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음?”
옆을 보니 잔뜩 뾰로통해진 얼굴의 리프렌이 서있었다.
“나한테 해야 될 말 없어?”
“해야 할 말…?”
얘 설마…. 아까 마차 일로? 거참…. 여러 가지로 참 손이 많이 가는구나. 완전 애구나 애야.
“아직 화나있는 거야?”
“당연하지! 레이! 다른 건 몰라도 이번엔 너무 너무했어! 숙녀가 아프다는데 신경도 안 써주고! 실망이야!”
“휴…. 그럼 리프렌 너는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은데?”
뭐가 그리 불만도 많은지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응석이란 응석은 다 부리네. 그래, 내가 맞춰준다 맞춰줘.
“우선! 나 같은 아가씨한테 걸맞은 행동을 취해줘! 레이는 맨날 날 바보 취급하잖아!”
그래도 얼추 느끼고는 있었나보네?
후, 아가씨한테 걸맞은 행동이라…. 음….
우선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뒤.
“레, 레이?”
손등에 키스한 뒤.
“…!”
인사말을 한다. 지금의 경우엔 사과지만.
“송구스럽습니다, 리프렌 아가씨. 제가 감히 분수에 맞지 않는 처신으로 아가씨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가씨를 언짢게 해드린 점,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1학년 때 배운 거라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대충 이런 느낌인 걸로 기억하는데.
“아, 알겠어. 용서해줄게. 트, 특별히 봐주는 거니까 레이도 조심해야해! 아! 나, 난 냇가에서 물이나 떠와야겠다!”
뭔가 말을 더듬나 싶더니 리프렌이 손을 뿌리치고 어디론가 황급히 날아갔다. 뭐지. 용서는 받았긴 했지만. 이제 상관없나? 이야, 벌써 점만 해질 때까지 날아갔네. 빠르기도 해라.
“야! 너!”
이번엔 뒤에서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성이 높은 게 뭐가 또 불만인 모양이다.
“왜요?”
“너! 아까 리프렌을 대했던 태도!”
“…아~. 그거요? 살아있었을 적에 배운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왜 나한텐 그런 식으로 안 하는 건데!”
하, 이번엔 그겁니까?
“귀찮아서요. 무릎 꿇고 고급어휘 일일이 골라서 말하는 건 귀찮잖아요. 왜 그러세요, 아마추어같이.”
“당연한 걸 귀찮다고 안 하는 멍청한 놈이 어딨어!”
계속 말대꾸하면 길어질 것 같네.
“자, 얼른 저녁준비나 하자고요. 밥도 못 먹고 자겠어요~.”
“야! 대답 안 해? 야!”
무릇 즐거워야할 시간인 저녁 시간. 일간의 노고를 풀고 다 같이 식사할 때야 말로 하루를 끝낼 준비가 된 됐다고 난 믿고 있다. 고로 저녁 식사는 맛있고 즐거워야만 한다.
그런데….
“이거, 정말 먹을 수 있는 거 맞죠?”
첫 단추부터 영 불안하다.
내 손모가지가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이기에 안젤라가 나서서 도와준 것까진 좋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못해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안젤라는 뭐가 그리 자신만만한지 국자를 놀리는 손이 분주하다.
“내가 나만의 요리에 대한 프라이버시가 있다고 했지? 그냥 얌전히 앉아서 지켜보기나 해.”
“하지만 이건 요리라기보다는 거의 연성 수준인데…. 대체 음식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이게, 내가 아주 가만히 있으니까 못하는 말이 없네. 야, 스프 끓이는 간단한 것도 못할 것 같아?”
“끙. 하지만 완전 뒤죽박죽이잖아요. 순서로나 재료로나.”
“내가 직접 고안해서 만든 레시피라 그래.”
하, 직접 고안한 레시피? 이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라고? 조리법이랑 간 맞추는 것도 엉망진창인데다 뭔지도 모를 액체들을 들이부은 이 스프가? 내 솔직한 감정으로 말하자면 이 스프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말하기 힘들 듯싶었다. 비록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자부할 순 없지만, 단언컨대 안젤라가 자신 있게 제시한 레시피가 통상적인 요리법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고기는 뭡니까? 언뜻 개구리 같기도 하고.”
“프록. 개구리를 닮긴 했는데 비상식으로는 제격이지.”
“향신료는 눈대중으로 넣었고.”
“그런 걸 밀리미터 단위로 재면서 언제 다 하냐? 그리고 향신료는 입맛에 맞게 적당히 넣는 거야, 적당히.”
“그리고 아까 넣은 액체들은 뭐죠? 대강 보니까 6종류는 넘었는데.”
“첨가제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맛이랑 향을 극대로 돋우기 위함이지.”
“채소 모양은 투박…, 으겍!”
“그건 맛이랑 상관없는 거잖아! 칼질이 서투른 거랑은 별개야! 별 걸 가지고 트집 잡고 있네!”
안젤라가 주걱으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하도 세게 후려쳐서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쓰라린 뒤통수를 매만지면서도 안젤라에 손에서 서서히 완성되어가는 다른 의미로써 경이로운 결과물을 쳐다봤다.
“저로서는 납득이 안 간단 말이죠. 요리를 연금술로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네모났게 조각조각이 난 고기. 프록이라는 저 고기, 정말로 먹어도 되는 건지 의구심이 든다. 생긴 것도 영 꺼림칙하게 생긴데다가 하필 생긴 것도 개구리랑 비슷하게 생겨서 거부감이….
안젤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 챘는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핀잔을 줬다.
“프록을 겉보기만으로 판단하면 오산이야. 프록은 겉모습만 개구리를 닮았을 뿐이지 땅에서밖에 못 사는 포유류라고. 봐봐, 이 고기들을 보면 돼지고기나 소고기처럼 생겼잖아?”
안젤라가 스프와 고기조각을 국자로 떠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녀 말처럼 분명 프록이라는 이 동물은 돼지고기나 소고기처럼 생긴 육질을 가졌다. 그냥 이 상태로의 프록고기를 봤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맛나게 먹었겠지만 프록이 숨 쉬면서 살아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이상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 알겠으니까 도로 넣으세요.”
“참내, 남자가 고작 이런 거 가지고 쫄기는.”
국자에 든 스프를 다시 솥에 쏟은 안젤라가 비아냥거렸다.
“무서운 게 아니라 징그러운 생각이랑 겹쳐서 그래요. 솔직히 제가 있던 곳에선 개구리를 먹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귀공자처럼은 아니었지만, 나름 금이야 옥이야 키워진 몸이다. 기생충의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그런 음식은 먹기는커녕 구경도 못한데다 이런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도 말라고 단속을 받은 탓에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이 없다보니, 내 입장에선 개구리를 닮은 프록을 먹는 건 조금 거북했다.
“그럼 지금 먹어보고 결정하면 되겠네. 자, 마침 완성도 됐겠다….”
그 말과 함께 국자를 스프에 담그고 휘휘 젓던 안젤라가 국자 대신 숟가락을 바꿔들어 스프를 뜨더니 좀 전까지 솥에서 펄펄 끓어 뜨거운 스프가 식도록 입김을 불어 스프를 식히기 시작했다.
“먹어봐. 설마 내 성의를 무시한다는 망언은 하지 않겠지?”
먹여주기. 그것도 이성이 직접 만든 요리를 손수! 이 얼마나 로망이 가득한 전개일까. 죽기 전에도 이런 건 엄마한테만 받아봤는데. 아, 괜히 슬픈 기억이 떠올랐어…, 흑. 돌이켜보니 나 여자복이나 로맨틱한 일이 없잖아….
이런 방법으로 나온다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 본심에 물어봐도 이런 전개는 나라면 한번쯤 일어났으면 하는 작은 소원인지라. 심지어 성격은 조금 더럽지만 미모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안젤라가 직접 해주고 있으니. 소원성취는 제대로 이뤘네.
소원을 이뤘는데 요리가 무슨 탓이랴. 그리고 좋든 싫든 일주일은 이런 보존식이나 비상식으로 때워야할 텐데 그때마다 투정 부릴 수 없는 일이니 지금 눈 딱 감고 먹어보자.
“손 떨리니까 빨리 입 벌려. 확 얼굴에 끼얹는다?”
“알겠다고요. 그럼 뭐….”
평소에는 인상을 찡그리는 걸로밖에 안 보이던 안젤라의 얼굴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새침하게 보이는지, 새삼 그녀도 천상여자긴 여자네.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재촉하는 안젤라에게 얼버무리듯 대답하며 겉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스프를 먹었다.
…이 맛은.
스프가 미각을 타고 올라와 뇌리를 자극했다.
안젤라의 스프의 맛은 너무나 맛있는 것도, 그렇다고 심각하게 맛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 번개가 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의 맛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의 스프는….
“합성조미료…?”
상당히 내 입맛에 익숙했다. 심지어 지구에서 먹던 인스턴트 스프랑 맛이 아주 판박이였다. 최근 들어 매일 천연재료로 우려낸 스프에 길들여진 혀가 잊은 줄 알았던 그 강렬한 맛을 기억해낸 것이다.
“어때? 맛있다고 했지?”
안젤라가 자신에 찬 얼굴로 자랑스레 웃어보였다. 아마 고향의 맛에 놀란 내 표정을 보고 ‘착각’한 모양이다.
“잠깐, 어디서 밑장빼기입니까? 합성조미료 넣고서 실력이라 우기면 곤란합니다.”
“밑장빼기? 그리고 합성조미료는 또 뭐야? 맛난 거 먹고 나서 하는 말이 고작 헛소리밖에 없어?”
“음. 맛이야 있긴 하지만, 간만에 살아있었을 적의 맛이 떠올랐달까….”
“…뭐라니 얘.”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는 뉘앙스인 게, 날 한심하게 보는 기색이 확연히 드러났다.
“아, 됐어. 네가 하루 이틀 이상한 짓거리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진상 부리지 말고 곱게 먹어. 아니면 굶든지.”
안젤라가 싫으면 관두라는 식으로 말하며 숟가락을 거뒀다.
그때 왠지 모르겠지만 지금을 놓치면 내 공복을 채울 기회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뇨, 제가 공짜로 입이 뚫려서 허언을 했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리프렌 데려와. 킨, 마차 안에서 그릇이랑 꺼내줄래?”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내 불길한 예감은 적중인 듯하다. 휴, 먹기 거북해도 굶는 건 사절이다. 어차피 먹는 음식인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리프렌은 근처에 있는 냇가로 갔을 테니까 그쪽으로 가봐.”
“자아알~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뜸들이지 말고 얼른 갔다 와! 스프 식으니까! 내 걸작을 망치지 말란 말이야! 하여간에, 말하는 거 진짜 맘에 안 든다니까.”
또 짜증 부리긴. 내 말투가 어디가 어떻다고 그러는지. 뭐, 됐다. 난 내 할 일이나 하자.
신경질을 부리는 안젤라와 그런 그녀를 돕는 킨을 베이스캠프에 두고 근처에 있을 냇가로 갔다던 리프렌을 찾으러 그녀가 날아간 방향 쪽의 숲 안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