덮쳤다.
떨어진 것은 웬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머리와 몸통이 터지고 팔다리와 목이 제멋대로 꺾이면서 부러진 뼈들이 살을 뚫고 나오며 네 사람의 눈앞에서 숨통이 끊어졌다.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타로 카드들은 여자의 추락으로 생긴 바람에 의해 사방으로 비산했다가, 다시 우수수 지는 벚꽃처럼 꽃님의 주변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런데 카드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이 죄다 똑같이 ‘무너지는 탑’이었다. 동원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꽃님을 쳐다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직 흩날리고 있는 카드들 사이로 꽃님의 섬뜩한 미소가 비치는 듯 했다.
떨어진 여자가 엉망진창이 돼서 죽는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해버린 승희는 동공이 확 열리면서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러다 이내 심장을 짓누르며 처올라오는 공포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치 발작을 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꺅! 꺅! 꺅! …….”
한번 내지르기 시작한 비명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뒤에도 좀처럼 멈춰질 줄을 몰랐다. 동원과 승호도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민철은 얼굴을 덮친 피를 손으로 훔쳐내면서 울먹였다.
그때 웬 날 선 비명이 머리 위에서 네 사람을 덮쳐왔다. 넷은 움찔하며 일제히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하늘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며 그들 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후드득! 후드득! 철퍼덕! 철퍼덕!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은 마치 피로 가득 찬 풍선이 터지듯 퍽퍽 소리를 내며 사지가 찢겨 죽어갔다.
승희의 하얀 원피스가 비에 젖듯 선혈로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진이 빠진 승희는 이제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는 상태로 앉은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급기야는 눈동자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동원은 허겁지겁 승희를 부축해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승호를 불렀다.
“형!”
승호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그러고는 마찬가지로 민철을 데리고 동원이 있는 쪽으로 허둥지둥 도망쳐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