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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아영의 과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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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이라는 게 참 담배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윤미가 탁자 위에 올려둔 진 핑크색 핸드백의 지퍼를 열었다.
“태우시겠어요?”
핸드백 안에 넣어두었던 각진 담배 갑의 캡이 열렸다.
그녀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고는 마른 목에 침 한 모금을 삼키던 혁수를 향해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윤미 씨 태우시죠.”
라이터의 불꽃이 담배 끝에 옮겨 붙고는 노을처럼 붉게 물들고 있다.
“중독이라는 게 그런 건가 봐요. 끊어야지를 반복하면서도 또 손을 대고, 후회하면서도 또 후회될 짓을 반복하게 되죠.”
“아영이가 만났다던 그 남자를 말씀 하시는 겁니까?”
“네.”
파르르 담뱃잎이 타들어가는 소리 뒤로 윤미가 연기와 함께 긴 한 숨을 뿜었다.
“폐암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담배를 끊겠죠. 그런데 도박이라는 건 바로 얼마 뒤에 죽을 거라는 경고를 주지 않으니까요... 반드시 끊어야 된다고 절박함이 없는 건가 봐요.”
“아영이의 남자라던 그 남자. 결국에는 끊지 못한 거군요.”
“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넣고, 낼 수 있는 빚이라는 빚은 다 땡겼다나 봐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넣고 한 순간에 날리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그렇잖아요. 도박으로 돈을 잃게 되면 억울함과 분노 같은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되잖아요.”
“음... 혹시 아영이에게 손을 댔다거나...”
"아뇨. 그랬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요."
부모를 잃고 실의에 빠졌던 소녀.
세상을 향한 마지막 기대를 걸게 된 계기가 된 사람을 잃은 후, 사랑에게까지 배신을 당한 꼴이라니.
"멍청한 것아..."
혁수는 저도 모르게 불끈 두 주먹을 움켜쥐며 혼잣말을 거칠게 내뱉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이미 잃은 돈인데. 돌려받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도박뿐이라고 생각했겠군요.”
“네. 형사님이 제가 할 다음 말을 먼저 해주시네요.”
“대부분 그렇습니다. 도박 사건을 여럿 수사하다 보니까 그 쪽 심리는 빠삭하게 되더군요. 사건 연류 된 도박사건 피해자들이 한 결 같이 그런 심리를 보이더군요.”
혁수의 짐작에 오차가 없다면 아영의 죽음에 그 남자, 박창섭이 깊게 관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며 아영의 죽음의 이유를 알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박창섭을 찾는 것이리라.
“참! 그리고 아영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영이는요...”
이제 혁수의 수사 타겟은 정해졌다.
아영이 사랑했다던 남자.
박창섭.
그를 찾아야 한다.
***
창섭은 손목이라도 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겁이 많은 남자였으니까.
“젠장...”
열심히 돈을 모아오던 아영과는 달리, 창섭은 급여를 받는 족족 도박판에 밀어 넣고 있었다.
“아영이를 행복하게 해주려면 돈이 있어야 된다. 돈. 돈... 돈!”
조급했다.
가진 것이 너무 없어 미안했고, 그런 못난 자신을 믿어주는 여인에게 창피했고, 죄를 짓는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 한 편에 부끄러움도 숨겨져 있었나 보다.
먹을 거 입을 거 마다하고 힘들 게 모아온 오천만 원을 신혼살림에 보탤 수 있어 행복하다던 아영을 실망시켰다.
궁색한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부끄러웠다.
잘난 학벌도, 돈 많은 부모도, 남들보다 잘난 기술도 없던 창섭이 아영을 행복하게 해 줄 방법.
그가 강구해 낼 수 있을 평범한 방법은 없었다.
오직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 믿었다.
도박이었다. 요행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자신에게 미소 지어줄 것이라 바라며 인생의 기회라 여긴 제로섬 게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는 실패했다.
아니, 그들의 치밀하게 쳐 놓은 그물에 제대로 걸려들고 말았다.
창섭은 비참하게 여기던 현실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돈만 있으면 그 고민이 없어질 것이라 믿으며 또 다시 도박판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다시 제로에 가까운 확률인 것을 알지만.
행운의 여신이 돈벼락을 내려줄 것 같은 기분에 또 다시 멍청한 배팅을 이어갔다.
그가 처음 도박에 손을 댔던 날.
한 달을 고생해야 벌 수 있는 돈을 한 순간에 벌었다.
미끼를 덥석 물게 된 지도 모르고 그 미끼를 맛있게 먹어치워 버렸었다.
욕심은 점점 커져갔다.
욕심은 쾌락을 갈망했다.
순간의 쾌락은 반복을 거듭할수록 점점 버릇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음 날.
행운의 여신이 또 다시 웃어줄 것이라 믿었지만 창섭은 석 달 치 월급을 한 방에 잃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잃었던 금액의 두 배를 배팅했고, 그대로 날려버렸다.
창섭은 본전을 찾으려는 생각에 더 큰 금액을 배팅하기로 했다.
수중에 돈이 없었던지라 돈을 빌려야만 했다.
하지만 한 달 살이 창섭에게 저리 대출을 해 주겠다는 은행이 있을 리 없었다.
창섭은 급기가 사채까지 손대기 시작했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하지만 더 이상 행운의 여신의 자비로운 미소는 없었다.
*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아영은 잠시 버티기만 하면 긴 행복이 다가와 줄 거라 믿기로 했다.
창섭과의 결혼도 미루었지만 언제나 그가 곁에 있어 주리라는 생각만으로 되었다.
괜찮았다.
창섭은 그녀에게 잃은 신용을 되찾으려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낮에는 가스배달을 했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빨리 빚을 갚겠다는 다짐을 매일 수백 번 되뇌었다.
"아영아. 오빠가 정말 정신 차릴게. 그리고 내가 너 꼭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야."
아영은 예전으로 돌아온 성실한 창섭의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허나 인생이 어찌 마음먹은 대로만 답을 내어주던가.
혹시나 몰라 매주 사두었던 로또가 3등에 당첨되면서 그 놈의 도박중독이 또 발작을 시작했다.
“행운의 여신.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내게 웃어라.”
창섭은 공돈이라는 생각에 당첨금을 들고 다시 도박장을 향했다.
“몰라. 잃으면 잃는 거고... 따면... 다시 아영이가 웃을 수만 있으면 된다. 그래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다음 날.
복권당첨금을 모두 날린 창섭이 시무룩한 얼굴로 아영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가 들긴 했다.
하지만 그를 믿었기에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
“아영아.”
“할머니. 왜요?”
“인자 엄마라고 불러주면 안 되나?”
“엄마요?”
“그랴... 엄마라고 한 번만 불러봐라?”
할매 해장국의 주인 노파는 아영의 우중충한 표정의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단골손님 중, 요 앞 농협을 다니는 경미에게서 그 간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었던 터였다.
성격 같아서는 빗자루를 들고 후려치며 창섭이 놈을 저 멀리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영이 창섭을 아까는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가 정한 운명이겠거니 하며, 창섭과의 사이를 더 이상 갈라놓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그리고 또 하나.
못난 놈이라도 그녀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노파에겐 시간이 없었다.
“할미가 그동안 너무 미안타. 미안하다. 얘야.”
“아니에요. 무슨 소리세요. 저한테 할머니는 은인이세요. 자꾸 왜 그러세요.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아영아. 엄마랑 술 한 잔 할꺼나?”
오늘은 일찍 가게 문을 닫았다.
저녁 늦게 손님 하나가 오긴 했지만 몸이 안 좋다는 말을 하며 돌려보내기도 했다.
“자. 우리 딸. 엄마랑 짠 한 번 할까.”
노파와 아영은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사이에 두고 소주잔을 나누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인자 우리 아영이 뭐시냐... 쉐... 쉐푸 다 되아 부렀네. 식당 차려도 내보다 더 잘 하겄어. 우리 아영이."
이제 할매의 맛을 그대로 낼 줄 아는 아영이었다.
“할머니...”
아영은 연거푸 술 모금을 들이키는 노파를 궁금한 얼굴로 빤히 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 카드나. 뭐라 부르라 했노?”
“엄...마...”
노파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어색한 발음으로 불러 본다.
아영은 어렵게 뗀 입술로 그녀가 원하는 데로 불러보았다.
부끄러울 정도로 어색했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불러본 것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고마웠다.
노파는 마지막이라 여기던 그 순간 유일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아영아. 미안하다.”
“오늘 왜 그러세요? 계속 이해도 못하게 뜬금없는 소리만 하시고...”
“엄마가 오래 아영 곁에 있지 못할 거 같아서 그랴.”
“무슨 말... 이세요? 왜 그래요? 또. 어디 가시는 거 에요?”
“내사 마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혼자였다 아이가. 그동안 아영이 니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아나? 외로워서 죽고 싶을 때 항상 우리 아영 밝은 모습 때문에 위안이 된 거 아나?”
노파의 눈에서 내려온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턱 끝에 매달렸다 소주잔 안으로 연못에 조각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빠졌다.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잘못한 거 있어요?”
“아니다. 아이야. 잘못은... 잘못은 엄마가 했지. 우리 아영 시집가고 예쁘게 사는 거 보고 가야 하는데 마안노무 저승사자가 허락을 안 해주네.”
열흘 뒤.
배가 아프다며 병원에 주사를 맞으러 다녀오겠다던 노파가 입원을 했다.
“엄마. 많이 아프신 거에요?”
“아이다. 체한 거 같은데 연식이 오래 되서 그란가 인자는 자력으로 회복이 안된다카이. 일흔까지 썼으면 오래 썼다. 인자는 고치기도 힘든가 보다. 늙으면 빨리 죽어야제."
"많이 안 좋으신 거에요?"
"아이다. 많이는 무신. 의사 선상님이 한 일주일 푹 쉬라 하드라. 아영이 니는 내 없어도 가게 잘 보고. 알았제?”
아영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노파를 대신하여 가게를 맡았다.
절대 병문안을 오지 말라는 노파의 신신당부에 병원을 찾지 않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되던 날,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에 급히 택시를 잡아타야 했다.
“왜... 왜 숨겼어요? 왜!”
위암 말기로 고통에 신음하던 노파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다.
창섭은 세상이 무너진 듯 목 놓아 울던 아영을 다독이며 위로해 주는 것 말고는 해 줄 것이 없었다.
“오빠. 할머니 방에 들어가서 장롱 열어보면 영정사진 쓰려고 찍어놓은 사진 있을 거야. 그 거 좀 가져다줄래?”
아영의 부탁에 영정사진을 찾으려 식당을 찾은 창섭은 신발을 신은채로 급히 노파의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장롱 문을 열고 곱게 개진 노파의 옷 위로 올려있던 액자를 들었을 때, 창섭의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가지고 있던 식당과 돈이며, 재산을 모두 아영에게 남긴다는 내용의 유서가 보였다.
총 세 장의 유서 사이로 노파가 친필로 남긴 편지 한 장도 끼워져 있었다.
『아영아. 이 가게 팔고 엄마가 모아둔 돈 보태면 그 못난 놈 빚 갚아주고 조그만 식당 낼 돈까지 될게다. 아영아. 엄마는 먼저 가지만 내 죽어서도 너 잘사는 저 위에 가서도 잘 지켜볼 테니까 꼭 잘 살아야 한다. 사랑한다. 그리고 고맙다. 우리 아영아. -엄마가-』
***
“못 난 계집애.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도박쟁이를 왜 믿고 그렇게...”
윤미의 한 숨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유서의 내용을 숨기고서 아영이 몰래 할머니의 가산을 급히 처분해 버렸어요. 그 것도 헐값에요.”
“이런 망할 놈의...”
자동 반사적으로 혁수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는 경련이 일듯 혁수의 광대 부근이 꿈틀거렸다.
“그 인간이 찾아간 곳은 도박장이었어요. 아영이는 그 때 단골로 찾던 손님들 문상을 맞고 있었고요.”
“이런 쳐 죽일 놈!”
그 딴 찌질이같은 도박쟁이 때문에 인생을 거는 못난 여자.
혁수는 윤미의 옆자리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슬픈 표정의 영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이런 험한 세상에 살면서 착해 빠지게 살아갔던 죄일 것이다.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저질렀기에 연속되는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다 허무하게 삶을 끊어야만 했을까.
혁수는 잠시 하늘을 원망해 본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의 죽음의 이유를 밝혀낼 것이라 다짐을 해 본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