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빛은 어느새 가을인듯 파리한 빛을 띈다
김박사는 내내.. 버튼위를 손으로 맴돌뿐이다
김박사는 계속 망설이다 결국엔 전화를 든다. 그리곤 번호를 누른다.
수화음이 울리고 건너편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여보세요- 현민이니?"
여전하다. 부드럽고 기품있는 목소리.
김박사는 웃으며 대답한다.
"김박사라고 불러, 친구로 전화한거 아니야."
냉정하진 못하게 슬쩍 밀어내자 전화기 반대편의
지혁의 어머니는 웃는다. 정말 오랫만에 미소를 짓는다.
"그래.. 알았어- 무슨 일이야?"
"그냥- 오늘 지혁이가 다녀갔거든-"
수화기 너머의 숨이 쉬이 조용해진다. 긴장하는 것이다 무슨 다른 이야기를 할까봐서..
그녀는 그 일 이후 .. 내가 전화만 하면 숨을 못 쉬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녀를 우선 안심 시킨다.
"문제 있어서 전화한거...아니니 긴장 풀어 정옥아.... "
그녀는 조바심 내는 목소리로 되 묻는다
젊음시절 , 그녀가 골이 나면 곧잘 그랬듯이.
"그럼 왜 전화했어?.... 그런 말 하면 나 걱정되어 하는거 알면서.."
나는 최대한 지혁이의 비밀을 지키면서.. 지혁이를 위한 부탁을 했다.
말할수는 없는 내용들이지만.. 방패막이라곤 정옥이 단 하나뿐이니까..
김박사는 망설이다가.. 또 말을 꺼낸다.
"니가 지혁이에게... 시간을 좀 줘-... 그 부탁 하려고..전화했어"
최대한 간결한 부탁이다. 말의 요지만 전하는 부탁.
그녀는 조금 어리둥절한듯 되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
김박사는 그녀의 목소리에 또 , 조금은 비밀을 흘리고 만다.
정옥이는 비밀을 감추는데 능한 편이다. 그렇게 자라오기도 했지만 , 지혁이가 얼마나 예민한지 알기에
알려줘도- 그걸 드러내는 법이 없다. 이제까지...
"지혁이는 현실로 돌아오길 망설여... 여러 가지 일에서 스스로 고립되 있고 싶어했잖아..
이제야 조금 나올 맘이 든거 같아, 뭐 확실하진 않지만.."
"정말이야?"
그녀의 목소리에.. 또 쉬이 흥분이 섞인다. 이거 말을 잘못했다 싶다.
"흥분하지마... 또 나한테 1년은 안 찾아오게 할 셈이야? 그냥 둬 . 내가 말하는건 니 첫째를 말리란 이야기야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첫째가 들쑤셔 놓으면 이젠 기회 없을지도 몰라.. 영원히..."
사실대로 말하면 너의 남편도 안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무례할것 같아 김박사는 입을 닫는다.
그것이 예의란 것이었다. 어쩔수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착찹함이 섞여 대답이 돌아온다.
"첫째가....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정말.... 나는 둘다 사랑하지만... 둘째는 내 아픈 손가락이야...
아픈 손가락에 신경이 한번 더 가는건 당연하잖아.. 아이가 정말 독하게 지혁이를 괴롭혀...
내 귀로 들은건만 몇번이야... 회사 쪽에서 눈치 챌까봐 덮는것도 한두번이지....."
그녀는 여전히 높은 탑 속 라푼젤처럼.... 가련하고 아직도 차가운 사람들 사이에서 산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 니가 지혁이를 더 예뻐 해 온것은 사실이잖아... 그 누구도 자식을 다 똑같이 사랑할순 없어..
그건 거짓말이지.. 뭐 하나라도 더 예쁜 아이가 있는 법이야.. 하다못해 쌍둥이도 그렇다는데..
지혁이가 널 많이 닮았잖니.. 그래서 무의식 중에 그렇게 한게... 첫째에게..."
그녀가 말을 막아선다.
"나 지금 너한테 진료 받는거 아니잖아.. 상담은 됐어.."
나는 결국 조금 웃으며 말을 마치고 만다.
"그래.. 알겠어... 주변 좀 조용하게 단속하라고... "
"그래.. 노력할게..."
그녀의 목소리에 또 애잔함이 물들고 난 괜한 기분에 말을 덧붙인다.
"지혁이가...... 정말 너를 많이 닮았어.......... 얼굴도.... 성미도....
지혁이가 빛 비치는 쪽으로 문 열고 들어서는데... 너인줄 알았어
젊은 시절의 너랑 판박이더라... .. "
그녀는 애틋하게 웃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그렇지... 그 아이 ... 나 닮았어.... 나도 알아...
남자애치곤 지나치게 곱상하지.."
"그래... "
우린 잠시 말이 없다. 나는 그제야 전활 끊어야 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 그럼 잘 지내고 있어... 또 통화하자.."
"응- 고마워,"
전화는 끊기고 , 지혁의 어머니는 또 망설인다.
이제 첫째를... 어떻게 붙잡아야 할까..
-
지견은 어머니의 우려처럼, 이미 지혁에게 사람을 붙인 뒤였다.
소위 말하자면 흥신소지만 이 사람은 지견의 개인 업무만을 보는- 일처리와 뒷처리가
깔끔한 이였다. 그래서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쓸데없는 보고 없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그리곤 결론만을 이야기한다.
언제나 확인된 팩트만을..
"그래서- 어땠어?"
그는 인상이 몹시 나쁘다 싸늘하고 - 깡마르고 얼굴은 검은 편이다.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지견에겐 몹시 깍듯하다.
"... 요즘은 좀 자주 집을 나서더군요- 별 다른 일은 없어 보이지만 - 여자분을 눈여겨 보십시오 - 어제 있었던 일인데
여기 사진."
술취한 여자를 부축하는 사진이다. 이 여자가 그 여잔가?
지견은 흥미롭다는듯 목소리가 달뜬다. 그리곤 곧바로 묻는다.
"..... 둘이네...? 이중 누구랑 같이 갔어?"
"머리 갈색인 쪽이요 키 작고- ... "
"집까지 ?"
그는 잠시 망설인다. 그러더니 대답한다.
"예 따라붙으니 그렇던데- 차에서 내려서 들어가는지 까진 확인 못했습니다 눈치가 원체 빠른지
자꾸 주변을 살펴서... 비도 왔구요- 택시는 그까지 갔고 아무도 안 타고 다시 출발했으니..
집까지 같이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흐음- 그렇지- 녀석은 사고 이후 마치 야생동물처럼 눈치가 빨라졌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 같은 느낌...
지견은 씩 웃는다. 정말 같잖은 놈이군- 순정이고 연정이고
울고 불고 죽네 사네 하면서 ... 머리를 땅에 처박으며 울어 대더니 ...
피가 흐르던 그 녀석의 얼굴을 나는 아직 기억하는데 이 녀석은 벌써 그 일까지 잊었나 보군.
이런짓까진 하고 싶지 않았어 나도. 정말로- ... 니가 순순히 내가 넘기란 대로 넘기기만 했었어도....
이걸 대체 어떻게 사용해야- 이 녀석이 내 자리를 못 넘보고 또 제대로 부모님 눈 밖에 날수 있을까
지견은 맛있는 음식을 고르듯이... 아니 맛있는 와인을 눈 앞에 둔듯 감미롭게 음미한다.
멍청한 놈- ... 속으로 뇌까린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엔 아주 작은 불쾌감이 인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 양심이란게 남아있다면.. 이 불쾌감이 증거일 테다.
"고마워 수고했어- 여긴 인센티브- ... 앞으로도 수고해줘-"
"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지견이 건넨 두꺼운 봉투를 별 말 없이 들고 남자는 빠르게 사라진다.
지견은 책상위에 놓인 사진을 톡톡 친다.. 둘중 여자가 누구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재밌는건 사실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을? 대체 무슨 사이기에......
그리고 집까지 데려간건 하나니까......
사진속의 그 여자를 자세히 본다. 딱히 특색있는 얼굴은 아니다 작고 ..그냥 여자애다
전의 애는 놀랄만큼 예뻤던걸 생각하면- 지견에겐 평범하게 느껴진다.
"이젠 눈까지 떨어졌나 보군-"
지견은 정말 불쾌하게.. 이죽거린다.
-
그 시각.
지혁은 한 번호를 누를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망설이다 누른 전화는 얼마 안되서 연결되었다.
밝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지혁은 눈살을 찌푸린다.
"네 미스터 심- 이제 저랑 이야기 할 마음이 드셨나요?"
...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치곤
능숙한 대답이 온다. 그것도- 꽤나 능글능글 하다.
지혁은 목소리를 단정하게 만든 뒤에 간신히 대답했다.
"... 어디서 볼까요?"
제이미는 웃었다. 딱딱한 지혁이 웃기다는 듯이 ..
"어디서든요- 괜찮습니다 저는 - 같이 친해졌으면 하는 겁니다-
그저 밥 한끼 먹자는게 아니죠-"
그저 밥한끼 였으면 했다. 그래서 한 말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생각보다 적극적이었다.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하민이 이야기를 들을 마음가짐은.. 아닌데...
오늘은 더 그런데..
그런 상황따위 - 가늠할수 없을만큼 상황은 이미 꼬여있다,
아주 여러가지가..
"저녁 8시 쯤에 **동 에서 뵙죠 자세한 장소는 문자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대하죠-"
전화가 끊기고 지혁은 한참을 또 망설인다.
....... 대체 무슨 이야길 해야 할까
만나는게 너무나 싫단 생각만 도돌이표 찍듯이 맴돌 뿐이다.
싫으면서도 오늘 만나기로 한 이유는 시간이 많이 지났기도 하거니와
한 사람은 내 생활에서 아웃시키겠단게 이유였다. 제이미- 이 사람은 이제 내 생각에서 나가줬으면 했다.
하민이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지만- 전의 인생에 대해서- 전의 그 아이에 대해서 굳이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알 필요가 없단게
그의 마음이었다. 자신이 알았던 그녀면... 충분했다. 자신이 안 그 부분이면..... 그것으로 충분했기에
더..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신한듯한 죄책감과 손에 쥔걸 놓치고 싶지 않은 부담감.
지혁은 그저 혼란 스러웠다. 그저... 이 젋은 외국인을 자신의 생각에서 이젠 떼어놓고 싶었다.
전화를 끊은 후- 제이미는 싱글싱글 웃으며 전활 내려 놓고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찾아 입는다. 여전히 호텔에서 머물고 있다보니
세탁된 옷가지는 다림질 까지 말끔히 되서 방으로 늘 올라온다.
옷을 가지런히 차려 입는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펴며 라운지로 내려간다. 그리고 곧 다가온 웨이터에게 커피 한잔을 부탁한다.
향긋한 커피향을 맡으며 제이미는 지혁을 만날 준비를 시작했다.
"...기대되는군"
제이미는 생각보다 익숙한 억양으로 한마디를 중얼거렸다.