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생각시의 살인교사 (1) - ②

　그렇게 끝없이 퍼부어 댈 것만 같았던 피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덧 그 줄기가 점점 가늘어져 갔다. 그런데 그 가늘어지는 핏줄기 뒤편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마치 붉은 장막을 걷어 내며 등장하듯 한 아이의 형상이 홀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동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꽃님이었다. 그때 승희가 뭐라 말려볼 틈도 없이 무턱대고 꽃님을 부르며 달려 나갔다.

　“꽃님아!”

　승희는 실은 직전까지만 해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동원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마음 한편에서는 ‘꽃님이 난리 통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모두 내 책임’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나타난 꽃님이가 누가 봐도 괴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 따위에 미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원과 승호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는 달랐다. 특히 동원은 꽃님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괴이한 현상과 짝을 이뤄 나타나는 게 왠지 꺼림칙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얼른 쫓아가서 승희를 붙들어야 했다. 그래서 일단 팔부터 뻗어 승희를 불러 세워보려 했다.

　하지만 이내 주춤하고 말았다. 꽃님의 등 뒤에서 2명의 젊은 여인이 홀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홀에 있던 이들은 일제히 충격에 휩싸였다. 앞뒤 따지지 않고 무작정 꽃님에게로 달려가던 승희도 이번엔 멈칫하고 말았다.

　20세도 채 안되어 보이는 그녀들은 둘 다 단정한 조선시대 궁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배당에서 피를 토하던 꽃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의 피부에서도 보일듯 말듯 기이한 광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꽃님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눈알이 없었다. 마치 눈을 파내버린 마네킹의 얼굴 같았다. 꽃님은 몰라도 그 둘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령이었다.

　그 즈음 붉은 피를 뒤집어 쓴 채 거의 혼절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추스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바로 옆에 꽃님과 두 나인 유령들이 있는 것을 눈치 채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숨죽인 채 슬금슬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에 흠뻑 젖어 몸이 무거워진데다 바닥도 흥건한 피로 찐득대고 미끈거렸던 탓에 중심을 잡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결국 공포감을 견디지 못한 한명이 먼저 비명을 질러대며 홀 바깥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악!”

　그러자 머뭇거리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덩달아 일제히 도망을 놓았다.

　“으……우왁!”

　“꺅!”

　너무 정신없이 달리다 엎어지는 사람도 부지기 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 대부분은 미처 다 일어나지도 못한 채 거의 네 발로 기다시피 하며 정신없이 줄행랑을 쳐댔다.

　그런데 승희는 상태가 더 심각했다. 그 혼란한 와중에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꽃님 쪽을 우두커니 쳐다만 보고 있을 뿐, 도망칠 생각은커녕 좀 전에 받은 충격조차 아직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동원과 승호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승희에게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혹여 꽃님과 궁녀 유령들의 눈길이라도 끌세라 조용히 팔로 승희를 감싸 안은 채 서둘러 홀 가장자리로 몸을 피했다.

　한편 승희를 데리고 나오면서 꽃님 쪽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동원은 얼핏 꽃님의 시선이 홀의 한쪽 구석을 향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건 뜻밖에도 민철이었다.

　민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벽에 등을 바짝 기댄 채 주저앉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꽃님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팔다리는 힘이 빠져버려 버둥거리기만 했고 입에선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히익!”거리는 소리 밖에 튀어나오질 않았다.

　다급해진 민철은 도움을 바라며 주변 사람들을 애타게 쳐다봤다. 그러나 선뜻 민철을 돕겠다고 나서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모두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꽃님이 민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이 상황을 끝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사람들은 숨죽였다. 홀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다만 여전히 피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기겁한 민철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실성한 것 같은 소리, 그 두 가지만이 도드라져 허공에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민철은 사람들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자기 쪽을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러자 혼자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에선 오히려 ‘이쯤 됐으면 뭔가 일어날 법도 한데…….’라는 조바심마저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치 누가 발에 줄을 걸어 확 잡아 챈 것처럼 민철이 꽃님 바로 앞으로 홱 끌려나왔다.

　“으악!”

　꽃님 앞에 그대로 나뒹군 민철은 허겁지겁 다시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팔 다리를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좀처럼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들려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민철은 슬그머니 발버둥을 멈추며 꽃님 쪽을 돌아봤다.

　그때 돌연 꽃님의 눈에서 영문 모를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민철은 순간 시퍼런 면도날에 뺨을 베어버린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좍 끼쳤다.

　꽃님이 민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민철의 몸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움찔하더니 곧바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에게도 그 여파가 미친 것처럼 어깨를 움찔 움츠렸다.

　민철은 무릎을 꿇고 있던 그 자세 그대로 서서히 꽃님의 손 쪽으로 미끄러지듯 끌려갔다. 그와 함께 눈알이 위로 스르륵 돌아가면서 허옇게 뒤집혔다. 그 상태로 민철이 마침내 바로 앞에까지 끌려오자, 꽃님은 손바닥을 좍 펼쳐서 민철의 이마에 얹었다.

　순간 민철의 몸이 마치 고압선에 닿은 것처럼 발작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터는 입에서 거품까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계속 저대로 방치했다간 곧 죽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진저리가 날 만큼 여러 차례 괴현상을 겪은 터라 누구 하나 선뜻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는 동안 민철의 뇌리에선 낯선 광경들이 고속으로 돌아가는 슬라이드 필름처럼 펼쳐졌다.

　 - 조선시대 왕비의 복색을 한 여인이 방안에서 하얀 가면을 쓴 무당과 밀담을 나누고 있다.

　 - 달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천지에 돌풍이 거세고 벼락과 천둥이 요란하다. 어느 산기슭에서 하얀 가면을 쓴 무당이 방울을 요란스럽게 흔들며 주문을 외고 있다.

　 - 허리에 칼을 찬 내시들이 불에 달궈진 인두와 기름으로 나인들의 눈과 귀를 지지고, 쇠집게로 꽃님의 혀를 잘라 버린다. 11개의 날카로운 비명들이 밤하늘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 동원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내시가 칼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새하얀 가면을 쓴 무당의 시체와 함께 허리에 칼을 찬 내시들의 손에 다리가 붙들려 질질 끌려간다.

　그 순간 민철의 목이 거듭 뒤로 확 꺾였다.

　 - 무당이 쓰고 있던 가면이 흙바닥에 걸려 벗겨진다. 가면 속에서 민철과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이 드러난다.

　돌연 민철의 경련이 뚝 멈췄다. 사람들은 일제히 숨죽였다. 그러나 눈빛은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저마다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꽃님의 손이 민철의 정수리에서 떨어졌다. 민철은 곧바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졸도하듯 옆으로 픽 쓰러졌다.

　그런데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꽃님이 별안간 고개를 돌려 동원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동원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민철처럼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나 꽃님은 주위를 스윽 한번 휘둘러보는가 싶더니, 이내 마치 다른 차원의 문으로 들어가듯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다른 나인 유령들도 스르르 자취를 감췄다.

　괴이하게 변했었던 국회의사당 건물이 점차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바닥과 벽에 흥건했던 정체불명의 붉은 피도 건물 속으로 스며들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 몸에 묻어 있던 피들도 옷에 물든 흔적까지 공기 중으로 증발하듯 말끔히 사라져갔다. 이것들 또한 괴이한 현상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이제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란 생각에 그간 잔뜩 움츠려있었던 사람들의 숨통이 조금씩 트여갔다.

　승호는 그제야 달려 나와 민철을 흔들어 깨웠다.

　“야, 신민철! 눈 떠봐! 민철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민철은, 그러나 다행히도 곧 깨어났다.

　“으으으 …….”

　뒤집혔던 눈알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정신을 추스르는가 싶던 민철의 뇌리 속에, 조금 전 꽃님에게 의식이 제압당했을 때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가면 쓴 무당이 꽃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다 결국 주검이 된 채 동원과 쌍둥이처럼 닮은 내시의 시신과 함께 질질 끌려가던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민철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동원에게 달려가 막 다그쳐댔다.

　“당신 뭐 아는 거 있죠? 그쵸? 거기에 있던 거 당신 맞죠? 우리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말 좀 해봐요!”

　그러나 동원은 민철의 난데없는 닦달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에? 그, 그게 무슨 …….”

　그러다 문득 조금 전 학현에게 복부를 맞고 기절했을 때 봤던 장면 속에서 어떤 내시와 가면 쓴 무당이 꽃님의 죽음과 연관되어 등장했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그 장면 속에서 민철이나 민철과 닮은 사람을 본 기억은 없었다. 내시와 가면 쓴 무당의 얼굴이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었을 뿐, 그 외의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민철과 비슷한 것을 봤다는 생각에 불쑥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승호가 다가와 민철의 양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야, 정신 차려! 너 왜 그래? 이제 끝났어! 끝났다고!”

　그러나 민철은 이젠 아예 눈에 초점마저 잃은 채 부들부들 떨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 도대체 내가 뭘 불러낸 …… 내, 내가 거길 왜 …… 으으으 …….”

　그때 현관 쪽에서 한 남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통로가 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뭐?”

　홀 안은 대번에 술렁였다. 그러더니 결국 하나 둘 의사당 건물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본 승희도 동원과 승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오빠, 우리도 가 보자. 응?”

　그러나 여전히 민철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동원은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꾸물거렸다.

　“어? 응…….”

　그러자 승호가 거듭 동원에게 말했다.

　“동원아, 넌 승희 데리고 먼저 나가 있어. 나도 지인이 찾아서 민철이랑 같이 나갈 테니까.”

　동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 그래.”

　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승희에게 이끌려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저도 모르게 자꾸만 민철 쪽을 돌아보게 되는 동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