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곱단이가 한숨을 쉬었다.
“에효. 또 시작이시네. 요즘은 더 심하시네. 도데체 왜 저러신지. 돌아가신 우리 마님하고는 정반대이시니 시중 드는 우리도 힘들고. 또 우리 도련님하고 아가씨는 얼마나 힘드실까.”
설희는 바깥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이거 저거 계속 물어볼 수가 없어서 누구인지 확인하러 밖으로 나가 보고 싶어졌다.
“우리 이러고 있지 말고 가서 좀 위로 좀 해드릴까.”
“네? 위로라굽쇼?”
“그래, 뭔가 기분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이러고 듣고만 있을 수 없잖아. 나 옷 좀 줘.”
설희는 곱단이 가져다주는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막 저고리를 벗다가 하륜을 쳐다보았다.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도 다 큰 아녀자인데 그가 아무리 인간이 아니지만 이렇게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여줘도 되나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곱단이 있는데 고개를 돌리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다 벗는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했다.
“아가씨, 왜요? 거기 뭐 있어요?”
“아니, 난 또 벌레가 있는 줄 알고.”
그녀가 밖에 나가니 작은 별당 마당이 있고 담 옆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별당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하고 새삼 감동하며 감상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것들을 감상할 틈도 없이 시끄러운 소리가 또 들려왔다.
설희는 도데체 누가 그러는지 너무 궁금해서 별당 밖으로 나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집안의 가장 가운데에 있는 마당 한 가운데 독이 있고 누군가가 독 안에 머리를 집어넣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빈 독에다 머리를 쳐 박고 울어대니 집안에 그 소리가 더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첩이라서 그래? 내가 첩이라서 다들 무시 하는거야? 그래 그 잘나고 잘나신 본부인하고 미천하디 미천한 내가 비할 바가 되겠어. 그런다고 이제 그 본부인도 없구만. 여기 우리 대감마님 부인은 이제 나 혼자이구만. 왜 다들 나를 무시하는 것이야? 어? 아구 억울해. 엉엉. 아구 억울해. 내가 안주인이거늘. 아무도 날 뒷간에 뭐시기 취급도 안해. 아구 억울해.”
‘첩이라니 그럼 심사임당이 아닌거구나.’
설희는 눈치 빠르게 그녀가 이 집의 또 다른 안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인들이 옆에 서서 그만하라고 타일러도 독 안에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뒤에서 보니 한복치마가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튼실한 엉덩이만 보였다. 설희는 같은 여자로 왠지 민망해서 더 두고만 보고 있기 그래서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어보려고 했다. 그러자 곱단이가 놀래서 설희를 붙잡았다.
“서령 아가씨, 왜 그러세요? 가서 말을 걸어보시게요?”
“응, 왜 안돼?”
“항상 못 본척 하셨잖아요?”
“내가?”
설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곱단의 말로 미루어 보아 서령이라는 아가씨는 원래 저 독 속에 반쯤 몸이 들어간 여인을 싫어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설희는 서령이 아닌 관계로 저 여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 슬픈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물어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설희는 곱단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는 안 그럴려구.”
설희는 놀래는 얼굴로 바라보는 곱단이를 뒤로 두고 앞으로 다가갔다.
“흠흠. 저기요. 저기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독 안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스르르 상체가 독에서 빠져나왔다.
설희는 자신보다 키는 작지만 강단 있어 보이고 요염해 보이는 30 중반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설희를 발견한 여인은 처음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그 도도하고 도도하신 이 대단한 가문의 단 한 분 뿐이신 서령아씨 아닌가? 이 귀한 아씨께서 이 미천한 것 앞에까지 어이 오셨을까? 평소에는 날 거들떠도 보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흠,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왔어요. 집 안 사람들 다 보는데서 왜 독 안에 머리를 넣고 소리를 지르세요?”
권씨 부인은 그 질문에 놀란 듯 입이 딱 벌어졌다.
“아이고 어쩐지 내 신세야. 이제야 나한테 와서 말을 걸며 사람 대접을 해주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어. 날 더 비참하게 만들고 조롱하려고 여기 온 거야. 아이고 아이고. 이제 대놓고 날 조롱하네. 돌아가신 마님 닮아서 어질고 인자하다는 소문은 다 헛소문인게야. 아이고 아이고. 여보소. 사람들 이런 불효가 어디 있소. 아무리 내가 첩이로소니. 아버지의 부인이거늘.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종들 앞에서 날 조롱하는구료. 내가 못살아. 내가 못살아.”
집안이 떠나가도록 바닥에 앉아서 소리 지르며 우는 권씨 부인에게 다시 다가가려는 설희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돌아보니 언제 와 있었는지 하륜이 뒤에 있었다. 하륜이 손가락을 튕기자 대성통곡하던 권씨 부인이 갑자기 기절하듯 꼬꾸라졌다.
“아이고, 마님, 마님, 정신 차리세요. 마님, 기절하셨나봐. 큰 일 났네. 의원을 불러. 그리고 마님 안채로 모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권씨 부인을 들쳐 업고 사라지자 설희가 획 돌아서 하륜을 째려보았다.
“당신이 그랬죠? 저 여자분한테. 저렇게 기절시킨 거 당신이죠?”
“어.”
“왜요? 잘못되면 어쩌려구요.”
“잘못 안돼. 진정 좀 시키려고 잠들게 한거니까.”
하륜은 그 말을 남기곤 그 긴 다리를 이용해 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갔다.
“어디가요? 같이 가요.”
설희가 같이 가자고 하면서 하륜을 따라잡으려고 뛰는데 긴 치맛자락에 적응이 안되어서 그만 앞으로 퍽 꼬꾸라지려고 했다.
“악!”
이제 땅에다 코를 박고 모처럼 예뻐진 얼굴인데 쌍코피가 터지고 이마에 혹이 생기고 볼에 멍이 들겠구나 하는 순간 저만치 가던 하륜이 순간 눈 앞에서 그녀를 붙들었다. 설희는 딱딱한 땅바닥 대신 조금은 덜 딱딱한 하륜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았다. 잠시 무슨 상황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느새 하륜이 그녀를 곧바로 세우고 다시 되돌아갔다. 설희는 이번엔 넘어지지 않으려고 치마를 훌쩍 들고 뛰어갔다. 권씨 부인을 방에 누이고 돌아오는 곱단이가 설희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가 저렇게 뛴 적이 있었나? 처음 보는데.’
“아가씨, 아가씨, 어디가요? 밖에 그렇게 마구 다니시면 안돼요.”
곱단이가 그녀를 부르던 말던 설희는 하륜을 놓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빨리 그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